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 시집『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문학과지성사, 1979) ........................................................................
이명박 정부 시절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당시 한 국회의원이 정운찬 총리에게 '마루타'가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정 총리는 "전쟁과 관련한 포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라며 흐릿하게 말을 얼버무린데 이어 ‘731부대’를 묻는 질문엔 "항일 독립군 부대…인가요"라고 답하여 세간의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서울대학교 총장 출신 저명한 경제학자인 총리의 이 답변은 단지 말실수라거나 상식의 빈곤으로 관용하기엔 너무나 어이없어 서글픈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총리는 세종시 말고 알고 있는 게 뭐냐"는 질타를 받고 국민들과 야당으로부터 얕잡혀 결국 ‘아바타’총리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채 물러나고 말았다.
‘마루타’나 ‘731’은 역사교과서에 소상히 기술되지 않았고 시험에도 출제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흥미본위’의 영화나 소설의 소재로도 여러 번 다뤄진 상식적인 용어이다. 오며가며 가벼운 호기심만 작동되었더라도 충분히 뇌리에 각인될 낱말이 아니던가. 고위공직자라면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하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꽉 막힌 청맹과니여서는 곤란하다. 그리고 규범과 상식은 기본이다. 규범은 사회적 관습과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을 의미하며, 상식이란 사회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개념의 이해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관리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에 대해 자세히 써 놓은 ‘목민심서’는 공무원의 필독서가 되어야할 것이다.
자신의 업무범위도 모르고 책임과 권한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총리도 있다. 지금의 황교안 총리는 지난 2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김광진 의원이 우리나라 국가테러대책회의 의장이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정확히 모르겠다’ ‘확인해 보겠다’고 대답한 사람이다. 김 의원이 의장은 국무총리라고 알려주자 그때서야 ‘네, 총리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국가대테러대책회의가 버젓이 존재하는데도 단 한 번 열지 않고서는 작년 ‘테러방지법’ 통과시켜달라고 그 야단을 치지 않았던가. 솔직히 군대도 안 갔다 온 사람이 안보니 위기관리니 입으로만 나불되면서 국군최고통수권자가 될 자격과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자리가 높아질수록 높은 자리를 도모할수록 그들이 받아야할 돌발 질문은 많아진다. 시내버스비가 얼마냐, 옥탑방을 아느냐 따위의 낡은 기출 문제에서부터 드라마의 주인공이나 한류스타의 이름까지 다양하다. 나는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번 해 보고 싶다. 가령 ‘백석’이란 사람을 아느냐, 신동엽을 아느냐, '껍데기는 가라'란 시에서 껍데기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서사시 '금강'은 어떤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담았느냐, 가장 최근에 읽어본 소설이 있느냐, 제주 4.3 사건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 대구 10월 항쟁은 들어봤느냐, 그리고 박수근 그림 값이 얼마쯤 나갈 것인가는 말고 납작납작한 화풍에 대한 느낌이 어떠한지를.
지식 기반 사회의 주역이 스페셜리스트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전문성에만 함몰되면 다른 분야에 대한 포용력을 가로막아 균형 감각이 허물어진다. ‘사이’를 외면하면 소통이 안 되고, 불통이면 무지로 인한 폭력이 자행되기도 한다. ‘사이’를 허물어 통섭하고 융합하는 제너럴리스트의 덕목이 무엇보다 소중한 시대다. 철은 높은 건물을 올리는 철근이 되기도 하지만 바이올린의 가는 줄로도 묶여진다. 김기춘이나 우병우, 박근혜처럼 자신이 이해하고 하고 싶은 말만 고집하여서는 소통이 될 리가 없다. 자신이 잘 모르고 듣고 싶지 않은 말도 들을 수 있을 때, 그 ‘생각과 사이’에서 소통의 환한 길도 열릴 것이다. 그리고 그 소통이 참회와 용서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