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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지 [列國誌] 497
■ 2부 장강의 영웅들 (153)
제8권 불타는 중원
제 20장 동방의 암운 (2)
최저(崔杼)의 국정 장악에 반기를 들고 은밀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사람은
선대부터 악연을 맺어온 고고(高固)의 아들 고후(高厚)였다.
고후(高厚)는 최저에 의해 축출된 고무구의 동생으로, 늘 최저에게 보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가장 빠른 길은 주공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제영공의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 중에 고후(高厚)는 뜻밖의 사실을 알아냈다.
제영공의 마음이 세자인 광(光)에게서 상당히 멀어져 있음을 알아챈 것이었다.
제영공에게는 여러 여인이 있었다. 그의 정실 부인은 노(魯)나라 공실의 딸이다.
이름을 안의희(顔懿姬)라고 했다. 그런데 안의희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
제영공이 첫 아들을 본 것은 안의희가 시녀로 데려온 질녀 종성희(鬷聲姬)에게서였다.
그 아들이 곧 세자 광(光)이다.그 후 중자(仲子)와 융자(戎子)라는 자매를 후궁으로 들였다.
중자도 아들을 낳았다. 그가 공자 아(牙)다. 지난날 숙손교여가 후궁으로 바친 딸도 아들을 낳았다.
그의 이름은 저구(杵臼)였다.궁중의 여러 여인 중 제영공은 융자를 가장 총애했다.
융자(戎子)는 욕심이 많은 여인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들을 생산하지 못했다.
대신 언니인 중자의 소생인 공자 아(牙)를 무척 사랑했다.
공자 아(牙)는 성장하면서 총명함을 보였다. 융자(戎子)는 자주 자신의 침실을 찾는
제영공에게 틈만 나면 공자 아(牙)를 칭찬했다.- 가히 군주의 자질을 갖추고 있습니다.
여기에 숙사위(夙沙衛)라는 시인이 가세했다. 시인(侍人)이란 후궁의 사무를 맡아보는 환관이다.
숙사위는 융자의 처소에 머물며 자주 제영공을 접했다. 말재간이 뛰어난 그는 이내
제영공의 신임을 받았고, 마침내는 제영공의 침전으로 옮겨 공궁의 일까지 관여하기에 이르렀다.
융자와 숙사위로부터 공자 아(牙)의 얘기를 자주 들은 제영공은 점차 세자 광(光)을 멀리하고
공자 아(牙)에게 애정을 쏟았다. 이것을 고후(高厚)가 눈치챈 것이었다.
- 지금 세자는 무능하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공자 아(牙)를 세자로 올리려는 마음이 있는
융자(戎子)와 숙사위(夙沙衛)는 그런 고후를 보고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뻐했다.
그들은 비밀리 궁중에 당을 만들고 공자 아(牙)가 뜻을 펼 수 있도록 적극 후원하기로 결의했다.
이러한 고후의 암암리 행동은 마침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제영공이 고후를
공식적으로 공자 아(牙)의 부(傅)로 삼은 것이었다. 부(傅)란 스승 혹은 후견인을 말함이다.
- 고후가 공자 아(牙)의 부(傅)가 되었다고?
최저(崔杼)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고후(高厚)는 이미 제영공의 총신(寵臣)으로 자리를 굳힌 뒤였다.
최저는 입술을 깨물었다.'여우 같은 자!'
그 무렵해서 내(萊)나라를 정벌하러 떠나갔던 안약으로부터 보고가 날아들었다.
- 내성(萊城) 함락.- 내(萊)나라 군주 도주.승전이었다.
제(齊)나라 공궁에는 기쁨의 환호가 일었다.
수백 년 동안 골머리를 앓아왔던 내(萊)나라가 아니던가. 제나라의 숙원이랄 수도 있었다.
그것을 안약(晏弱)이 멋지게 이룩해낸 것이었다.BC 567년(제영공 15년) 11월의 일이었다.
1만 군사를 거느리고 임치성을 떠난 지 2년 만의 쾌거.
이 무렵은 진도공(晉悼公)이 정나라를 놓고 초나라와 수차례 대결을 벌이던 때이기도 했다.
"3년을 약속했었는데, 1년을 단축시켰군."최저(崔杼)의 소감이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안약을 정벌군 대장으로 천거한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움도 배어 있었다.
그 다음해 정월, 안약(晏弱)은 임치로 개선해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로써 850리에 달하는 바다까지의 길이 뚫리게 되었구려. 참으로 빛나는 공훈이오."
제영공(齊靈公)은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안약을 맞이했다.당연히 그에 대해 포상도 내렸다.
- 이유(夷維) 땅을 안약의 영지로 내리노라.
이유(夷維)는 내(萊)나라 땅이었던 곳으로 내성(萊城)으로 가는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다.
지금의 산동성 고밀현 일대다.안약(晏弱)은 감격했다.
송(宋)나라에서 제(齊)나라로 망명해온 1세대로서 어엿한 안씨(晏氏) 일족의 영지를 확보했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안약(晏弱)의 집안은 이유(夷維)로 이주했다.
안약에게는 안영(晏嬰)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관중(管仲)과 더불어 제(齊)나라 최고 재상으로
손꼽히는 바로 그 안영이다. 이 무렵 안영은 열서너 살의 소년이었을 것이다.
사마천이 쓴 <사기열전>을 보면,안평중(晏平仲) 영(嬰)은 내나라 이유 사람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 아버지인 안약 대에 이유(夷維)를 영지로 받았기 때문이다.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안영에 대해 좀더 알아보자.
안영의 자(字)는 중(仲)이다. 둘째 아들이라는 뜻이다. 형이 있었을 것이겠으나
어떤 사서에서도 장남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일찍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흔히 사람들은 안영을 안평중(晏平仲)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평'은 아마도 시호인 듯싶다.
안영(晏嬰)의 출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온다.
안영(晏嬰)은 태어났을 당시 몸이 몹시 작고 허약하여 울음조차 제대로 터뜨리지 못했다.
모두들 며칠 못 가 죽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런데 그 갓난아기는 죽지 않고 살아났다.
안약은 이 아이에게 '영(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영'이란 조개를 엮어 만든 목걸이라는 뜻이다.
옛날에는 갓 태어난 계집아이에게 이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조개를 생명력의 상징으로 보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갓난 계집아이를 영아(嬰兒)라고도 한다.
안약(晏弱)이 자신의 아들에게 '영'이라고 하는 계집아이 이름을 지어준 것은 주술적인 면이
강하게 작용한 때문이 아닐까.만일 그랬다면 안약의 이 축원은 대단한 효험을 거둔 셈이다.
훗날 이 아이가 성장하여 고금을 통해 이름을 날리는 명재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내(萊)나라 합병 이후 제영공(齊靈公)은 눈에 띄게 변했다.
- 패자(覇者).
제환공 이후 제나라 군주들의 꿈이었다. 제영공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나라를 병탄하고
부쩍 자신감을 가졌다.'나도 언젠가는.............'
그러나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무엇보다도 서방의 강대국 진(晉)나라의 기세를 꺾을 수 없었다.
그 무렵, 진도공(晉悼公)은 많게는 1년에 서너 차례씩, 적게는 1년에 한 번씩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을 가졌다. 대부분은 초나라의 동맹국을 치는 일 때문이었다.
이것이 제영공에게는 여간 아니꼬운 게 아니었다.
첫 패공을 탄생시킨 동방의 대국으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여기까지는 야심을 품은 제후로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그런데 제영공은 이 연합군의 참여를 공실의 일과 교묘히 연관시켰다.
- 세자 광(光)이 나 대신 참석하라.자신의 대리인으로 세자 광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 수행자로서는 세자 광(光)의 태부(太傅)이자 재상인 최저(崔杼)가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세자 광과 최저는 열심히 나라 밖으로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회맹을 자주 소집하는 진도공의 오만함에 대한 불만으로 대리인을 보내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횟수를 거듭할수록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최저(崔杼)는 눈치챘다.
'이게 뭔가? 세자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려는 수작이 아닌가?'
전장(戰場)이란 위험한 곳이다. 자칫하면 죽거나 포로가 되는 것이 전쟁인 것이다.
그런 전쟁에 다음 후계자인 세자를 한두 번도 아니고 대여섯 차례나 내보내고 있다는 것은
분명 세자를 위해하려는 음모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이런 음모를 눈치챈 사람은 최저(崔杼)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안약(晏弱)도 제영공의
위험한 놀이의 저의를 간파했다.
"싸움에서 공을 세우지 못하면 세자와 그 수행자는 자연히 무능하다는 소문이 나돌겠지요."
지나가는 말투로 던진 안약의 말에 최저(崔杼)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공은 세자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되자 최저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 고후(高厚)의 얼굴이었다.
498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498
■ 2부 장강의 영웅들 (154)
제8권 불타는 중원
제 20장 동방의 암운 (3)
이 무렵, 제(齊)나라 수도 임치성(臨淄城) 안에 이상한 유행 하나가 급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이른바 '장부(丈夫)의 치장'이었다.궁 안이고 밖이고 여인들이 남자 복색을 한 채 활개쳐대고 있었다.
도성 안의 시장에서는 남성용 장신구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이러한 현상은 제(齊)나라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말해주는 것일수도 있으나,
달리 해석하면 제나라 공실의 어지러움을 상징하는 유행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남장(男裝)여인이 유행하게 된 배경을 추적하면 그 원인은 제나라 임금인 제영공, 아니 그의
애첩인 융자(戎子)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융자(戎子)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북융 출신의 여자였다.
활달한 풍속을 배경으로 성장했다. 게다가 천성까지 거리낄 것 없는 그녀는 어느 때부터인가
궁중 의상을 벗어버리고 남자들이 입는 활동복을 즐겨 입기 시작했다.
그것을 제영공(齊靈公)이 보고 몹시 기뻐했다.그 뒤로 장부의 치장은 궁중 여인들에게로 번졌고,
마침내는 성안의 모든 여인들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남성용 장신구를 착용하고 거리를
나돌아다니는 것이었다.그런데 역사는 참 묘하다.
이 유행이 엉뚱하게도 안영(晏嬰)을 역사 전면으로 등장시키는 매개가 될 줄이야.
장부 복색으로 치장한 여인들이 거리마다 가득한 것을 본 제(齊)나라의 뜻있는 신료들이
제영공을 찾아가 간(諫)했다.- 복장의 어지러움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여인들이 남장을 하는 것은 남녀의 구별을 잃는 것이요, 비속(卑俗)입니다.
또한 재정의 낭비이기도 합니다.
장부의 치장을 법령으로 금하십시오.제영공이 보기에도 남장 여인들의 수가 너무 많았던 모양이다.
제영공(齊靈公)은 신료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여인들의 남장(男裝)을 법으로 금지했다.
그런데 이상했다.그날 이후로 보이지 않아야 할 남장 여인들이 여전히 거리를 활개치고 있는 것이었다.
오히려 더 늘어나는 추세였다. 신료들은 다시 제영공에게 간(諫)했다.
- 장부(丈夫)의 치장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법령을 시행하는 관리들이 태만하기 때문입니다.
관련 부처의 관리들에게 엄정하게 법을 시행하라 이르십시오.제영공(齊靈公)은 다시 명을 내렸다.
- 남장 여인을 발견하는 대로 옷과 띠를 베어라. 한 사람의 위반자라도 남아 있으면
단속하는 관리들을 벌주겠다.그 날, 임치성(臨淄城) 거리 여기저기서는 진기한 광경이 벌어졌다.
단속 관리들에 의해 겉옷과 허리띠가 잘린 여인들이 속옷을 드러낸 채 교성을 내지르며
질주해대는 광경이었다.'이 정도면 다 사라졌겠지.'
관리 책임자는 이렇게 생각하고 다음날 거리로 나가보았다. 그러나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장(男裝) 여인의 수가 전날보다 더 많아져 있는 것이었다."이게 어찌 된 일인가?"
눈을 부릅뜬 관리 책임자는 다시 수하들을 다그쳤다. 거리에서는 또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칼을 든 관리들은 남장 여인들을 쫓고, 관리를 발견한 그녀들은 괴성을 질러대며 날렵하게 도망쳤다.
이러한 광경은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벌어졌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제영공(齊靈公)은 분노했다.- 감히 나라의 법을 무시하다니.
그러나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관리 책임자를 파직시킨 것이 고작이었다.
후임 책임자가 들어섰지만 거리에는 여전히 장부(丈夫)의 치장이 유행하였다.
제영공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고민거리가 생긴 것이었다.
이럴 즈음 안영(晏嬰)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어릴 적의 영향 때문인지 키는 작았다.
6척이 채 안 되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총명과 예지(叡智)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아버지 안약을 따라 궁으로 들어가 제영공을 알현할 기회를 가졌다.
제영공이 경대부(卿大夫)들과 그 자제들을 초청하여 점심 식사를 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 무렵은 남장 여인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는 때라 제영공(齊靈公)의 얼굴은 퍽 어두웠다.
식사를 마치고 환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그 문제가 대두되었다."묘안이 없겠는가?"
제영공(齊靈公)의 물음에 경대부들과 그 자제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예민한 사안이기 때문이었다.더욱이 그 문제로 인해 제영공의 기색은 무척 사나워 있었다.
이럴 때는 입 다물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보신(保身)의 처세다, 라고 그들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문득 무거운 공기를 가르는 듯한 맑은 음성이 실내를 울렸다.
"황공하오나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너무나 생기에 찬 음성이라 사람들은 깜짝 놀라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눈길을 돌렸다.
이제 막 출사(出仕)하여 행정 부서의 말단 관리로 일하는 안영이었다.
그러나 제영공도 그렇고 경대부들도 그렇고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대 이름이 무엇인가?"제영공(齊靈公)이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안영이라고 합니다."
"성이 안(晏)인 것을 보니 안약의 아들이로군.""그렇습니다.""그대 의견을 말해보라."
안영(晏嬰)이 주저없이 말하기 시작했다."남장 여인의 일은 오로지 주공의 잘못에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지금 남장 여인에 대해 안에서는 허용하시고, 밖에서는 금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소의 머리를 가게 문 앞에 내걸고 안에서는 말고기를 파는 것과 같습니다.
주공께서는 어찌하여 궁중의 남장(男裝) 여인부터 금지하지 않으십니까?
궁 안에서 그러한 복색이 사라진다면 궁 밖의 일은 걱정하실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순간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아니 숨까지 멎은 듯했다. 이 청년이 지금 제정신인가.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하여 사나운 기색을 드러내고 있는 제영공에게 '잘못은 주공에게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으니, 형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그런 직설적인 말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안영(晏嬰)의 말은 참으로 지독한 빈정거림이었다.
잘못은 궁중 안에 있는데, 어찌 죄 없는 궁중 밖의 백성들만 괴롭히는 것인가. 이보다 더 심한 직언은
없으리라. 그 아버지 안약(晏弱)까지도 안색이 돌변했다.
하지만 정작 안영만은 태연자약(泰然自若)했다.아니 또 한 사람, 눈 속에 광채를 발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제영공(齊靈公)이었다.- 밖에는 소의 머리를 내걸고 안에서는 말고기를 판다.절묘한 비유였다.
실제로 그랬다. 궁중에서는 융자(戎子)를 비롯한 그 시녀들이 여전히 남장을 하고
궁 안팎을 들락거리는 것이었다. 이것을 어찌 백성들이 알지 못하겠는가.
'아 -!'제영공(齊靈公)은 번개라도 맞은 듯 몸을 떨었다.노여움의 전율이 아니었다.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무엇인가의 신선함이 상쾌하리만큼 그의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제영공(齊靈公)은 고개를 들고 전에 없이 큰소리로 외쳤다."숙사위를 불러라."
근시(近侍) 숙사위가 총총걸음으로 나타났다가 제영공의 지시를 받고는 다시 사라져갔다.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안 되어 임치성 안에서는 남장 여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제영공(齊靈公)은 결코 명군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아니, 암군(暗君)에 가까운 군주였다.
명군과 암군의 차이는 크지 않다. 어찌 보면 종이 한 장 차이다. 올바른 신하의 간언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못하느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볼때 제영공(齊靈公)은 결코 쓰디쓴 간언을 용납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는 달콤한 말을 좋아했다. 최저(崔杼)의 등장도, 고후(高厚)의 재기도 모두 그러한 배경하에 이루어졌다.
가까이로는 근시 숙사위(夙沙衛)가 가장 좋은 예이다. 그는 자신을 향한 비아냥이나 독설을 듣고
홀연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명군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안영의 간언을 수용했다는 것은 큰 사건이었다.
아니, 뒤집어 말하면 그런 제영공을 설득한 안영(晏嬰)의 용기와 설변이 더 크게 빛나는 일화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랬다.그날 후로 안영은 일약 임치성(臨淄城)내에서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이렇게 안영(晏嬰)은 역사 무대에 등장했다.
499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