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년 전이었다. 그날은 부활절(1885년 4월 5일)이었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인천 제물포항에 임신 2개월 된 부인과 함께 아펜젤러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그리고 언더우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조선 땅에 도착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해 일본을 거쳐 제물포항까지 오는 긴 여정이었다. 가장 먼저 배에서 내린 이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부인이었다. 낯선 땅 조선의 제물포항에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기도를 했다.
“조선 백성들에게 밝은 빛과 자유를 허락하여 주옵소서”라는 그들의 기도는 결국 꽃을 피웠다. 제물포항에 도착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행보는 달랐다. 아펜젤러 부부는 인천에서 첫 밤을 보냈고, 언더우드는 조랑말을 타고 한양으로 가 첫 밤을 보냈다. 이 때문이었을까. 이후 감리교와 장로교의 조선 선교 방향도 크게 갈리었다. 언더우드는 한양과 조선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반면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는 인천을 중심으로 선교의 씨앗을 뿌렸다. 개신교계에서 인천은 ‘감리교의 도시’로 통한다. 지금도 인천에는 감리교 교회가 유달리 많다. 아펜젤러는 제물포에 한 달간 머물며 예배를 드렸다. 그 자리에 내리교회가 세워졌다. 조선 땅에 세워진 최초의 감리교 교회였다. 처음에 기와지붕을 얹었던 내리교회는 1901년에 붉은 벽돌의 예배당이 됐다. 나중에 한양으로 온 아펜젤러가 지은 서울 정동제일교회와도 무척 닮았다.
감리교 이철 감독회장은 “1902년 하와이 첫 이민자들은 주로 내리교회 교인들이었다. 하와이에서 교회를 세우는데도 크게 기여했다”며 “훗날 하와이 교민들이 조국의 발전을 위해선 미국 MIT처럼 좋은 대학이 필요하다며 보낸 성금으로 인하대의 전신인 인하공과대학이 세워졌다. 인천과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따서 ‘인하’라는 학교 이름을 지었다”고 설명했다.
고려는 물론이고 조선 시대에도 강화도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강화도를 통과해야만 한양으로 가는 길목인 마포나루에 배가 닿을 수 있었다. 19세기 들어서자 서구 열강이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발발했다. 둘 다 강화도에서 발생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두 차례 난리로 인해 강화도 사람들이 입은 피해는 컸다. 전사자도 많았고, 마을도 불탔다. 강화도민의 서양에 대한 증오와 반감은 무척 컸다. 그런데 지금은 강화도에 있는 감리교회만 130개 넘는다. 심지어 1900년대 초에도 강화도의 개신교인 수는 700~800명에 달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제물포항에서 배를 타고 한양으로 가려면 한나절이 걸렸다. 반면 강화도에서는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선교사들은 인천 다음으로 강화도를 중요한 선교지로 삼았다. 물론 쉽진 않았다. 아펜젤러의 뒤를 이어 내리교회의 담임 목사가 된 존스 선교사는 강화도에 들어가려다 강화 유수(강화를 다스리던 지방 관리)에게 문전박대를 당했다. 강화 주민들 반발도 컸다. 서당 훈장이자 양반이었던 교산리의 김상임은 존스 선교사가 마을 땅을 밟으면 세례 받는 사람의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경고했다. 결국 존스 선교사는 배에서 내리지 않은 채, 배 위에서 선상 세례를 해야 했다. 강화에서 이루어진 첫 세례였다.
나중에는 완고하던 김상임도 기독교인이 됐다. 그는 강화에 첫 교회까지 세웠다. 그게 강화에서 ‘어머니 교회’로 통하는 교산교회다. 김창룡(교산교회 담임) 목사는 “교회가 세워진 뒤 마을의 양반과 평민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 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성공회의 강화 선교는 수월한 편이었다. 고종이 강화도에 해군사관학교(통제영학당)를 세울 때 영국인을 교관으로 임명했다. 성공회는 교관을 따라서 강화읍성에 입성했다. 조선 정부도 반대하지 않았다. 읍성 안에 세워진 대한성공회 강화읍교회는 건축 양식부터 특이했다. 붉은 벽돌이 아니라 기와지붕의 한옥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결합한 예배당이다. 입구에는 ‘天主聖殿(천주성전)’이라고 쓴 한문 현판이 있었다.
예배당 안도 남달랐다. 강단 위에는 ‘萬有眞原(만유진원)’이라고 쓴 현판이 있었다. 하느님은 만유의 참된 근원이란 뜻이다. 교회 뜰에는 인도에서 가져온 보리수나무도 있고, 유교의 상징인 회화나무도 심겨 있었다. 강화읍교회 관할 사제인 성공회 이경래 신부는 “당시 성공회는 토착화 선교 정책으로 주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