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마로니에 그늘 아래서
 
 
 
카페 게시글
순수한 영혼들의 맑고 아름다운 명시 마을 스크랩 안도현의 시
참마로니에 추천 0 조회 20 07.05.17 22: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진/나의 마음을 조금 더 건조하게님 블러그에서

 

 

빗소리 듣는 동안/제1회 노작문학상/안도현

1970년대 편물집 단칸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 얘기하는 것처럼
비가 오시네

나 혼자 잠든 척하면서 그 누나들의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까지 다 듣던 귀로, 나는
빗소리를 듣네

빗소리는
마당이 빗방울을 깨물어 먹는
소리

맛있게, 맛있게 양푼 밥을 누나들은 같이 비볐네
그때 분주히 숟가락이 그릇을 긁던 소리
빗소리

삶은 때로 머리채를 휘어 잡히기도 하였으나
술상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시간보다
목 빼고 빗줄기처럼 우는 날이 많았으나

빗소리를 모아 둔
비 온 뒤의 연못물은 젖이 불어
들녁을 다 먹이고도 남았네
내 장딴지에는 살이 올라 있었네


弔文 - 안도현

 


 뒷집 조성오 할아버지가 겨울에 돌아가셨다 
 감나무 두 그루 딸린 빈집만 남겨 두고 돌아가셨다 
 살아서 눈 어두운 동네 노인들 편지 읽어주고 먼저 떠난 이들 묏자리도 더러 봐주고 추석 가까지면 동네 초입의 풀 환하게 베고 물꼬 싸움 나면 양쪽 불러다 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심판 봐주던 
 이 동네의 길이었다, 할아버지는 
 슬프도록 야문 길이었다

 돌아가셨을 때 문상도 못한 나는 죄송해서 마루 끝에 앉아
 할아버지네 고추밭으로 올라가는 비탈, 오래 보고 있다

 지게 지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할아버지가 오르내릴 때 
 풀들은 옆으로 슬쩍 비켜 앉아 지그재그로 길을 터주곤 했다 
 비탈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던 그 길은 여름 내내 
 바지 걷어붙인 할아버지 정강이에 볼록하게 돋던 핏줄같이 파르스름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비탈길을 힘겹게 밟고 올라가던 
 느린 발소리와 끙, 하던 안간힘까지 돌아가시고 나자 그만

 길도 돌아가시고 말았다

 풀들이 우북하게 수의를 해 입힌 길,
 지금은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길 위로
 조의를 표하듯 산그늘이 엎드려 절하는 저녁이다



삶은 감자

-안도현



삶은 감자가 양푼에
하나 가득 담겨 있다
머리 깨끗이 깎고 입대하는 신병들 같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중이다
감자는 속속들이 익으려고 결심했다
으깨질 때 파열음을 내지 않으려고
찜통 속에서
눈을 질끈 감고 익었다
젓가락이 찌르면 입부터 똥구멍까지
내주고, 김치가 머리에 얹히면
빨간 모자처럼 덮어쓸 줄 알게 되었다
누구라도 입에 넣고 씹어봐라
삶은 감자는 소리 지르지 않겠다고
각오한 지 오래다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 안도현

 

 

   어릴 때, 두 손으로 받들고 싶도록 반가운 말은 저녁 무렵 아버지가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정육점에서 돈 주고 사온 것이지마는 칼을 잡고 손수 베어온 것도 아니고 잘라온 것도 아닌데
  신문지에 둘둘 말린 그것을 어머니 앞에 툭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한 마디, 고기 좀 끊어왔다는
  가장으로서의 자랑도 아니고 허세도 아니고 애정이나 연민 따위 더더구나 아니고 다만 반갑고
고독하고 왠지 시원시원한 어떤 결단 같아서 좋았던, 그 말
 
  남의 집에 세 들어 살면서 이웃에 고기 볶는 냄새 퍼져나가 좋을 거 없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고기를 뒤적이며 말했지
 
  그래서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게 방문을 꼭꼭 닫고 볶은 돼지고기를 씹으며 입안에 기름 한입
 
고이던 밤
 
 
사진/미리내님 블러그에서
 

애기똥풀 / 안도현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

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


사진/인서점 아저씨 블러그에서

봄똥

-안도현




봄똥, 생각하면
전라도에 눌러 앉아 살고 싶어진다

봄이 당도하기 전에 봄똥, 봄똥 발음하다가 보면
입술도 동그랗게 만들어주는
봄똥, 텃밭에 나가 잔설 헤치고
마른 비늘 같은 겨울을 툭툭 털어내고

솎아 먹는
봄똥, 찬물에 흔들어 씻어서는 된장에 쌈 싸서 먹는
봄똥, 입 안에 달싸하게 푸른 물이 고이는

봄똥, 봄똥으로 점심밥 푸직 먹고 나서는
텃밭가에 쭈그리고 앉아
정말로 거시기를 덜렁덜렁거리며
한 무더기 똥을 누고 싶어진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기차/안도현 

 

   

삼례역에서 기차가 운다, 뿡뿡, 하고 운다, 우는 것은 기차인데

울음을 멀리까지 번지게 하는 것은 철길이다, 늙은 철길이다

 

저 늙은 것의 등뼈를 타고 사과 궤짝과 포탄을 실어 나른 적 있다

허나, 벌겋게 달아오른 기관실을 남쪽 바닷물에 처박고 식혀보지 못했다

 

곡성이며 여수 따위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반하지 못했으므로

단 한 번도 탈선해 보지 못했으므로 기차는 저렇게 서서 우는 것이다

 

철길이란, 멀리 가보고 싶어 자꾸 번지는 울음소리를

땅바닥에 오롯이 두 줄기 실 자국으로 꿰매 놓은 것

 

그 어떤 바깥의 혁명도 기차를 구하지 못했다

철길을 끌고 다니는 동안 서글픈 적재량이 늘었을 뿐

 

그리하여 끌고 다닌 모든 길이 기차의 감옥이었다고

독방이었다고, 그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도 저도 녹슬었다고

 

기차는 검은 눈을 끔벅끔벅하면서 기어이

철길에 아랫배를 바짝 대고 녹물을 울컥, 쏟아 낸다

 

사진/그리운 섬진강님 블러그에서

숭어회 한 접시 / 안도현

 

눈이 오면, 애인 없어도 싸드락싸드락 걸어갔다 오고싶은 곳
눈발이 어깨를 치다가 등짝을 두드릴 때
오래 된 책표지 같은 군산, 거기
어두운 도선장 부근

 

눈보라 속에 발갛게 몸 달군 포장마차 한 마리
그 더운 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거라
갑자기, 내 안경은 흐려지겠지만
마음은 백열 전구처럼 환하게 눈을 뜰 테니까

 

세상은 혁명을 해도
나는 찬 소주 한 병에다
숭어회 한 접시를 주문하는 거라
밤바다가, 뒤척이며, 자꾸 내 옆에 앉고 싶어하면
나는 그날 밤바다의 애인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이미 양쪽 볼이 불콰해진
바다야, 너도 한 잔 할래?
너도 나처럼 좀 빈둥거리고 싶은 게로구나
강도 바다도 경계가 없어지는 밤
속수무책, 밀물이 내 옆구리를 적실 때

 

왜 혼자 왔냐고
조근조근 따지듯이 숭어회를 썰며
말을 걸어오는 주인 아줌마, 그 굵고 붉은 손목을
오래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라
나 혼자 오뎅 국물 속 무처럼 뜨거워져
수백 번 엎치락뒤치락 뒤집혀 보는 거라





에게 묻는다/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뜨거운 밤 / 안도현
 
 아, 고 잡거들이 말이여, 불도 한점 없는 거 뭣이냐 깜깜한 뮛동가에서 둘이서 불이 붙어가지고는 누가 왔는지, 누가 지나가는지, 누가 처다보는지 모르고 말이여, 여치는 싸랑싸랑 울어댓쌓는디 내가 어떻게나 놀라부럿는가 첨에는 참말로 귀신들이 아닌가 싶어 대가리 털이 바짝 서두만 가만히 본께 두년놈들이 깨를 홀라당벗고는 메뚜기같이 찰싹 붙어가지고는 일을 벌이는디, 하이고매 숨이 그만 탁 막혀 나는 말도 못하고 소리도 못지르겠고 그런다고 좋은 구경 놔두고 꽁무니 빼기도 그렇고 마른침을 꼴딱 삼켜가면서 눈알이 빠져라 쳐다보는디 글쎄, 풀들이 난데없이 야밤에 짓뭉개져가지고는 푸르딩딩 멍든 자죽처럼 짓뭉개져가지고는 아한 냄새를 피워올리는 바로 고것들이 무슨 죄일까 싶어 나 참별 생각도 다해봤는디 말이여, 그때 말이여 반딧불하나가 눈을 깜빡깜빡하면서 싸가지 없이 나를 빤히 보고있었던 거 아니겄어, 한마디로 챙피해두만 눈을 깜빡깜빡하면서, 내가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지가 다 봤을 거 아녀, 처음부터 끝까지 저도 다 보고있었으면서 말이여, 하이고매,

 

 

 
미꾸라지 / 안도현

 

 

추어탕집 양동이에 미꾸라지들이 우글거린다

진흙뻘 속을 파고들 때처럼 대가리 끝에 꼿꼿이 힘을 주고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우글우글,

 

몸부림 쳐도

파고들어 가도

뚫지 못하는 게 몸인가

양동이에는 미끄러운 곡선들만 뒤엉켜

왁자하게 남는다

 

그 곡선들 위에

주인 여자가 굵은 소금을 한줌 뿌린다

그러자 하얀 배를 뒤집으며,

소금과 거품을 뱉어내며,

수염으로 제 낯짝을 치며,

 

잘도 빠져나가던 생애를 자책하는지

미꾸라지들은

곧바로 몸에서 곡선을 떼어낸다

그리고는 직선으로 뻣뻣하게 一字로  축 늘어져 눕는다

 

 

  사진/행복한 시간님 블러그에서


염소의 저녁 / 안도현 
 
할머니가 말뚝에 매어놓은 염소를 모시러 간다
햇빛이 염소 꼬랑지에 매달려
짧아지는 저녁,
제 뿔로 하루종일 들이받아서
하늘이 붉게 멍든 거라고
염소는 앞다리에 한번 더 힘을 준다
그러자 등 굽은 할머니 아랫배 쪽에 어둠의 주름이 깊어진다
할머니가 잡고 있는 따뜻한 줄이 식기 전에
뿔 없는 할머니를 모시고 어서 집으로 가야겠다고
염소는 생각한다


사진/정님네집 블러그에서

도둑들/-안도현

생각해보면, 딱 한 번이었다 내 열두어 살쯤에 기역자 손전등 들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푸석하고 컴컴해진 초가집 처마 속으로 잽싸게 손을 밀어넣었던 적이 있었다.

그날 밤 내 손 끝에 닿던 물큰하고 뜨끈한 그것, 그게 잠자던 참새의 팔딱이는 심장이었는지, 깃털 속에 접어둔 발가락이었는지, 아니면 깜박이던 곤한 눈꺼풀이거나 잔득잔득한 눈곱 같은 것이었는지,
어쩔 줄 모르고 화들짝 내 손끝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던, 그것 때문이었다

나는 사다리 위에서 슬퍼져서 한 발짝 내려갈 엄 두도 내지 못하고, 그렇다고 허공을 치며 소리내어 엉엉 울지도 못하고, 내 이마 높이에 와 머물던 하늘 한 귀퉁이에서 나 대신 울어주던 별들만 쳐다보았다
정말 별들이 참새같이 까맣게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면서 울던 밤이었다

네 몸 속에 처음 손을 넣어보던 날도 그랬다
나는 오래 흐른 강물이 바다에 닿는 순간 멈칫 하 는 때를 생각했고 해가 달의 눈을 가려 지상의 모든 전깃불이 꺼지 는 월식의 밤을 생각했지만, 세상 밖에서 너무 많은 것을 만진 내 손끝은, 나는 너를 훔치는 도둑은 아닌가 싶었다
네가 뜨거워진 몸을 뒤척이며 별처럼 슬프게 우는 소리를 내던 그 밤이었다
 
 
봄날은 간다 / 안도현

 

늙은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생긴

보리밭가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살구나무에

꽃잎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고 나면 살구나무 가지마다 다닥다닥

누가 꽃잎을 갖다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꽃잎을 자꾸자꾸 이어붙여 어쩌겠다는 것인지

나는 매일 살구나무 가까이 다가 갔으나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나는 흐드득 지는 살구꽃을 손으로 받아들다가

또 입으로 받아먹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어느날 들판 한가운데

살구나무에다 돛을 만들아 달고 떠나려는

한척의 커다란 범선을 보았다

살구꽃 피우던 그가 거기 타고 있을 것 같았다

멀리까지 보리밭이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서 저 배를 밀어주어야 하나

저 배 위에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살구꽃이 땅에 흰 보자기를 다 펼쳐놓을 때까지

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전긍긍 / 안도현

 

소쩍새는 저녁이 되면

제 울음소리를 산 아래 마을까지 내려보내 준다

방문을 닫아 두어도 문틈으로 울음을 얇게, 얇게 저미어서 들이밀어 준다

머리맡에 쌓아두니 간곡한 울음의 시집이 백 권이다

 

고맙기는 한데 나는 그에게 보내줄 게 변변찮다

내 근심 천 근은 너무 무거워 산 속으로 옮길 수 없고

내 가진 시간의 밧줄은 턱없이 짧아서 그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생각건대 그의 몸속에는

고독을 펌프질하는 또 다른 소쩍새 한 마리가 울고 있는 것 같고

그리고 그 소쩍새의 몸 속에 역시 또 한 마리의 다른 소쩍새가 살고 있는

것도 같아서

 

나는 가난한 시 한편을 붙들고 밤새 엎드려

한 줄 썼다가 두 줄 지우고 두 줄 지웠다가 다시 한 줄 쓰고 지우고

전전긍긍할 도리밖에 없다

 

 

사진/그 남자의 집님 블러그에서

 

자작나무를 찾아서

                           
                                          안도현 
 
 
따뜻한 남쪽에서 살아온 나는 잘 모른다
자작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대저 시인이라는 자가 그까짓 것도 모르다니 하면서
친구는 나를 호되게 후려치며 놀리기도 했지만
그래서 숲길을 가다가 어느 짓궂은 친구가 멀쑥한 백양 나무를 가리키며
이게 자작나무야, 해도 나는 금방 속고 말테지만

그 높고 추운 곳에서 떼지어 산다는
자작나무가 끝없이 마음에 사무치는 날은
눈 내리는 닥터 지바고 상영관이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어떤 날은 도서관에서 식물도감을 뒤적여도 보았고
또 어떤 날은 백석과 예쎄닌과 숄로호프를 다시 펼쳐보았지만
자작나무가 책 속에 있으리라 여긴 것부터 잘못이었다

그래서 식솔도 생계도 조직도 헌법도 잊고
자작나무를 찾아서 훌쩍 떠나고 싶다 말했을 때
대기업의 사원 내 친구 하얀 와이셔츠는
나의 사상이 의심 된다고, 저 혼자 뒤돌아 서서
속으로 이제부터 절교다, 하고 선언했을지도 모른다

그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연애시절을 아프게 통과해 본 사람이 삶의 바닥을 조금 알게 되는 것처럼
자작나무에 대한 그리움도 그런 거라고
내가 자작나무를 그리워하는 것은 자작나무가 하얗기 때문이고
자작나무가 하얀 것은 자작나무숲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때 묻지 않은 심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친구여, 따뜻한 남쪽에서 제대로 사는 삶이란
뭐니뭐니해도 자작나무를 찾아가는 일
자작나무숲에 너와 내가 한 그루 자작나무로 서서
더 큰 자작나무숲을 이루는 일이다
그러면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깜짝 놀라겠지
어라, 자작나무들이 꼭 흰 옷 입은 사람 같네, 하면서
 
사진/수풀내음님 블러그에서
 

바다 - 안도현
 


누가 죽었는지 잠든 부두의
머리맡으로 폭설이 내리고, 이 지방 사내들의
한쪽 어깨가 젖고
확인할 수 없는 속눈썹이 젖는다
등 뒤에서 숙명적으로 우는 파도소리
어둠 저쪽에서 도망치듯이
도선장 옆 골목을 빠져들어가
오늘밤도 빈 술병으로 쓰러지는 그대들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때

쓸쓸한, 끝이 없는 그곳은 그대들의
장지(葬地)인가, 버릴 수 없는 어두운 바다에
누가 죽어 자기의 혼을 갖다 버리는가
머리 풀고 바다가 우는 것 같다

군산 앞바다가 서서히 떠오른다
부서진 저 폐선의 이름을 알아 두고 싶다
어업한계선 안으로
은조기떼가 노랗게 몰려들고
사내들은 저마다 배를 타고
아내의 자궁 깊숙이 들어가는 시간,
밤 22시


눈발은 해안의 모든 지붕을 적시고
안강(鮟鱇) 그물로도 건지지 못할 슬픔 속
이 밤은 다시 태어날 그대들의 꽃밭,
부디 잠들지 말라
젖은 꿈속을 서해가 밀려들리라



 

낙동강    - 안도현 

 


저물녘 나는 낙동강에 나가
보았다, 흰 옷자락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 오래 정든 하늘과 물소리도 따라가고 있었다
그 때, 강은
눈앞에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내 이마 위로도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어느 날의 신열처럼 뜨겁게,

 

어둠이 강의 끝 부분을 지우면서
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낡은 목선을 손질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그물 한 장을 주셨다

 

그러나 그물을 빠져 달아난 한 뼘 미끄러운 힘으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치는 은어떼들
나는 놓치고, 내 살아온 만큼 저물어 가는
외로운 세상의 강안에서
문득 피가 따뜻해지는 손을 펼치면
빈 손바닥에 살아 출렁이는 강물
 
아아 나는 아버지가 모랫벌에 찍어 놓은
발자국이었다, 홀로 서서 생각했을 때
내 눈물 웅얼웅얼 모두 모여 흐르는
낙동강,
그 맑은 마지막 물빛으로 남아 타오르고 싶었다

 


그대를 위하여/안도현

그대를 만난 엊그제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내 쓸쓸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개울물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던 까닭은
세상에 지은 죄가 많은 탓입니다.
그렇지만 마음 속 죄는
잊어버릴수록 깊이 스며들고
떠올릴수록 멀어져 간다는 것을
그대를 만나고 나서야
조금씩 알 것 같습니다
그대를 위하여
내가 가진 것 중
숨길 것은 영원히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하여
아픈 가슴을 겪지 못한 사람은
아픈 세상을 어루만질 수 없음을 배웠기에
내 가진 부끄러움도 슬픔도
그대를 위한 일이라면
모두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그대를 만나고부터
그대가 나를 생각하는 그리움의 한 두 배쯤
마음 속에 바람이 불고
가슴이 아팠지만
그대를 위하여
내가 주어야 할 것을 생각하며
나는 내내 행복하였습니다

 

사진/내 사랑 속리산님 블러그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안도현

속을 보여주지 않고 달아오르는 석탄난로
바깥에는 소리없이 내리는 눈

철길 위의 기관차는 어깨를 들썩이며
철없이 철없이도 운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하는 거니?
울어야 네 슬픔으로 꼬인 내장 보여줄 수 있다는 거니?

때로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단 한 번 목숨을 걸 때가 있는 거다

침묵 속에도 뜨거운 혓바닥이 있고
저 내리는 헛것 같은 눈, 아무것도 아닌 저것도 눈송이 하나하나는
제각기 상처 덩어리다, 야물게 움켜쥔 주먹이거나

문득
역 대합실을 와락 껴안아 핥는 석탄난로
기관차 지나간 철길 위에 뛰어내려 치직치직 녹는 눈



 모퉁이 /안도현

모퉁이가 없다면
그리운 게 뭐가 있겠어
비행기 활주로, 고속도로, 그리고 모든 막대기들과
모퉁이 없는 남자들만 있다면
뭐가 그립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계집애들의 고무줄 끊고 숨을 일도 없었겠지
빨간 사과처럼 팔딱이는 심장을 쓸어내릴 일도 없었을 테고
하굣길에 그 계집애네 집을 힐끔거리며 바라볼 일도 없었겠지

인생이 운동장처럼 막막했을 거야

모퉁이가 없다면
자전거 핸들을 어떻게 멋지게 꺽었겠어
너하고 어떻게 담벼락에서 키스할 수 있었겠어
예비군 훈련 가서 어떻게 맘대로 오줌을 내갈겼겠어
먼 훗날, 내가 너를 배반해볼 꿈을 꾸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말이야

골목이 아냐 그리움이 모퉁이를 만든 거야
남자가 아냐 여자들이 모퉁이를 만든 거지



물집

-안도현



호두가 아구똥지게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감자가 덕지덕지
몸에다 흙을 처바르고 있는 것,

다 자기 자신이 물집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다

터뜨리면 형체도 없이 사라질 운명 앞에서
좌우지간 버텨보는 물집들

딱딱한 딱지가 되어 눌어붙을 때까지
生이 상처 덩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그래서, 나도 물집이다
불로 구워 만든 물집이다
나도 아프다

 

물외냉국 / 안도현

 

외가에서는 오이를

물외라 불렀다 물외는

금방 펌프질한 물을 퍼부어주면

좋아서 저희끼리 물 위에 올라앉아

새끼오리처럼 동동거렸다

그때 물외의 팔뚝에

소름이 오슬오슬 돋는 것을

나는 오래 들여다보았다

물외는 펌프 주둥이로 빠져나오는

통통한 물줄기를 잘라서

양동이에 띄워놓은 것 같았다

물줄기의 둥근 도막,

물외를 반으로 뚝 꺾어

젊은 외삼촌이 씹어 먹는 동안

외할머니는 저무는 부엌에서

물외 채를 쳤다

햇살이 싸리울 그림자를

마당에 펼치고 있었고

물외냉국 냄새가

평상 위까지 올라왔다

 

 

 

염소 한 마리 / 안도현

 

 

 식구들이

 모두 달라붙어 키운 염소를
 겨울에 잡았다

 

  내장은 무 넣고 자박하게 볶아서 이웃 아저씨들 불러 아버지 술안주로 내고, 다리 살은 프라이팬에 고추장 양념으로 볶아 먹고 삶아 먹고, 뼈는 머리뼈 등뼈 갈비뼈 다리뼈 할 것 없이 몇 날을 기름이 뜨고 뼛골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도록 고아 후룩후룩 밥 말아 먹고

 

 우리 식구는

 아버지 젖을 빠는 어린 염소들 마냥
 염소고기에 달라붙어 겨울을 보냈다 
  

 시에 (2006년 겨울호)

 


 

 사진/겸백사랑님 블러그에서

 

가을산

 

                                   안 도 현



어느 계집이 제 서답을 빨지도 않고
능선마다 스리슬쩍 펼쳐놓았느냐

용두질 끝난 뒤에도 식지 않은, 벌겋게 달아오른 그것을
햇볕 아래 서서 꺼내 말리는 단풍나무들

 

 

 

논물 드는 5월에 / 안도현

                        
그 어디서 얼마만큼 참았다가 이제서야 저리 콸콸 오는가
마른 목에 칠성사이다 붓듯 오는가

저기 물길 좀 봐라
논으로 물이 들어가네
물의 새끼, 물의 손자들을 올망졸망 거느리고
해방군같이 거침없이
총칼도 깃발도 없이 저 논을 다 점령하네
논은 엎드려 물을 받네

물을 받는, 저 논의 기쁨은 애써 영광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
출렁이며 까불지 않는 것
태연히 엎드려 제 등허리를 쓰다듬어주는 물의 손길을 서늘히 느끼는 것

부안 가는 직행버스 안에서 나도 좋아라
金萬傾 너른 들에 물이 든다고
누구한테 말해주어야 하나, 논이 물을 먹었다고
논물은 하늘한테도 구름한테도 물을 먹여주네
논둑한테도 경운기한테도 물을 먹여주네
방금 경운기 시동을 끄고 내린 그림자한테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누구한테 연락해야 하나
저것 좀 보라고, 나는 몰라라

논물 드는 5월에
내 몸이 저 물위에 뜨니, 나 또한 물방개 아닌가 소금쟁이 아닌가 

 

 

사진/악어의 눈물님 블러그에서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 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살구나무 발전소 / 안 도 현

 

 

살구꽃.....
살구꽃.....

그 많고 환한 꽃이
그냥 피는 게 아닐 거야

너를 만나러 가는 밤에도 가지마다
알전구를 수천, 수만 개 매어다는 걸 봐

생각나지, 하루종일 벌떼들이 윙윙거리던 거,
마을에 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날도
전깃줄은 그렇게 울었지

그래,
살구나무 어디인가에는 틀림없이
살구꽃에다 불을 밝히는 발전소가 있을 거야

낮에도 살구꽃.....
밤에도 살구꽃.....


   

사진/이세상 저세상님 블러그에서

 

먼 산

 

                                                        안도현

 

저물녘

그대가 나를 부르면

나는 부를수록 멀어지는 서쪽 산이 되지요

그대가 나를 감싸는 노을로 오리라 믿으면서요

하고 싶은 말을 가슴에 숨기고

그대의 먼 산이 되지요.

 

 

낡은 자전거 /안도현
 
 
너무 오랫동안 타고 다녀서 핸들이며
몸체며 페달이 온통 녹슨 내자전거
혼자힘으로는 땅에 버티고 설 수가
없어 담벽에 기대어 서 있구나.
얼마나 많은 길을 바퀴에 감고
다녔느냐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을 많이 알수록 삶은 여위어 가는
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자전거야 자전거야 왼쪽과 오른쪽
으로 세상을 나누며 명쾌하게 달리던
시절을 원망만 해서 쓰겠느냐
왼쪽과 오른쪽으로 세상을 나누며
명쾌하게 달리던 시절을 원망만 해서
쓰겠느냐 왼쪽과 오른쪽 균형을
잡았기에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이만큼이라도 왔다.
 
 

 

☆ 프로필

 


 

 

 

 

시인 안도현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이후,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모닥불》《그대에게 가고 싶다》《외롭고 높고 쓸쓸한》《그리운 여우》《바닷가 우체국》《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관계》《사진첩》《짜장면》《증기기관차 미카》를 펴냈다. 그리고 산문집으로 《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사람》이 있다.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