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당한다고 할 때 모든 시험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어디에서 오는 시험이냐에 따라 그 내용과 성질과 대처 방법이 각기 다르다.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손해인 것도 아니다. 힘들고 어려운 부분이 있겠지만 잘 이기면 시험이 없을 때보다 오히려 시험이 있을 때 더 큰 믿음의 진보를 이룰 수 있다. 세상 속에 발을 디디고 살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임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는 기회로 만들 수 있다.
시험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이다. 창22장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 하나님의 시험이었다. 이런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성장시키기 위함이요, 상 주시기 위함이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실하게 인정해주셨고 복을 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을 당할 때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큰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장). 모세가 모세 된 것은 광야 사십 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둘째로 욕심 때문에 받게 되는 시험이다. 성경은 이 부분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장). 조금만 생각해봐도 욕심이 시험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에서 시험에 잘 드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원하는 게 많은 사람들이다. 원하는 게 많은데 채워지지 않으니 자꾸 시험이 드는 것이다. 영적인 것을 원할까? 아니다. 대부분 육적인 것들을 원한다. 그게 욕심이 아니고 무엇인가?
유난히 시험에 잘 드는 사람은 환경이나 성도나 목회자를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점검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데 자아와 자아 속의 욕심이 생생하게 살아있으니 늘 서운하고 억울하고 화나고 짜증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속사람이 변화되지 않으면 시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셋째로 마귀가 가져다주는 시험이다. 하나님의 시험이 우리를 성장하게 하려는 것이요 복을 주시려는 것이라면 마귀의 시험은 우리를 넘어뜨리고 망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때의 시험은 유혹이라는 말로 대치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마귀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막기 위해 예수님마저 시험하였다. 하나님은 이런 종류의 시험을 하지 않으신다(약1:13).
마귀의 시험은 물리쳐야 한다. 예수님도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물리치셨다.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활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와가 마귀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지지 말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는데 하와는 그 내용을 추가했고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는데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로 약화시켰다. 그러니 마귀가 그 틈새를 파고드는 것이다.
시험의 세 종류를 이야기하였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시험이든 하나님은 우리가 이기지 못할 시험을 주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또한 피할 길도 주신다는 것이다(고전10:13). 만약 너무 큰 시험이 내 앞에 있다면 이런 엄청난 시험까지도 내가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해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할 일이다.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시험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