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리'라는 이름은 스포츠카의 대명사가 되어 우리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다.
그것은 단순히 성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피닌파리나가 빚어낸 아름다운 스타일이 보는 이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감동은 고속주행 때 뿜어내는 시끄러운 배기음과 뻑뻑하기로 소문난 게이트식 시프트 레버까지 매력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처럼 페라리가 깊은 감명을 주는 것은 'Ferrari'라는 이름에 어떤 마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스포츠카 중에서 첫손에 꼽히는 것이 페라리다.
페라리라는 이름은 이제 스포츠카의 대명사처럼 우리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그 비결은 완벽한 성능과 함께 피닌파리나가 빚어낸 아름다운 스타일이 감동을 주는 때문이다. 이런 감동은 고속주행 때 뿜어내는 시끄러운 엔진 배기음이나 뻑뻑하기로 소문난 게이트식 시프트 레버까지도 매력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처럼 페라리가 깊은 감명을 주는 것은 그 이름에 어떤 마력이 담겨 있기 때문은 아닐까.
90년대 초 456GT와 F50이 등장했을 때 조금은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그것은 성능이나 디자인이 이전모델에 뒤떨어져서가 아니다. 엔초 페라리(Enzo Ferrari)의 손길을 타지 않은 모델이기 때문이다. 1988년 세상을 뜬 창업자 엔초의 빈 자리는 그만큼 컸다. 페라리라는 이름이 가진 마력은 엔초에게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페라리는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결코 많지 않은 모델을 만들었다. 비교적 싼 가격으로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게 한 디노나 308, 328 등 '리틀 페라리'와 수퍼 아메리카나 500 수퍼 패스트, 456GT 등 GT카 등 두 계열이 있다. 그러나 역시 페라리를 대표하는 차종은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스포츠카 혹은 수퍼카로 불렸던 고성능 모델이다.
50∼60년대 등장해 클래식 페라리 중에서도 최고로 평가받는 250GT 시리즈나 275GTB, 365GTB/4, 512BB, 테스타로사 같은 베를리네타(쿠페) 계열과 별도로 치는 288GTO, F40, F50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중 288GTO와 F40을 제외하고는 모두 V12 엔진을 얹었다. 288GTO와 F40은 레이싱카 엔진을 기본으로 한 V8 트윈 터보다. 288GTO와 F40이 시대를 대표하는 수퍼카임이 분명하지만 V12만이 최고의 페라리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창업 당시부터 레이스 트랙과 도로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것이 바로 12기통 엔진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F355의 후계차인 360 모데나(쿠페와 스파이더), 테스타로사의 후계모델인 550 마라넬로, 456GT 등 세 모델이 생산된다.
페라리의 엔진이 V8이건 V12이건 F1에서의 노하우를 투입한 이 시대 최고성능의 엔진임에는 변함없다. 누구나 갖기를 원하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고,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지만 모두가 즐길 수는 없는 그런 차들이다.
단순히 기계장치가 아닌 예술과 감성이 살아 숨쉬는 페라리는 엔초 페라리에 의해 탄생했고 전세계에 퍼져 있는 수많은 페라리 팬들에 의해 키워져 왔다. 비록 엔초는 세상을 떴지만 페라리를 사랑하고 저켜보는 수많은 사람이 있는 한 페라리의 명성은 변치 않을 것이다.
페라리는 페라리가 재임하던 1947년부터 1988년까지 9번의 포뮤러1 세계선수권, 14번의 Manufacturers' World Title, 8번의 포뮬러1 챔피언쉽, 9번의 르망24시간 레이스, 113번의 포뮬라1 그랑프리 우승등 전 세계 자동차 레이스에서 5000번이 넘겨 우승하였고, 20여개의 세계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페라리는 1969년 피아트그룹에 50%의 지분을 넘겨 주었으며, 1988년에는 90%의 지분이 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라리 자동차회사는 스포츠카에 대한 탁월한 기술력 덕분에 지금도 별도의 회사로 운영되고 있다.
설립년도
1947년
본사 소재지
Modena(모데나)
대표자
Luca Cordero di Montezemolo
종업원수
약 2,000명
총생산대수/승용차
3개 차종 약 3,600대
(생산차종:360 Modena, 456 M GT & GTA, 550 Maranello)
엔초 페라리는 1898년 이탈리아의 북부 모데나의 철공소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그는 아버지와 레이싱 서킷에 간것이 계기가 되어 카레이스에 빠지게 되고, 13살 때부터 운전을 배우며 카레이서의 꿈을 키웠다. 성인이 된 엔초는 당시 오토 스포츠계를 리드하고 있던 피아트사에 입사를 지원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1차 대전 이후 자동차의 판매를 목적으로 열린트리노와 밀라노 사이의 132km를 달리는 경주에서 전쟁 잉여물로 취급되던 란치아 경트럭 드라이버로 첫 발을 디뎠다. 엔초가 모터 스포츠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19년 CMN사에 입사하면서였다. 그는 이 회사 드라이버로 10월에 열린 '파르마 포지오 디 베르세토 힐 클라임'에 출전했다. 최초의 레이스 출전이었다.
이듬해인 1920년에는 당시 이태리 레이스계를 주름잡던 알파로메오로 자리를 옮겨 타르가 플로리오 경기에 출전, 2위에 올랐다. 그는 1932년까지 드라이버로 활약했다.
1923년 세비오 서키트에서 열린 소규모 레이스에서 우승을 차지한 엔초는 엔리코 바라카라는 사람을 만났다. 1차대전 당시 이태리 최고의 파일럿으로 활약하다 1918년 사망한 프란체스코 바라카의 아버지다. 그는 프란시스코의 비행기에 그려진 뛰는 말 모양의 상징을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이것이 지금의 페라리 엠블럼이 되었다.
1929년 12월 알파로메오를 떠난 엔초는 '소시에타 아노니마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설립해 알파로메오의 세미 워크스팀으로 활동했다.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매니저로서의 역량을 최초로 발휘한 곳이고, 페라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존재다.
1932년 알파로메오는 P3로 알려진 티포 B 모노포스토 (Tipo B Monoposto, 싱글 시트)로 많은 레이스에서 연승을 하였으나, 불안한 재정으로 P3는 서킷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페라리는 P3 대신 예전의 2좌석식 차로 레이스에 참가하였다. 2.9리터의 마세라티 모노포스토가 레이스에서 성공을 하자 P3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독일의 메르세데스 벤츠와 아우토우니온의 도전으로 P3의 엔진은 3.1리터로 증가되고 1935년에는 프런트에 듀보네식 서스펜션을 도입하였다. 이것은 독립현가장치의 일종으로 승용차의 앞바퀴 용으로 사용되며, 킹핀을 차체에 고정하고 스티어링 너클에 리딩 암 또는 트레일링암을 부착한 형식이다.
독일이 그랑프리에서 독식을 하자 알파로메오는 소형 클래스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1938년 코롬보가 설계한 티포158 알페타(Alfetta)를 생산하였다. 그리고 독일과의 전면전을 위해서 레이싱팀을 공장에서 직접 관리 하기로 결정하였다.
1939년 스크데리아 페라리팀은 해체되고, 페라리는 알파로메오와의 관계를 끊고 고향 모데나로 돌아왔다. 그리고 알파로메오와의 계약으로 4년 동안 레이싱카에 자신의 이름을 달거나 생산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레이싱만을 생각하고 있던 페라리는 1940년 밀레 밀리아 레이스를 위해 스포츠카를 생산하였다. 8개의 실린더와 1.5리터의 엔진의 베투라 815 (Vettura 815) 피아트의 부품을 조립하여 만들었지만 엔진 결함으로 완주하지는 못하였다.
2차 대전으로 인해 페라리는 모데나에서 마라넬로로 공장을 이주해야 했다. 마라넬로에 약간의 땅을 소유하고 있던 페라리는 새로운 공장을 짓고 조아치노 콜롬보와 함께 V12 1.5ℓ 엔진을 개발했다. 그리고 1947년 5월 피아첸자에서 열린 레이스에 자신이 직접 개발하고 자신의 이름을 쓴 최초의 레이싱카인 티포 125C를 3대 만들어 출전시켰다.
페라리의 첫 레이싱카인 티포 125C는 12기통 1500cc로 크랭크케이스와 실린더가 알루미늄 알로이로 만들어졌고 압축비는 6.5 : 1, 최고 출력은 225마력이였다. 서스펜션에는 위시본과 트랜버스 리프 스프링, 스윙 액슬, 토션바 등이 사용되어 레이스를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샤시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튜블러 프레임으로 앞이 편평한 주걱같은 모양으로 엔진을 앞에 장착하여 운전석을 프레임 옆의 낮은 위치에 설치할 수 있으며, 강도가 높은 장점을 가졌다.
최초의 도로용 모델은 125C의 엔진을 1995cc로 키운 티포 166로 1948년에 등장했다. 그 뒤를 따라 195 인터(1951)와 212도 제작했다.
티포 166은 다소 짜임새 없는 모습이었지만 2좌석, 적당한 차체, 사이클 타입의 스포일러와 헤드램프를 갖고 있었다. 스포일러와 헤드램프는 조정이 가능한 것으로 포뮬러 레이스와 스포츠카 경주에도 달릴 수 있는 머신이었다. 티포166은 빠르고 믿음직했으며, 용량이 더 큰 상위클래스와 대결해도 손색이 없었다. 티포 166이 장거리 레이스를 포함해서 각종 레이스에서 많은 명성을 쌓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1950년 파리 오토살롱에서 340 America가 데뷔를 하였다. 람프레디가 설계한 4101cc의 엔진으로 220마력을 출력하였다. 340 America는 밀레 밀리아를 포함해서 유럽의 많은 레이스에서 성공을 하였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340 America는 미국 시장을 위해 내놓은 것 이었다. 1951년 데뷔한 342 America는 소량이 생산되었고, 그 모습은 250 Europa와 375 America로 이어졌다. 250 Europa는 1953년 파리 오토 살롱에서 데뷔를 하였고, 250시리즈의 선두로 페라리가 GT카들을 생산하는 견인차 소임을 한 모델이다.
당시 페라리 모델은 완성도가 떨어졌지만 기본적으로 레이싱카를 개조한 것이기 때문에 고성능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차 만들기는 레이스 활동자금을 버는 것이 목적이었다. 페라리는 F1 시작부터 지금까지 출전하고 있는 유일한 팀일 정도로 예나 지금이나 레이스에 힘을 쏟고 있다. 페라리는 1951년 영국 그랑프리에서 첫 우승을 거두었다. 알파로메오를 누른 엔초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눈물을 흘린 일화는 유명하다.
레이스에서의 활약과 함께 페라리의 높은 성능을 바탕으로 점차 명성을 얻어 세계 최고의 스포츠카 메이커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기능성에 치중하던 디자인도 카로체리아 피닌파리나와의 만남으로 예술의 경지에 접어들었다. 피닌파리나가 디자인한 최초의 페라리는 1952년형 212였다.
페라리는 가까운 미래에 모터 레이싱에서 2리터의 작은 포뮬러 2 머신이 주역이 될 것이라고 예상을 하였다. 4기통의 머신들이 레이스에서 각광을 받자 12기통의 페라리 머신들도 4기통으로의 변모를 모색하였다.
그랑프리에서 스포츠카로 엔진을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을 해온 페라리는 1952~3년 F2 부품을 사용한 500 Mondial을 발표하였다. 샤시나 서스펜션 등 많은 것들을 GP 머신으로부터 적용하였고, 파워 상승을 위해 553 F2의 실린더 헤드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탄탄한 재정의 메르세데스 벤츠와 마세라티가 도전장을 내밀자 페라리의 설계진과 기술진들은 새로운 엔진과 샤시를 연구하였고, 부족한 파워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1954년 이후 페라리 레이싱팀 스쿠데리아는 레이스에서 쇠퇴기를 맞았다.
1954년 시즌이 시작되면서 드라이버인 알베르토와 루이지가 란치아팀으로 이적하고, 페라리의 머신들이 파워면에서 부족했기 때문이다.
1956년 3월 제네바 모터쇼에서 250 GT가 첫 모습을 드러냈다. 250 GT는 두 개의 버젼으로 생산이 되었는데 하나는 피닌파리나가 다른 하나는 보아노가 디자인하였다. 에어로다이내믹한 보디 라인과 스포일러는 페라리 추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충분하였다. 1960년까지 500대 정도가 생산되었고, 그 중 보아노가 디자인한 낮은 지붕의 카브리올레는 80대 정도 생산되었다. 이때부터 페라리 생산차의 표준화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모든 250 GT는 V12형 2953cc 싱글 오버헤드 캠샤프트의 엔진으로 보어X스트로크는 73X58.8mm이다. 초기 모델은 240마력이었고, 3개의 웨버 트윈-초크 카뷰레터를 갖고 있었다. 프런트 엔진의 250 GT와 별개로 페라리는 미드, 리어 엔진의 차를 구상하였다.
당시 란치아팀은 GP레이스에서 V8 2500cc의 머신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머신은 1955년 페라리팀으로 이양이 되었다. 란치아-페라리 D50이라고 명칭을 정하고1956년 시즌을 위해 많은 손질을 가했다. D50은 핸들링 향상을 위해 커다란 연료 탱크를 테일에 얹고, 서스펜션에 앤티롤 바, 리프 스프링을 사용하였다. 텔레스코프 쇼크 업소버는 베인 타입 호우다일레스 (vane type Houdailles)로 대체되고 강성을 위해 프레임 튜브를 샤시에 첨가했다. 1956년 시즌 D50은 7번의 챔피언쉽 라운드에서 5번을 우승하여 스쿠테리아 페라리팀은 풍성한 한해를 보냈다. D50에 이어 페라리는 프런트 엔진의 디노(Dino)를 내놓았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것을 적용한 페라리의 각별한 머신으로 D50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1959년까지 페라리는 패밀리카에 대한 생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60년에 250 GT 2+2좌석의 차를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250 GTE라고도 불리는 이 모델은 1960년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데뷔를 하였다. 사실 뒤쪽의 좌석은 어른이 앉기에는 좁은 공간이다. 어린 아이들이 탈수 있거나 휴일 짐을 싣기에 알맞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2+2좌석이라는 의미는 2개의 주좌석과 2개의 보조좌석이라는 의미로 뒤쪽의 좌석은 어른이 앉기는 힘들다. 우리나라의 티뷰론같은 모델이 바로 2+2구조이다.) 250 GT 2+2에 의해 페라리는 레이싱 스포츠카의 성격이 강했던 그때까지의 모델과는 다른 일반차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250 GT2+2 의 소개로 페라리의 카탈로그에서 전형적인 쿠페는 사라지게 되었지만 새로운 Berlineta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짧은 휠베이스와 강철 보디. 더 호화로운 실내로 편안함을 느길 수 있고, 스타일링은 SWB Berlineta와 GTO의 것을 혼합한 것으로 차체는 피닌파리나가 디자인하였다. 이 차는 250 GT Lusso, 짧게 250 GTL로 블렀다. 지붕이 있는 GT카들과 병행해서 페라리는 250 GT Spyder california를 1958년 생산하였다. 초기의 모델은 휠베이스가 짧았으나 나중에 2600mm로 휠베이스가 늘어났다.
1961년 긴 휠베이스의 california를 소개했는데, 이 모델은 2+2로 1956년 브뤼셀에서 데뷔를 했던 4.9리터의 1인승 410 Super america의 샤시를 응용한 모델이다. 작은 타원형의 그릴과 헤드램프를 접어 넣을 수 있게 고안되었다.
1963년에는 초기의 GT카들과는 다른 330 GT 2+2 버전을 생산하였다. 콜롬보 계열인 250 GT의 레이아웃과 비슷한 샤시의 이 모델은 V12 4리터의 엔진으로 300마력을 냈다. 프런트에는 코일 스프링과 튜블러 쇼크 업소버를 채용했고, 반타원형 스프링과 텔레스코픽 쇼크 업소버의 솔리드 리어 액슬이 사용되었으며 디스크 브레이크가 장착되었다.
1964년 페라리는 410 Super america의 대체 차종인 500 Super fast를 1964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데뷔시켰다. V12형 4.9리터 엔진으로 웨버 38 DCN 카뷰레터를 사용했고, 압축비는 8.8 : 1로 출력은 400마력으로 상승하였다. 동급의 다른 차종에 비해 호화로운 리무진이라고 할 수 있고, 한 달에 1대만을 생산하였다.
1964년 동일한 샤시의 275 GTB와 275 GT Spider를 생산하였다. 서스펜션은 모두 독립적이었고, V12형 3.3리터의 배기량에 보어X스트로크는 77X58.8mm이다. Berlineta는 280마력이고, Spider는 260마력의 출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 모델 모두 싱크로메시 5단 기어박스를 뒤쪽에 장착하였다. 스타일은 1964년 GTO와 250 LM의 긴 보닛 라인을 적용하였고 헤드램프는 플라스틱 커버의 날개 속에서 조화가 됨을 보였다. 광각의 윈드스크린과 작은 리어 스포일러는 에어로다이내믹 스타일에 한몫을 했다. 옵션으로 6 트윈-초크 웨버 카뷰레터가 장착되었고, 압축비는 9.5 : 1, 300마력으로 출력이 증가되었다. 다음해 많은 개량을 가져와 1966년에는 3.3리터 엔진의 더블-오버헤드 캠샤프트 버전이 나왔다. 동시에 엔진과 트랜스액슬 사이의 잘못된 조정으로 야기되었던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샤시를 다시 조정하였다. 페라리는 럭셔리카를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을 고수하며1965년 330 GTC를 선보였다. 330 GTC는 다른 모델들과 비교해서 세련미가 돋보였으며, 강한 파워와 넓은 실내를 보유했다. 앞쪽은 500 Super fast를 닮았고, 리어 데크는 330GT의 모양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1968년 미국에서 안전과 배기가스에 대한 규정이 제정되었다. 고성능 자동차를 만드는 업체들에게 하나의 장벽으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이러한 규정이 없었던 유럽 업체들에게는 심각하였다. 페라리의 마라넬로 공장에서는 4.4리터의 5단 기어의 365 GT 2+2를 위한 생산라인을 가동시켰다. 파워 스티어링과 에어컨디셔너는 기본으로 장착되었고, 리어 서스펜션은 독립적이었다. 365 GT 2+2 는 미국시장에서 오토매틱 트랜스미션으로 판매되었다.
한편 365 GTB/4는 1967년 페라리의 카탈로그에는 그 모습이 없었는데 365 GTB/4는 겨울 동안 테스트를 거치면서 발전을 하였다. '데이토나'라고 알려진 365 GTB/4는 자동차 역사상 전설적인 모델로 V12형 4.4리터 엔진으로 352마력의 출력을 자랑하였다. Six 40 DCN 20 웨버 카뷰레터에 압축비는 9.3 : 1 이었다. 스타일은 아주 화려했으며 피닌파리나 디자인의 작품다운 걸작 모델이다. 낮은 보닛 라인은 도어 패널과 필러와 조화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라인을 만들어 주고 있고, 오리지널 드로잉에서 변화된것이 없었다.
1969년 가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데이토나의 스파이더 버전이 데뷔를 하였다. 데이토나는 경주용으로 생산이 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오너들은 레이싱을 위해 공장에서 재작업을 하였다. 르망 레이스와 많은 경주에서 데이토나는 성공을 하였고 GT카로서 가장 빠르고 우수한 차로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다.
1969년 2월 330 GTC와 GTS가 다시 부활하였는데, 4390cc 싱글 오버헤드 캠샤프트의 엔진을 탑재한 365 GTC와 GTS로 불렀다. 그러나 1970년까지만 생산이 되었고, 다음해 제네바 모터쇼에서 365 GTC/4가 그 뒤를 이었다. 365 GTC/4는 4 오버헤드 캠샤프트 엔진에 6 웨버 38 DCOE 사이드 드래프트 카브레터가 새롭게 설치되었다. 보닛 라인은 낮았지만 프런트가 공격적인 모양을 하고 있으며, 4개의 헤드램프는 팝업 스타일로 되어 있다. 윈드스크린에서 테일까지 이르는 라인은 여전히 물결 흐르듯 이어지며, 리어 쪽에서는 날카롭게 끊어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1960년대 중반부터 페라리는 재정적인 문제로 위축되기 시작했는데 F1머신에 대한 비용의 상승과 미국 시장에서 요구되는 안전과 배기가스에 대한 규정 때문이었고 오일 쇼크의 여파로 인해 페라리는 작은 용량의 자동차를 생산하기도 했다. 1965년 파리 오토살롱에서 피닌파리나가 디자인한 로드 버전인 Dino 206S을 내놓았으며 Dino 206 GT가 정식 명칭로 정해졌다.
디노는 엔초의 외아들로 촉망받던 엔지니어였지만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병상에서도 그는 아버지와 신형 V6 엔진에 대해 끊없이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V12를 고집하던 페라리는 새로운 V6 엔진을 장착한 신차를 선보인 것이다.
206 GT는 이후로 246GT, 308GT/4로 발전을 하였다. Dino 246 GT가 1969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그 뒤를 이었으며, 언론과 대중들에게 빠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Dino 246 GT는 트윈 오버헤드 캠샤프트 2418cc의 엔진에 보어X스트로크는 92.5 X 60mm이었다. 미드쉽 방식으로 195마력이었다. 차체는 미끈하였으며 부드럽고 예전의 Dino 206 GT의 라인을 갖고 있었다.
1972년에는 스파이더 버전이 생산이 되고 포르쉐 911S와 경쟁을 하며 젊은 층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Dino 246의 대체 차종으로 페라리는 1973년 파리 오토살롱에서 Dino 308 GT/4 2+2를 선보였다. 차체는 베르토네가 디자인한 것으로 샤시와 서스펜션은 246의 것을 적용하였고 단지 바뀐 것이 있다면 트레드를 늘리기 위해 보디가 넓어진 것이다. 앞, 뒤 서스펜션은 위시본과 코일 스프링, 텔레스코픽 댐퍼와 안티롤 바로 구성되어 있다. 2917cc V6엔진은 센터 라인 뒤쪽에 가로로 세팅되었고, 낮은 윤곽을 유지하기 위해 5단 싱크로메시 기어박스는 엔진의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 308 GT는 계속 발전이 되어 최고급 차종으로 인식이 되었으며, 최고 속도는 246km까지 나왔다. 1976년에는 308 GTB로 이미지를 변화시켰다.
페라리는 친숙한 V12 프런트 엔진의 차를 다시 한번 부활시켰다. 400 G7으로 불리는 차로 오토매틱과 매뉴얼 트랜스미션 둘 다 생산하였다. 4좌석의 럭셔리카로 파워 스티어링, 에어컨디셔너가 기본으로 장착이 되었으며, 차체는 물론 피닌파리나가 디자인하였다. 보어 X 스트로크는 81 X 78mm이고 340마력이었다. 서스펜션 또한 앞, 뒤 모두 독립적이었다.
1976년 파리 오토살롱에 400 GT를 데뷔시킨 후, 베를리네타 복서의 두번째 버전인 512 BB를 내놓았다. 512BB는 3년 동안 만 생산하고 자취를 감추었는데 12기통 리어 엔진, 독립적인 서스펜션, 5단 기어박스, 스타일링은 308 GTB와 아주 흡사하다.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야성적인면과 강력함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308GT/4의 대체 차종으로 나온 Mondial 8은 2+2의 좌석으로 예전보다 실내는 더 넓어져 승객 4사람 모두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점화장치와 보쉬 K 제트로닉 인젝션이 도입된 후 1983년에는 차체는 더 길어지고 넓어졌다.
1984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페라리는 1960년대 최고의 모델을 재현시켰다. 바로 GTO인 것이다. 뒤쪽에 세로로 2885cc V8 엔진이 장착되었으며, 400마력까지로 출력이 향상되었다. 서스펜션은 모두 독립적으로 코일 스프링과 위시본이 사용되었다. 커다란 에어 댐과 스포일러는 제쳐두고 308의 모습을 닮은 페라리 최고급 차종으로 피닌파리나는 FRP로 차체를 만들었다. 최고 속도는 305km까지 낼 수 있었으며 연간 200대 이상을 만들었으나, 결국 1985년 GTO는 생산이 중단되었다.
1980년의 Mondial 8과 1975-7년까지의 308 GTB/GTS(모두 미드쉽엔진)에서 발전을 한 1984년 V8 모델들은 하나의 실린더 당 4개의 밸브를 갖고 있었다. 파워를 높이기 위한 손길도 가미되어 성능 또한 향상이 되었다.
1984년 400에 대한 결점 보완 작업이 이루어져 다음해 4823cc, 340마력의 412가 나왔다. 페라리 최고의 작품이었던 512 BBi는 1985년 Testarossa로 대체되었으며, Testarossa는 페라리의 전설을 이어받았다. 피닌파리나의 노력으로 발전된 두드러진 보디 스타일과 289km의 속도에서도 안정됨을 보여준다. 1986년에는 배기량이 2927cc에서 3185cc로 증가되었다. 한편 미드엔진의 308과 Mondial은 각각 328과 Mondial 3.2로 되었으며, 두 모델은 오픈 보디의 형태로도 생산이 되었다.
1987년에는 창사 40주년 기념으로 F40이 등장하였고, 1992년 Testarossa의 후계차로 512 TR이 LA 모터쇼에서 발표되고 1994년 F512M으로 이어졌다. F40은 포르쉐 959를 견제하기 위해 나온 모델이다. 양산차로서는 최초로 320km속도를 내는 포르쉐 959에 페라리는 상처를 받았다. 페라리는 창사 40주년을 맞아 F40을 발표하여 포르쉐에게 받은 상처를 치료하고자 한 것이다. 전통적인 뒷바퀴굴림이지만 경량화를 실현시켜 최고 속도가 342km/h까지 나왔다. F512 M은 312T F1 머신에서 가져온 180' V12 엔진, 강력한 제동력의 브레이크 시스템, 튜블러 프레임의 샤시, 알루미늄 보디, 고장력 강판의 실내공간 등을 갖추었다. 크롬-몰리브덴 합금을 소재로 만든 튜브 프레임은 매우 가벼우면서도 비틀림과 구부림에는 아주 강한 특성을 보인다. 서스펜션은 네 바퀴 독립현가의 더블 위시본 타입이다. 가스식 쇼크 업소버와 안티롤 바가 추가되었으며, 리어 서스펜션에는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쇼크 업소버가 장착되어 있다. 정속 주행을 할 수 있는 크루즈 컨트롤 시스템을 장착한 스티어링 휠은 랙&피니언 방식이며, 브레이크 시스템은 네바퀴 벤틸레이티드 디스크, 4피스톤 캘리퍼, 보쉬 ABS 시스템을 갖추었다.
창사 5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F50은 멕라렌 F1을 목표로 한 것이다. F1에서 라이벌 팀인 멕라렌이 만들어낸 수퍼카 F1이 최고 속도 370km/h라는 성능을 가졌기 때문이다. 피닌파리나가 디자인을 맡았으며, 전체적으로 곡선이 많고 뒤쪽의 커다란 리어 윙이 인상적인 모델이다. 멕라렌 F1과 비교하면 출력면에서는 뒤진다. 그러나 강하고 빠르게 몰수 있는 비교적 쉬운 머신이 되어야 한다는 페라리의 목표를 달성해준 차다. 조종안정성 또한 뛰어나 어떠한 코너에서도 균형을 잡아 어떤 모양으로 돌아갔는지를 깨닫지 못하게끔 한다. 실내를 깔끔하게 처리를 하였고, 1950년대의 고전적인 스타일을 연상시킨다.
페라리의 최신의 모델인 F550 마라넬로는 1996년 7월 독일의 뉘르브르크링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엔진을 프런트로 옮긴 F550 마라넬로는 항상 그렇듯이 피닌파리나가 디자인한 것으로 F1에서 습득한 기술을 접목시켰다. 최근 페라리는 F355의 후계 차종으로 F134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 차는 2000년 경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며 F355보다 작고, 단순한 모습이 될 것이다. F355와 같은 프랫폼을 사용하지만 현재의 튜블러 프레임이 아닌 알루미늄 모노코크 스페이스 프레임을 적용하며 개량된 충돌 방어 시스템과 가벼워진 차체를 지니게 될것이다. 이 차에는 V6 2.6리터, 30밸브 엔진과 V6 2.8리터, 24밸브 엔진이 장착될 예정이다. 트랜스미션은 핸들에서도 작동이 가능한 6단 기어를 사용할 예정이다. F134는 쿠페와 스파이더 모델의 F355와는 달리 타르가 모델만이 생산될 것 이라고 한다.
[회사명 변천]
1929년 : Scuderia Ferrari
1939년 9월 : Auto Avio Costruzioni Ferrari
1957년 10월 16일 : Auto Costruzioni Ferrari
1960년 5월 23일 : SEFAC S.p.A
1965년 11월 13일 : Ferrari S.p.A Esercizio Fabbriche Automobili e Corse
1989년 6월 23일 : Ferrari S.p.A
첫댓글 아 페라리에 대한 상상이 연결되네요 잘봤습니다...
히스토리 체널에서인가 페라리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는 것을 봤는데..^^ 멋지더군요. 엔쵸페라리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였습니다. ^^
시간내어 쭉 읽어봤습니다..^^ 잘봤습니당~!~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쥑이네..ㅎㅎㅎ 역시 페라리의 역사는 어렵다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