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만추
엊그제 수능을 하루 앞두고 포항에서 5.5도 지진이 발생 나라 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날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선 아침나절 교직원과 학생들은 분주하게 보냈다. 다음날이 수능일이라 예년과 마찬가지로 다른 학교 수험생들이 학교를 바꾸어 우리 학교로 시험을 보러오게 된다. 시험실로 지정받은 교실은 정한 규정 따라 고사장을 설치한 후 교정에선 선후배들이 장도식을 거행하였다.
고3들은 담임에게 건네받은 수험표를 들고 내일 치를 고사장을 확인하러 교문을 나섰다. 1․2학년도 단축 일과로 하교했다. 동료들은 대부분 감독교사가 되어 타교로 가는 분들은 출장조치 되고 본교에 감독인 교사들은 오후 세 시 감독관 교육이 예정 되었다. 우리 학교로 배정된 다른 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시험실 감독관이 아니라 감독관 교육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학교를 빠져나가면서 김해지역으로 출퇴근하는 예전 근무지 동료에게 연락을 보냈다. 그 동료는 수학을 가르치는데 나와 동갑이고 이웃에 살아 가끔 얼굴을 보는 사이다. 시내에 근무하다 김해로 옮겨간 지 올해로 세 해째다. 내년 봄이면 근무지를 시내로 옮겨왔으면 하는 친구다. 그간 안부가 궁금해 연락했더니 나중 저녁 다섯 시 반송시장 어느 주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가 어중간해서 반송시장 시골밥상 식당을 찾아 혼자 점심을 해결했다. 지난 일요일 내가 외감마을 앞에서 걷은 돌미나리로 전을 부쳐 먹으려고 찾았을 때 문이 닫혀 있던 그 가게다. 주인은 예식장 걸음으로 가게 문을 닫았다고 했다. 낮은 테이블이 서너 개 놓인 식당에는 내 말고는 점심을 드는 손님이 없었다. 노점상에게 배달을 가는 상차림은 있었다.
북어로 끓여낸 국으로 공기에 담긴 밥을 비우면서 반주로 생탁을 한 병 비웠다. 나는 근무에 부담이 없다면 그 정도는 거뜬히 들 수 있다. 한 병으로 모자라 한 병 더 시켜 비우면서 밥은 남겼다. 이어 늦은 점심을 들려는 아낙들이 몇 들이닥쳐 나는 두 번째 비우던 생탁은 바닥을 다 보지 못하고 일어섰다. 동료들은 수능 감독관 교육으로 학교에 발이 묶여 있을 텐데 나는 자유로웠다.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까지는 아직 서너 시간 남았더랬다. 내가 학교로 되돌아가 할 일은 없었다. 시장 골목을 빠져나가니 스산한 바람이 일었다. 마침 반송성당 주변 은행나무 가로수에서는 샛노란 은행잎들이 흩날렸다. 내 앞을 지나던 여인네들은 ‘어머! 저기 은행잎 좀 봐!’라며 탄성을 질렀다. 도심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한낮의 늦가을 서경에 환호하는 중년 여성들이었다.
나는 반송시장에서 210번 버스를 타고 창원중앙역으로 갔다. 역에서 굴다리를 지나나 길상사로 갔다. 저수지를 돌아 산기슭 작은 절간은 조용했다. 나는 뜰에서 두 손을 모으고 법당으로 들지 않고 되돌아 나왔다. 역으로 나가질 않고 25호 우회국도 정병산터널 방향으로 걸어 올랐다. 인도가 있긴 해도 평소 사람들이 잘 다니질 않고 터널을 통과하는 자동차들만 줄지어 오르내렸다.
창원대학 북문과 연결된 회전교차로가 있고 그 주변 대리석으로 기둥을 세운 정자가 보였다. 나는 정자에 올라 창원대학과 도청 일대를 굽어보았다. 뒤로는 정병산 독수리바위와 황엽으로 물든 단풍이 아름다웠다. 폰 카메라로 사진을 한 장 찍고는 정자를 내려서는 순간이었다. 그때 내가 발을 헛디딘 것도 아닌데 ‘쿵!’하는 지축의 흔들림에 이어 곧바로 지진발생 재난 문자가 날아왔다.
국가 대사를 코앞에 두고 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지 싶었다. 천재지변이야 인력으로 막을 수 없는 일이다. 창원대학 캠퍼스로 내려가니 뒹구는 낙엽들로 만추의 서정이 완연했다. 생활관 앞 연못을 지나 창원의집으로 갔더니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창원의집을 나와 생태하천으로 복원된 창원천변을 걸었다. 근처 주택가 학교로 오 년 간 걸어 다닌 수변 산책길이었다. 17.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