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10/09/02/201009020500013/201009020500013_1.html
(위 김신조루트 관련 신동아 기사)
2003.12.24일 영화 실미도가 개봉되면서
세간에 잊혀졌던1968년1.21사태(김신조, 31명 무장공비 침투사건)가 주목받습니다
김신조가 박정희 살해위해 내려왔다면 실미도는 김일성 암살위한 북파공작원 이야기..
영화 이듬해인가 월간 신동아에서 다큐멘터리형식의 김신조루트가 새롭게 기사로 조명되고
실미도로 인해 김신조씨 자제는 이혼했다고 하죠
영화 실미도보다 더 재밌게 읽었던 그때 기사를 토대로 지도에 능선길을
그려보기 시작합니다.
“31명이 30kg 완전무장으로 눈쌓인 산길을 시속 10Km이상으로 뛰었다니..”
일산서 가까운 탓에 몇 번에 걸쳐 김신조루트를 따라 싱글트랙 찾는답시고
2006년, 겨울산 헤집고 다녔던 기억입니다.
그리고 2010년 북악산 일대가 ‘김신조루트’란 이름의 산책로로 개방되고, 그 얼마전엔
역시 ‘김신조 침투사건’으로 차단됐던 우이령고개가 민간에 개방됩니다.
(헌데, 김신조는 우이령을 넘지 않고 북한산 진관사를 통해 비봉을 넘었고,
북악산의 김신조루트는 침투로가 아닌 세검정 총격후 생존자들의 퇴로임
우이령은 1.21이후 폐쇄후 41년만인 2009년 하반기 개방됨)
지금으로부터 43년전,
1월18일 북풍한설의 임진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보겠습니다
kims R.gpx
kims R.gtm
지도 클릭하면 원본으로
임진강 고량포에서 세검정 자하문까지 대략 62km
주요 지명만으로 그린 루트라서 실제 침투로와 다를 수 있습니다
30kg 중무장으로 시속 10km를 실제로 뛰었는지 확인해보니
12시간동안 '초리골~진관사'구간 시속9.6~10km(루트가 정확지 않아 약간 편차)
---------------------------------------------------------신동아 기사 발췌-----------------------------------------------------------
1968년 1월21일 밤 9시30분. 31명의 군인이 이열종대로 보무당당하게
청와대 코앞의 세검정길로 들어섰다. ‘훈련 후 귀대 중인 국군 방첩대’로 자처한 이들의 실체는
“박정희의 목을 떼러 온” 북한 특수부대 124군 부대원들.
이들이 촉발한 1·21사건은 피아 간 5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토벌전으로 이어지고,
불과 이틀 후엔 동해에서 미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 나포되면서 한반도는
휴전 15년 만에 다시 전면전의 위기로 치달았다.
북한의 전매특허인 ‘벼랑 끝 전술’은 이 무렵 첫선을 보이는데….
‘청와대 기습 후 당일 귀환’
1월19일 오전 5시경에 1차 집결지인 법원리에 도달한 124군 부대 소속 무장 공작원 31명은
그곳에서 하루를 쉬며 소진된 기력을 회복했다. 민족보위성 정찰국장 김정태가 서울 기습을 목표로
창설한 124군부대의 당초 목표는 청와대를 비롯해 미국대사관과 육군본부, 사상범들이 수감된
서울교도소와 서빙고 간첩수용소 등 6곳을 동시에 습격하는 것. 그렇지만 무리라는 판단에 따라
목표를 청와대 한 곳으로 한정했다. 그러면서 남파 인원도 76명에서 31명으로 축소됐다.(중략)
법원리 초리골을 출발하려는 그들 앞에 나무꾼 행색의 민간인 4명이 불쑥 나타난 것.
124군 부대원들은 26사단 마크가 붙은 국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나무꾼들은 검정색 운동화와
AK47 소총을 든 그들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봤다.
대장은 할 수 없이 투표에 부치기로 했다. 살려주자는 쪽으로 결과가 나왔다
그것은 임무 실패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말았다.(중략)
“박정희의 목을 떼러 왔다”
세검정 자하문 근처, 81mm 박격포가 토해내는 조명탄으로 주위가 대낮처럼 환했다.
김신조 소위는 정신없이 내달렸다. 이미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탈주계획엔 차량을 탈취해 문산 방면으로 도주하는 것이 불가능하면
일단 비봉 쪽으로 몸을 피하기로 돼 있었다.
김신조 소위는 자폭을 결심하고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다가오던 수색병들이 놀라서 엎드렸다.
1초, 2초, 3초…. 그런데 수류탄이 터지지 않았다. 불발탄이었다.(중략)
세검정 총격전 이후 살아남은 3명의 월북기도…
앵무봉이 시야에 들어왔다. 박재경은 뒤를 따르는 2명의 조원에게 잠시 쉬어갈 뜻을 비쳤다.
세검정에서 교전을 치른 박재경은 비봉 쪽으로 펼쳐진 포위망을 뚫고 이곳 (남)노고산에 다다른 것.
여기에 숨어 있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앵무봉으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야영을 하고
고랑포 쪽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을 생각이다. 벌써 세 밤이 지났으니 오늘은 1월24일일 것이다.
남파 때에 비해 형편없이 느린 행군이지만 경계망을 뚫고 북상해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부대원들은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여러 명이 사살됐을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총격전이 벌어지는 소리를 수차례 들은 터였다.
박재경은 끝내 포위망을 뚫고 북으로 귀환했다.(3명중 2명이 월북한 것으로 보이고
1명은 양주군에서 변사체로 발견됨)
그리고 32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서울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0년 9월11일,
김용순 당 중앙 비서를 수행해서 서울에 온 북한군 총정치국 부총국장 박재경 대장이 바로 그 사람.
그의 손에는 총 대신 송이버섯이 들려 있었다.
2000년 9월11일 서울 신라호텔 에메랄드룸에서 열린 북측 송이버섯 전달식에서
박재경(오른쪽)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이 김종환 국방부 보좌관과 인사를 나누고있다
- 68년1.21때 노고산 총격전에서 우리측 수색대 대령을 살해하고 월북했던 박재경..
이자리에 김신조씨가 같이 있었다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기엔.. -
우리 국감자료에 따르면1951년부터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때까지
남쪽에서 북파된 공작원은 1만여 명, 이 가운데 사망 또는 실종자는 무려7,726명이다.
- 남에서도 엄청 올려보냈군요-
-우리 남한의 북파공작에 관한 기사-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5/05/10/200505100500014/200505100500014_1.html
첫댓글 기사 내용 관심 깊게 잘 보았습니다. 저는 비박 장비 매고 급한 일로 4시간 15분 동안 산길을 달리다시피 한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휴대용 GPS에 기록된 자료를 보니 4km/h가 조금 넘는 속도였습니다. 그런데 시속 10km/h면...
링크된 글을 읽다보니 재밌네요^^
잘 보고 갑니다.
시속 10km 산길을 달린 것만큼 놀라운 것은 야간에만 눈쌓인 길없는 능선길에서 오차없이 내달린것이..
GPS 없이 감각적인 독도로.. 물론 상세지도가 있었겠지만
1970년도 이전, 우리 남한에서도 북파공작원에게는 1:1만5천 DMZ북쪽 항공지도가 쥐어집니다
북한 GP를 박살내어 수십명 몰살 시키고 다시 남하하는 사례도 종종있었다죠. 마찬가지 야간 독도로만 북한 잠입해서
60년간 서로 주고받았으니 이제 그만할때도 됐는데.. 빈염불로만
특수훈련이라는 것이 인간을 기계로 만드는가 봅니다. 야간독도도 그렇고, 속도도 매우 놀랍습니다.
자신들을 발견한 나무꾼들을 투표에 부쳐서 살려주었다는 대목이 믿기지 않네요.
인간적이라고할까?
군인으로써 목숨을 걸고 임무수행을 위해 사선을 넘어왔는데, 그순간에 다른 생명을 위한 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