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의 기도 구절 풀이
주님의 기도를 습관적으로 바치고 잡념에 빠지는 것은 무심하고 산만한 태도 때문이지만, 주님의 기도의 깊은 의미를 알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정성을 담아 기도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각 구절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사용할 주님의 기도는 ‘가톨릭 기도서’에 나오는 것으로, 우리가 평소에 바치는 기도문입니다.
• 주님의 기도 전반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옷을 입을 때 첫 단추를 잘 끼우는 것이 중요하듯이,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에도 그 시작이 중요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른 다음, 서둘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로 가지 말고, 잠시 동안이라도 그 구절에 머무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또는 ‘우리 아버지’를 반복하면서 내 안에 올라오는 느낌과 사랑을 살핍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만들고 돌보아 주시는 전지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 경이로움에 머물러 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어떤 사람은 ‘하늘’을 우리 눈에 보이는 푸른 하늘로 여겨 아버지 하느님께서 저 공중 어딘가에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 우주인 유리 가가린Yurii Gagarin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는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 다음,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지들이여, 내가 저 창공을 날아다니면서 하느님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한 러시아 정교회 사제가 이렇게 응대했습니다. “이 땅에서 하느님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에서 그분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모든 곳에 계시고 지금 나와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하늘에 계신’은 그리스어로는 ‘우라노이’, 곧 ‘하늘들에 계신’으로 복수입니다. 만일 단수 ‘하늘(우라노스)’로 쓰였다면 그것은 물리적 공간인 하늘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마태 6,26)에서 ‘하늘’은 단수입니다. 복수로 쓰인 ‘하늘들’은 하느님께서 시공을 초월해서 모든 곳에 계시며 돌보아 주신다는 뜻입니다.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섭리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도처(到處)’가 생명입니다. 마치 물고기는 물속에서 어디로 헤엄쳐 가든지 그곳은 물고기가 갈 수 있는 생명의 길이고, 새가 하늘 어디를 날든지 그곳은 새가 머물 수 있는 곳이든, 우리에게는 도처가 그분께서 현존하시는 생명의 자리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모든 곳에 존재하시며, 지금도 이 자리에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이는 이 기도가 나뿐만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을 위한 기도요,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부 치프리아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우리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한다. 그래서 나 자신의 죄만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지 않는다. 나만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해달라고 청하지 않는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한다. 아버지 앞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다. - <주님의 기도> 8
‘우리 아버지’란 말은 혈연과 나라를 초월해서 자녀들 간의 끈끈한 결속을 느끼게 합니다. 먼 나라같이 느껴지는 남미든, 아프리카 어디든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족입니다. 그들 중에는 굶주린 사람도 있고, 집 없는 사람도 있고, 전쟁으로 난민이 된 사람도 있고,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들은 한 가족으로 생각하며 그들의 아픔과 고통에 동참하고 있나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께 그들을 돌보아 달라고 청하고 있나요?
브라질의 카마라 대주교는 살아생전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이라는 깊은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부당하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당신들이 내 형제를 체포했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경찰은 대주교의 친형제를 체포했는가 싶어 놀라서 “대주교님,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대주교님의 형제인 줄 몰랐습니다. 오셔서 데려가시지요.” 카마라 대주교가 그 사람을 데리러 가면 경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주교님, 이 사람의 성이 대주교님과 다른데, 정말 형제 맞습니까?” 그러면 카마라 대주교는 의아해하는 그들에게 가난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형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곤란에 빠진 그리스도교 신자들만 우리 형제자매고 이들만 돌보면 된다는 얘기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마태 5,47)
사라예보에서 민족 갈등이 있었을 때 내전 상황을 취재하던 기자가 여자아이 하나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총을 맞은 아이의 뒷머리는 으스러지다시피 했습니다. 기자는 노트와 펜을 집어던지고 취재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끌어안은 채 오열하는 한 남자를 도와 차에 태웠습니다. 힘껏 액셀을 밟아 병원을 향해 질주는 기자에게 남자가 말했습니다. “서둘러 주세요. 아이가 아직 살아있어요.” 채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남자가 다시 다그쳤습니다. “어서, 어서요! 아이 몸이 아직 따뜻해요.” 그러다가 끝내는 울먹이며 외쳤습니다. “제발! 오, 하느님! 아이 몸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어요.”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두 사람은 화장실에 들어가 피투성이가 된 자신들의 손과 옷을 대강 씻었습니다. 그때 남자가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이제 죽기보다 힘든 일만 남았군요. 이 아이 아버지에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모는 가슴을 도려내는 것같이 아플 텐데.” 그 말을 들은 기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난 그 애가 댁의 딸인 줄 알았는데요.” 남자가 물끄러미 기자를 쳐다보며 말하였습니다. “아니에요. 하지만 모두가 우리 아이 아닌가요?”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곤란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는 이가 참된 이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0,25-37 참조) 곧 혈통과 종교에 관계없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사랑으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그분의 자녀들은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너무 쉽게 다른 이들에게 꼬리표를 붙이고 거리를 두며 살아갑니다. 나와 똑같이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자매들을 대하면서도, 그 사람의 지위, 학력, 재산, 외모 등 세상의 꼬리표를 붙이면서 내가 가까이할 사람인지 멀리할 사람인지를 결정합니다. 우리가 형제자매에게 꼬리표를 붙인다면 화목한 가족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나이 드신 분들에게 ‘저 구닥다리 노인네들’이라고 꼬리표를 붙이고, 나이 드신 분들은 젊은 사람들에게 ‘저 버릇없는 놈들’이라고 꼬리표를 붙인다면, 어찌 서로 형제자매로 만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꼬리표를 붙이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영양실조에 걸릴 것입니다. 꼬리표는 철저히 외적인 것이고 시간과 함께 사라집니다. 나의 정체성이 꼬리표로 지탱된다면, 그 꼬리표가 떨어져 나갔을 때 나는 누구인가요? 지금은 내가 노동자요, 택시 운전사요, 은행원이요, 교수요, 의사요, 변호사임을 내세운다 해도 언젠가 그 직업을 잃게 될 때 나는 누구인가요?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에게 장애자, 전과자, 가난뱅이, 가방끈이 짧은 자, 동성애자 등의 꼬리표를 달면서 선을 긋고 거리를 둘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카댈Paul Cardall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야비한 구두쇠라도, 술에 절어 사는 주정뱅이라도, 천박한 창녀일지라도, 다 내 형제요 자매다. 그들도 모두 거룩한 성령을 모시고 있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 나는 그들과 대화할 때 내가 한마디 해주어야 하는 상황에도 그들의 말울 먼저 듣고자 한다. 그들에게 말할 때에는 무릎을 꿇고 눈물로 이야기한다. 나는 이들이 없다면 살 수 없다. 하늘에 수많은 별이 있듯이 이들은 내게 존재하는 아름다움이다. 나는 이들을 통해 하느님을 경배한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자는 하나도 없다.
우리가 어떤 형제자매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때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
좋기도 좋으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한데 모여 사는 것
오직 하나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당신의 성전을 우러러보며 하느님의 사랑을 누리는 그것
- 가톨릭 성가 416장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