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로
울산광역시 중구 남외동, 동동, 서동
병영리
옛 경상남도 울산군 하산면 마을로 現在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동이다.
병영면(兵營面)
대한민국 전라남도 강진군 북동부에 있는 면.
동부에는 성자산(294m)·수인산(修仁山, 561m), 중앙에는 성락산(274m)이 솟아 산지가 펼쳐 있으며, 서부는 저지로 평야가 발달했다. 금천(錦川)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면서 면을 남과 북으로 양분하며 유역에 농경지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의 주곡작물 외에 잎담배·배추·참깨 등의 특용작물 재배가 활발하며, 감과 밤의 산출도 많다.
북쪽에 옴천면(唵川面), 남쪽에 군동면(郡東面), 서쪽에 작천면(鵲川面), 동쪽에 장흥군 유치면(有治面)과 각각 접한다.
병영면은 1417년 조선의 전라도와 제주도를 관할하는 전라병영성이 있었던 곳이며 약 500년 동안 존속되었다. 조선시대 서남부의 군사 본부로서 방어기지였으며 전라도와 제주도 육군의 총지휘부가 있었던 곳이다. 1417년(태종 17) 본래 광산현(현 광주시 광산구 송정동)에 설치되어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도강현(현 병영면)으로 옮겨온 것이다. 당시 전라병영성이 옮겨오면서 이 일대는 많은 인구가 유입되어 2만 명이 넘어섰고 가구 수는 3000호를 넘었다. 또한, 병영성 인근에는 상권이 형성되어 전라도의 중심지역으로 발전하였다. 1931년 이전까지는 고군면(古郡面)으로 불렸다. 지리적으로 병영면은 주위에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에 있어 천혜의 요새 역할을 하였다. 또한, 병영성과 함께 상권이 형성되어 전라도 일대에서 중심적인 상업지역이 되었으며 개성상인과 비교되는 남부 최대 병영상인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조선말 상업지역의 발달하여 군사 병영지로 폐단이 지적되었고 1894년 동학군에 의해 병영성이 점령되면서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병영성의 축조는 초대 병마절도사 마천목(馬天木)이 전라도 53주 6진을 통치하였을 때 축조하였다. 이방원의 심복이었던 마천목의 꿈속에 나타난 대로 눈(雪)의 자국을 따라 축조하였다고 하여 ‘설성(雪城)’이라고도 한다. 주변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는 천혜의 요새였으며 남부 해안지역에 자주 출몰하였던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최적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1555년 을묘왜변 때 쳐들어온 왜구들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당시 장흥부사가 왜구들에게 살해되었고 영암군수는 포로가 되었다. 병영성은 다시 복구되었다가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후 병영을 새롭게 보수하여 96칸의 건물을 완성하였는데 이때 동원된 인력은 대부분이 승려였다고 전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병영성이 함락되면 내륙전체가 무방비가 되는 단점이 지적되었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병영성의 전략적 단점이 김응정의 상소문에서 지적되었으나 해안방어의 중요성이 주목되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9년(선조 32년) 도원수 권율장군의 상소로 장흥읍성으로 이전하였으나 1604년 다시 본래의 위치로 옮겼다. 이는 병영성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요구와 원성이 심해지자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여 다시 도강현으로 옮겨간 것이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병영성의 전략적 위치에 대한 지적이 있었는데 오달운(吳達運)은 광주, 장성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고 정약용(丁若鏞)은 해남 대둔산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1894년의 전라도 일대를 중심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병영성은 동학군에게 함락되어 막대한 피해를 당했으며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 복구되지 못하고 폐영되고 말았다. 동학군이 공격해오자 병영성의 별장(別將)은 도주하였고 주축인 병사들도 대부분이 주변지역 농민들이었으며 동학군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전투를 벌이지도 못하고 점령되고 말았다. 폐영 당시 1,889개의 가옥과 5,973명이 살고 있었다.
《대동지지》《색지》에 따르면 석축의 둘레 2,820척, 높이 18척, 여첩 302개, 옹성 12개, 포루 2개, 호지 5개, 우물 9개가 있었다. 또 2층 누로 이뤄진 남문·동문·북문 등이 있었고, 각종 관사와 누정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훼철되었다. 평지에 축조된 성으로 남북으로 약간 긴 직사각형이며, 총 길이는 1,650m이다. 성의 형태는 남북이 길고 동벽의 길이가 서벽에 비해 약간 짧은 부정형의 형태이다. 성곽의 서북쪽에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개천을 해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축조 방법은 성벽의 안쪽과 바깥쪽을 모두 성돌로 쌓는 협축기법을 사용하였다. 성돌은 대부분 자연석으로 바깥면에는 다듬은 돌을 썼고, 보통의 성과 마찬가지로 하부는 큰 돌을 놓고 위로 올라가면서 작은 돌을 쌓는 방법을 썼다. 병영초등학교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성벽은 너비가 2m 이상이 될 정도로 넓게 안쪽까지 견실하게 마무리하였다. 반면 박삼옥 댁에 있는 성벽 중 일부는 외벽만을 쌓고 안쪽으로 흙을 쌓아 내탁하는 편축도 나타난다.
그리고 1656년(효종 7년)에는 우리나라 제주도에 표류 중이던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 33명이 이곳 전라병영성으로 압송되어 약 8년 동안 병영성에 억류되었다가 이 중 8명이 여수를 통해 탈출하였다.
문화재로는 전라 병영성지(全羅兵營城址:사적 397), 병영성 홍교(兵營城虹橋:전남유형문화재 129), 수인사(修仁寺), 병영성(兵營城), 강진 성동리 홍교(康津城東里虹橋), 연화사(蓮花寺) 등이 있고, 이 밖에 병마절도사 주둔시 수호신으로 세웠던 석장승 1쌍과 수인산성이 있다. 병영성은 전라남도기념물 제140호로 지정(1992.3.9) 되었다가 사적 제397호로 다시 지정(1997.4.18)되었다. 병영면 삼인리의 비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다.
면적은 약 93,139㎡이며 교통은 영암~장흥 도로가 면의 북서부를 지난다.
행정구역은 성남리·상락리·지로리·성동리·박동리·삼인리·한학리·상고리·중고리·하고리·도룡리·삭양리 등 12개리가 있다(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 22개리). 면사무소 소재지는 병영면 성남하고길 22이다. 면적 27㎢, 인구 1,695(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