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담론] 제주만의 아름다운 전통풍습 벌초
- 고관용 제주한라대학교 교수
며칠 전 타지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는 큰아들이 언제 벌초하느냐며 항공권을 발권받으려 한다는 전화를 받고
올해도 벌써 벌초하는 날이 다가온 것을 실감하게 됐다.
다른 지방의 경우 추석 명절날 성묘를 간다. 그런데 제주에서는 추석 전에 미리 벌초를 마치는 전통풍습이 있다.
이는 자녀에게 자신들의 조상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핵가족화의 영향과 다른 지방에 사는 이들이 많은 일부 가정은 묘소 관리가 어려워 대행업체에 벌초를 맡기는 등
유별난 제주의 벌초문화도 차츰 변화하는 분위기다.
제주에는 아직도 다양한 괸당(친족) 문화가 많이 남아있다. 특별한 풍습으로 식개(제사), 잔치(결혼 전날 가문잔치),
영장(장례)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모둠 벌초는 제주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문화다.
그래서 이맘때쯤 제주 사람들의 인사 중에 "벌초는 했느냐"는 대화가 수시로 등장한다. 2000년대까지 음력 8월
초하룻날은 도내 대부분 학교가 자율적으로 성묘방학을 했다. 이로써 자녀들에게 조상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벌초 행렬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공무원과 지역농협에서도 벌초 휴가를 주기도 하는 등 모둠 벌초는 제주지역의 특이한 풍습으로 벌초를
몸소 체험하고 조상의 음덕을 기리도록 한다. 추석 전에 미리 조상 묘소를 찾아 벌초한다. 명절날에는 모두 함께
친척 집을 차례로 방문하며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나눠 먹는다. 벌초와 추석 명절을 친족들이 모두 함께하는
'괸당 문화'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제주에서는 조상묘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는 것을 큰 불효로 여긴다. 어쩌다 벌초를 하지 않은 묘소가 눈에 띄면
그 집안의 됨됨이를 탓하는 척도로 삼을 정도다. 그래서 타지에서 생활하는 후손들도 벌초에 참가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삼기에 해외동포들이 벌초를 위해 제주를 찾기도 한다.
직장인이 벌초 휴가를 받는 것을 당연시하고 어쩔 수 없이 벌초에 참여 못할 경우 금품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추석 2주 전쯤 주말에는 제주기점 국내선 비행기표는 여름 피서 관광이 끝났음에도 벌초 귀향객으로
일찌감치 예약이 마감되기도 한다.
필자는 벌초날이 생일이기에 친족들이 모이면 벌초하려고 태어났다고 놀림 당했다. 어린 시절부터 산중턱을
돌아다니며 벌초하러 생일날마다 고행으로 힘들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하지만 철들면서 생일날 벌초를 빠지지
않은 덕택에 조상들의 도움으로 가족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 조상들께 감사드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제주의 모둠벌초 풍습도 최근 들어 많이 변하고 있다. 핵가족화로 조상에 대한 공경심이 약해져 벌초
참여율이 낮아지고 서울 등 타지에 정착 거주하는 친족들이 늘어나 같은날 벌초를 하기 어려워졌다.
또한 장례문화가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뀌어 가고 소위 명당을 찾아 산야에 흩어져 있던 조상들의 묘도 화장해
납골당이나 평장 등으로 벌초 걱정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는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향후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자손들의 벌초 문제를 예상해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올해도 생일날 아들과 함께 벌초하며 타계하신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내일(음력 8월 초하루)이나 주말 제주
들녘에 아름다운 전통풍습을 함께하는 효행자들이 가득한 모습을 그려본다.
출처: 제민일보 2024. 90. 0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