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으로 가는 길
- 양문규
영국사에서 집으로 가는 길
산수유 가지 위
새들이 안팎 없이 노닌다
노오란 꽃잎
쪽빛 물구덩 노랗게 물들인다.
그 속을 참개구리
암팡지게 기지개 펴며
물방귀를 뀐다.
논밭에선 농부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노인의 허리 굽은 삽질
아버지도 배 밭에 거름을 뿌리고 있겠지
삶의 검붉은 때 배꽃처럼
환하게 꽃 피울 수 있을지
썩은 두엄더미 옆으로 개가 지난다
집으로 가는 길
많은 꿈들 울음으로 메마른
그 못난 사내,
앞길 열어 보여주기도 하면서
산채만 한 슬픔이며 아픔
살포시 감싸안아주기도 하는 것이다.
- 시집 <집으로 가는 길-2005 시와 에세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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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공광규 시인 초청 시낭송회에 참석하신 양문규 시인에 얽힌 이야기를 옮깁니다.
사실 양문규 시인은 눈물의 내력이 꽤 알려진 사람입니다.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홀로 영국사 뒤 두 평 쪽방에 거처할 때 처음엔 무진장 외로웠다고 합니다. “그 방에서 참 많이 울었어요. 꽃이 피면 핀다고, 눈이 오면 온다고...” 너무 외로워 울기만 하다가 시를 만난 후 살 것 같았다고 합니다.
유난히 외로움을 많이 타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체질이라 가슴이 늘 촉촉하게 젖어있는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울어서 모친이 매미 허물을 삶아서 먹인 적도 있다고 하니 그 ‘선천성 그리움’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인삼농사 짓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 영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양 시인은 인근 대처인 대전으로 초등학교 6학년 때 유학을 갔는데, 적응을 못하고 하도 울어대는 바람에 ‘애 버리겠다’고 담임과 부모가 합의해 다시 영동으로 돌아왔던 일도 있답니다.
얼핏 보면 야구선수 양준혁을 닮기도 했고 입술을 쫑긋 모아 웃는 모습은 수줍은 개구쟁이를 떠올리지만 이 정 많고 외로움 많은 시인에게 눈물의 곡절은 오히려 영국사 뒷방으로 들어서 더욱 깊어졌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의 품성과 눈물의 내력을 더듬자면 자연히 20년 전으로 거슬러가야겠습니다. 동향의 대선배이고 시단의 어른인 신경림 시인을 1982년에 만나 그의 '민요기행'에 열성적으로 쫓아다니면서 인연을 쌓다가 1989년 신경림 시인의 부름을 받게 됩니다. 그 길로 서울에 가서 그해 출범한 민예총의 총무국장을 1991까지 3년 동안 맡아 살림을 이끌었고, 이후 실천문학사와 출판사 열림원에서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1989년은 ‘한국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데뷔한 해였고, 1991년 첫 시집 ‘벙어리 연가’를 펴낸 그였지만 이후로는 자신의 시를 위해서 살지 못했음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일이란 대개 전면의 주역으로 활약하기보다는 뒷전에서 생색은 나지 않지만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는 그런 역할이었습니다. 외로운 문인들의 술벗이 되어주고 행사 실무를 맡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삶이었습니다. 한번은 고은 시인이 그를 두고 여러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너의 에너지는 내 삼십대와 비슷하다”며 “제발 너 자신을 위해 좀 살아라”고 충고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민예총에서 2년간을 더 복무한 뒤 그는 실천문학사에 자리를 잡습니다. 이곳에서도 그에게는 일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IMF 국면에서 어려운 출판사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결국 그는 구조조정의 형식으로 1999년 퇴출당하게 됩니다. 전후관계와 속사정이야 그 자신만이 알겠지만,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사람 관계와 각박한 서울살이에 심각한 내상을 입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만났던 숱한 문인들, 언론사 문학담당 기자들, 또 다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술집과 술판 사이에서, 일과 일의 틈새에서 정신없이 살았을 10여년의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스스로 유배의 길을 택해 스스로를 가둔 곳이 지금의 영국사 뒷방 대나무집 이었던 것입니다.
가뜩이나 울음 많은 사내가 스스로를 가둔 채 ‘바퀴벌레’와 동족처럼 살아가며 내홍으로 흘린 눈물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습니다. 마침 그 영국사에는 천년도 넘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가 그와 함께 울었습니다. 천연기념물로 보호되는 이 나무는 나라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울음소리를 내왔던 것으로 유명하지요. 실제로 양 시인은 이 절에서 은행나무가 우는 소리를 직접 들었다고 합니다. “능구렁이 울음 같기도 하고 황소울음 같기도 한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 소리를 직접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전설은 믿지 않아요. 은행나무의 울음은 재난이나 환난을 알리는 소리가 아니라 봄을 알리는 전령, 생명의 소리 그 자체였습니다. 누대에 걸쳐 좌절과 절망을 제 울음으로 감싸고 누군가에게 사랑과 꿈을 심어 주었을 것 같은 생명의 소리 말입니다. 내 삶에도 그런 큰 울음이 배어 있다면 좋겠습니다.”
결국 그의 울음도 그냥 울음이 아니라 생명의 소리이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는 지금 문학계간지 '시에'(시와에세이)의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일주일에 한두 번 서울에 올라가지만 은행나무가 보고 싶고, 아름다운 고향 산천이 그리워 서둘러 다시 ‘집으로 가는 길’로 접어드는 걸 보면 그곳을 떠날 의사는 전혀 없어 보입니다.
영국사에 기거하면서 시집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실천문학사, 2002)와 <집으로 가는 길>(시와 에세이, 2005)을 펴내면서 누군가에게 그 무엇이 되어 다가가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칩니다. 시인은 자신의 설움을 토해내는 자이기도 하지만, 남을 대신하여 통곡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양문규 시에 밴 울음 역시 현실과 부딪치는 상처에서 돋아나는 울음인 동시에 인간 존재의 아픔과 허무의 울음이며, 치유의 울음이기도 할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이치와 원리를 깨달은 듯 ‘집으로 가는 길’은 자연과 생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이해로 충만합니다. 그는 영국사에서 세상을 관조할 힘을 얻었고 생사의 경계마저 허물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꿈들 울음으로 메마른 그 못난 사내’도 자연은 넉넉히 품어줍니다. ‘산채만 한 슬픔이며 아픔’도 ‘살포시 감싸안아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길에서 다시 생을 얻고자 하는 그에게서 자연과 사람이 일체가 되는 서정을 이번에 보았습니다. 그날 밤 그는 밀실과 광장의 구분이 없고 문턱도 없이 보였습니다. 일상의 풍경이 시인의 앞에서는 그 경계가 모두 지워져 버립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그렇게 문드러지고 경계를 허물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는 체면을 차리거나, 척 하거나, 말을 다듬어하지도 않습니다. 때로는 그런 점 때문에 그의 이력과 사람됨을 잘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가끔 오해를 받기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를테면 노래방에서 자기가 아는 노래가 나오면 신청한 사람 보다 더 큰 목청으로 어깨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불러재낍니다. 노래방에서 싸움질이 벌어지는 이유가 여럿 있습니다. 남 노래할 때 딴청을 부리는 사람, 다른 사람 노래할 겨를 없이 자기 혼자 여러 곡을 한꺼번에 입력하여 독무대를 만드는 사람, 그리고 다른 이가 폼 잡고 노래할 때 끼어들어 더 고래고래 노래하는 사람 등등이 싸움의 원인이 됩니다. 그날도 그걸 아는 동석자가 눈치를 주는데도 양시인은 아랑곳없습니다. 노래방에서의 노래가 무슨 공연이나 노래자랑이 아니라 같이 흥겹자고 부르는 것인데 그게 뭐 대수냐는 식입니다. 사실 참으로 지당한 생각입니다. 오히려 조잔하게 그런 따위의 이유로 시비를 불러일으키는 것 보다는 훨씬 인간적입니다.
그렇듯 그에게는 자잘한 세속적 기준과 엄숙함이 마땅찮아 보입니다. 처음 본 누구라도 마음이 내키면 형님 아재가 되고 심지어는 장인어른이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그는 정겹고 푸근한 사람입니다. 자연 속의 미물들에게나 길에서 만나는 그 누구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열어 보입니다. 시도 마찬가지로 그들과의 교감을 통해 얻는 듯합니다. 그의 표현으로는 그걸 ‘낡은 시’ ‘낡은 서정시의 방법’이라고 하지만 그는 그 낡음 속에 새로움을 열어주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날 양문규 시인으로부터 명함과 함께 그가 편집주간으로 있는 계간지 ‘시에’ 봄호를 한 권 증정 받았습니다. 시에의 창간사는 “삶을 들여다보는 진지한 시선과, 나의 삶과 우리들의 삶을 연결할 수 있는 글쓰기만이 우리 시대의 문학이 짊어진 멍에를 벗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시에는 ‘겸손한 연대로서의 문학 공동체’를 지향한다고 밝히면서 이를 위해 전국 네트워크를 구성하였습니다. 호남의 김선태, 안도현 시인, 영남의 김용락, 김경복 시인, 중부권의 박수연 평론가, 수도권의 박형준 시인, 방민호 평론가가 편집 자문위원을 맡아 상대적으로 소외된 지역 문인들의 좋은 작품들을 발굴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에 띄는 것은 창간호부터 작품들을 작가의 등단 역순으로 배열, 등단 1, 2년차 젊은 시인들의 시를 전면에 배치하고 중진 시인들의 작품을 오히려 뒤쪽에 배치한 점이었는데 신인들의 문학적 성취의 가능성을 높이 사겠다는 의지라고 했습니다. 그 자신 역시 시 뿐 아니라 학구적 열정 또한 만만찮아 보입니다. 청주대 국문과를 나와 ‘백석 시 연구―시창작방법론을 중심으로’라는 박사학위논문으로 명지대 문예창작과 1호 박사가 된 걸 보면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전혀 먹물 냄새를 풍기지 않았습니다. 밤을 하얗게 새고 동촌의 아침 강바람을 맞으며 자꾸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추스르면서도 그는 밤이 더 깊지 못해 아쉬워했습니다. “이따가 여기 동촌 평상에 앉아서 한 잔 더 해!” 공광규 시인과 둘이 앞서 동촌의 강가를 산책하고 돌아와 농담을 진담처럼 던졌던 안용태 형도 모처럼 시인의 향기에 취해서인지 눈가가 약간 붉어졌습니다.
새벽 공기의 입자가 피부 땀샘에 적당한 온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습니다.
간밤 시인들의 웅성거림이 다시 귀안에서 공명합니다.
각자 돌아갈 길이 정해져 있는 사람들의 이별은 대체로 싱거웠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환하게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네지 못했던 게 미안해집니다.
뚝뚝 그의 눈물방울만 보고 나는 아무것도 보여준 것이 없는 것 같아 더욱 미안합니다.
‘이 세상의 가벼운 눈물 한 방울’과 ‘눈을 맞춘’ 시인의 ‘집으로 가는 길’이
진달래 왕창 물들고 조팝꽃 휘어진 그런 길이었으면 좋았겠습니다.
ACT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