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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6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루카 14,12-14
진짜 사랑을 알아보는 유일한 법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나에게 보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지 말고 보답할 수
없는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보답받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고 하십니다.
내가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는 일은 그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보상을 바라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보상을 요구한다면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을 위해 사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닙니다.
제일 나쁜 일은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뱀을 위해 살면 나는 뱀의 소굴에
갇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내 안의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방법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만을 사랑한다면 그건 사랑일 수 없습니다.
반드시 보답을 바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호텔과 부동산 재벌 레오나 헬름슬리는 2007년 사망하면서 자신의 말티즈 강아지
‘트러블’에게 1,200만 달러를 상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두 조카에게는 한 푼도 상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트러블에 대한 사랑은 진짜였을까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며 개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개가 자신에게 무언가 주었기에 자신도 사랑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랑이 많은 사람임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면 그것은 형제만을 바라봐서일까요? 부모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마음이 아플까 봐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형제를 사랑하면 그건 분명 형제를 이용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도 있고 박수를 쳐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두고는 사랑이 증명되지 않습니다.
내가 부모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기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개는 주인이 위험에 처하면 어떻게 할까요? 자기부터 살고 봅니다. 아무리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어도 이길 자신이 없다면 도망칩니다.
이것이 그것들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가 누구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화 아바타의 줄거리입니다.
22세기, 인류는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판도라라는 위성에서 희귀한 광물
‘언옵테이니엄’을 채굴하고자 합니다.
판도라에는 나비족(Na'vi)이라는 키가 크고 푸른 피부를 가진 원주민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자연과 깊은 연결을 하고 살아갑니다.
인간들은 판도라의 대기가 자신들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에, 아바타 프로그램을
통해 나비족의 모습을 한 유전적으로 조작된 아바타 몸을 원격으로 조종합니다.
전직 해병대원인 주인공 제이크 설리는 하반신 마비 상태로, 죽은 쌍둥이 형의 대체
인원으로 아바타 운용자로 판도라에 도착합니다.
제이크는 아바타를 통해 나비족 사이에 잠입하여 그들의 신뢰를 얻고, 광산 개발을 위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이크는 나비족 사이에서 살면서 그들의 문화와 생활 방식, 그리고 자연에
대한 신성한 존중을 배워 갑니다.
특히, 나비족 여성 네티리와의 관계를 통해 그는 나비족의 삶과 가치에 깊이 매료됩니다.
나비족은 제이크가 자신들을 이용하기 위해 자신들 속으로 잠입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믿어줍니다.
결국, 그는 나비족을 돕기로 결심하고 인간과의 전투에 나서게 됩니다.
제이크의 이러한 행동은 인간의 육체를 넘어 나비족의 아바타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이크는 신적 존재인 나무 에이와와 나비족의 도움으로 불구의 인간 몸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진정한 나비족이 됩니다.
제이크는 왜 인간을 배신하고 나비족이 되었을까요? 인간 사회에서는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도 있었고 자기에게 보상을 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믿는 어떤 신을 사랑해서
나비족만큼 자기를 위해주는 이들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이것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만이 진짜 사랑입니다.
나에게 칭찬하거나 감탄만 하는 존재는 위험합니다.
창조자를 먼저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저 나만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다가오는 이는 가짜입니다.
우리에겐 우리 발을 씻어주신 하느님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이
우리 존재 상승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 세상은 나를 칭찬하고 감탄할 수는 있어도 나에게 영광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나에게 영광을 주는 이는 아버지의 뜻 때문에 나의 발을 씻어주는 이고 그런 존재를
선택해서 사랑해야 이용당하다 버려지는 삶이 아닌 참 존재의 완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존재를 잘 분별해서
그를 위해 살며 그의 이름에 영광을 돌려 우리 존재를 완성해갑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6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루카 14,12-14
희망이 없어도 희망합시다!
저 같은 경우 계절을 좀 앞당겨 사는 편입니다.
벌써 제 마음이 대림 시기로 건너가 있습니다. 부탁받은 특강 주제는 어떻게 할 것이며,
한 시간 남짓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머리가 복잡합니다.
여러모로 어렵고 힘든 순간임을 감안해서 희망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를 통해 성조 아브라함의 삶을 소개하면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자!’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저희 집에 꽤 광활한 농지가 있습니다. 농사를 짓지 않으면 과태료가 부과되기에,
몇 가지 과일 묘목을 심었습니다.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며 식재를 했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지요.
사는 게 바빠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했더니, 묘목들의 성장 속도가 너무 뎌뎠습니다.
시들시들 말라 죽은 친구들도 생겨났습니다.
괜히 심었나, 후회하면서, 아예 포기하다시피 했습니다.
별로 희망할 것이 없겠구나, 하는 마음에 덜 자란 묘목들에게도 많이 미안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산책을 하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성장이 유난히 더딘 작고 말라 비틀어진 감나무 묘목에서 그럴듯한 감이 딱 두 개
열려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포기했었는데, 또 다른 희망이 생겼습니다.
올해는 거름도 더 챙겨주고, 가지치기도 잘 해주면, 내년에는 네 개가 열리겠지,
하는 마음에 새로운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참 묘하십니다.
우리는 포기했는데, 하느님은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내 인생은 실패야, 여기서 끝이야, 하고 좌절하지만,
하느님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말라비틀어진 인생이라고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우리네 삶이 아무리 비참하고 굴욕적이라 할지라도, 실망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인 로마서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게 들려옵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하느님의 생각과 우리 인간의 생각을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느님의 계획과 인간의 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살레시오 협력자 회원 가운데 알렉산드리나 마리아 다 코스타(1904~1955)라는
복녀가 계십니다.
포르투갈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기쁘게 살아가던 한 작은 소녀였습니다.
14살되던 해, 안타깝게도 알렉산드리나는 결코 겪지 말아야 할 끔찍한 일을 겪습니다.
불순한 의도를 지닌 사악한 악한들의 공격을 피해 창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로 인해 그녀의 신체는 점점 마비가 심해졌고, 마침내 21살되던 무렵부터는
병상에 누워 꼼짝 못하게 되었는데, 그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한창 꽃 피어나야 할 21살 나이에 알렉산드리나는 하루 온종일 자신의 방에
누워있어야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의 뜻 운운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화가 치미는 일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알렉산드리나는 자신의 그런 비참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그야말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한 것입니다.
그 결과 놀라운 결실을 맺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했습니다.
‘고통당하고, 사랑하며, 보속하는 것!’ 더 놀라운 사실 한 가지. 그녀는 자신의 병고를
낫게 해달라는 기도, 치유의 기적을 청할 마음을 접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세상의 모든 감실 속에 갇혀계신 수인(囚人) 예수님과의 신비적인
일치가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알렉산드리나는 하루 온종일 자신의 방에 갇혀 지냈지만, 전 세계 수많은 경당을
순례하며 성체를 조배했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조언을 듣고, 그녀에게 기도를 청하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1955년 10월 13일에 선종했고, 200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그녀를 시복했습니다.
“저는 기도를 하는 동안, 세상의 모든 감실 속에 계신 성체 예수님 앞에 머문다는
지향을 가지고, 또한 제 영혼 안에 현존하시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를 흠숭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늘 기도하곤 했습니다.
오, 나의 예수님,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지요!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요!”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강론>
(2023. 11. 6. 월)(루카 14,12-14)
<사랑>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ㄴ-14).”
이 말씀은, “친한 사람들‘만’ 초대하지 말고 친하지 않은 사람들‘도’ 초대하여라.”,
즉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여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사랑을 실천할 때에는
보답을 받기를 바라지 말고 무조건 실천하여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들은 너에게 보답할 수 없겠지만 주님께서 보답하실 것이기 때문에 너는
복된 사람이 될 것이다.”입니다.
<여기서 ‘행복’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행복이 아니라 ‘구원’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행복할 것이다.’는 ‘복될 것이다.’, 즉 ‘구원받을 것이다.’입니다.>
그들이 보답할 수 없는 것이 ‘복’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이 ‘복’의 원인이 됩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는 ‘최후의 심판 때’입니다.
그래서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심판 때에
너는 의인으로 인정을 받을 것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47)”
울타리를 쳐 놓고서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죄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주님과 함께 사랑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야고 2,1-4.8-9).”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에서 ‘이웃’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안 친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멀리하는 것은 주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죄가 됩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라는 말은,
‘날마다 큰 잔치를 열었다.’로 해석됩니다.
만일에 부자가 그 잔치에 라자로를 불러서 자기 옆자리에 앉히고, 음식을 함께 먹었다면?
그랬다면 그것은 라자로에게 사랑을 베풀어 준 일이 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의 구원을
미리 준비한 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일에 부자가 라자로를 부르긴 했는데, 야고보서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
눈에 뜨이지도 않는 구석 자리에 앉혀 놓고서 손님들이 먹고 남긴 음식이나 주었다면?
<춘향전에서 변사또의 생일잔치에 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암행어사 이몽룡이 그런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걸인이 암행어사라는 것을 눈치 챘다면 변사또는 절대로 그런 대접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답’에 초점을 맞춰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연결할 수 있습니다.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3-35).”
‘착한 사마리아인’은 순전히 ‘가엾은 마음’으로(사랑의 마음으로) 자기의 시간과 돈을
모두 들여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이 비유는 바로 그런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사마리아인이 대가나 보상을 바라고 그런 일을 했다면?
그 일은 선행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일, 이익을 얻기 위해서 하는
장사나 거래가 될 뿐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인정을 결코 받을 수 없는 일,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고,
불쌍한 사람의 처지를 자기 돈벌이에 악용하려고 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