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500
■ 2부 장강의 영웅들 (156)
제8권 불타는 중원
제 20장 동방의 암운 (5)
임치성(臨淄城) 분위기는 우울했다.2년에 걸쳐 세 차례나 노(魯)나라를 공략했지만 진(晉)
나라를 끌어들이기는 커녕 노(魯)나라 변방의 작은 읍 하나조차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깔보았는가?'제영공도, 최저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반성의 마음이 일었다.
군대를 재정비했다. 겨울 동안 식량을 쌓고 병차대를 훈련시켜 전력을 강화했다.
이듬해 가을, 제영공(齊靈公)은 또 노나라 땅을 침공했다.네 번째 출병이었다.
3군 중 일군은 제영공이 친히 이끌고 나가 성읍(成邑)의 서북쪽에 위치한 도(桃)라는 읍을
포위했고, 다른 일군은 고후가 지휘하여 성읍의 동북쪽에 있는 방읍(防邑)을 포위했다.
나머지 일군은 최저의 지휘하에 임치(臨淄)를 수비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번에는 제군의 움직임이 여느 때와 달랐다. 특히 고후(高厚)가 이끄는 군대가 선전했다.
그들은 방읍을 포위하자마자 노나라 수비대장인 장견(臧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뒤늦게 노군(魯軍)이 그를 구하러 달려왔으나 제군은 이미 그 곳에서 철수하고 난 뒤었다.
적장을 사로잡았다는 보고에 제영공(齊靈公)은 의기양양했다.
그는 노(魯)나라에 대해 자신의 위용과 도량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포로가 된 장견을 위로한답시고 내시관 숙사위를 보내 말했다.
"그대는 포로가 된 것을 수치스러워하지 말라. 내 그대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할까 염려되어 사람을 보내노라."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장견(臧堅)의 수치심을 불러 일으키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제(齊)나라 군주는 상대를 전혀 배려하지 못하는 군주다. 사(士)인 나에게 어찌 내시관을 보내
위문하는 예(禮)를 베푸는 것인가. 적어도 장수급 정도는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제후(齊侯)는 반드시 큰 수모를 당하리라."장견(臧堅)은 불같이 노하여 뜰에 놓여 있던
끝이 뾰족한 막대기로 자신의 상처를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나라 사람이 얼마나 예(禮)를 중시하는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반해 제나라
사람들은 자유분방하다. 모든 것이 실리적이다.
장견의 자결 소식을 들은 제영공(齊靈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禮)와 목숨을 바꾸다니, 노나라 사람은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내가 숙사위를 보내 위로한 것이
그토록 잘못이란 말인가? 안약(晏弱)은 예에 밝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보리라."
그때 안약(晏弱)은 최저와 함께 임치성을 지키는 임무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곳에 나와 있지 않았다. 사람을 임치성으로 보냈다.얼마 후 심부름꾼이 돌아와 뜻밖의 말을 전했다.
"안약 대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뭐, 안약(晏弱)이 죽었다고?"
제영공(齊靈公)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에게 중원 맹주에 대한 꿈을 심어준 사람. 불과 2년 만에 제나라 숙원인 내(萊)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온 사람. 늘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준 사람.
어쩌면 제영공(齊靈公)이 지금까지 군주다운 군주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도
안약이 조정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그런 안약(晏弱)이 죽다니?'
제영공은 자신이 타고 있는 병차 바퀴 하나가 빠져 달아난 듯한 느낌이었다.
그랬다.그 해 겨울, 안약(晏弱)은 죽었다.제영공(齊靈公)이 노나라 땅을 침공하기 시작할 그 무렵,
그는 병상에 누웠다가 한 달이 채 안 돼 숨을 거둔 것이었다.
임종을 지켜본 사람은 그의 아들 안영(晏嬰)이었다. 안약(晏弱)은 숨을 거두기 전,
안영에게 알쏭달쏭한 말을 유언으로 대신했다.- 천하는 우리 주공만의 것이 아니다.
무슨 말인가.중원 맹주를 향한 야심이 헛된 꿈이라는 절망의 절규인가. 아니면 중원 맹주를 노리는
제후들이 많이 있으니 신중하라는 제영공에 대한 최후의 간언인가.그것도 아니라면
천하 패업을 향한 길이 그만큼 어려우니 주공을 잘 보필하라는 안영에 대한 가르침인가.
제영공은 도(桃)에 대한 포위를 풀고 즉각 임치로 귀환하여 친히 그 장례에 참석했다.
시호를 내렸다.- 환(桓)제환공(齊桓公)의 '환'자를 땄다. 이족(異族)을 정복하고 국토를 넓혔다,
라는 뜻이 그 글자에 담겨 있다.그래서 안약(晏弱)은 죽은 뒤에 안환자(晏桓子)로 불리게 된다.
대단한 광영이다.안약의 아들 안영(晏嬰)은 아버지의 원리원칙 정신을 충실히 이어받았다.
그는 빈장(殯葬)에서 부터 시작하여 본장에 이르기까지 예법에 벗어나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춘추좌씨전>을 쓴 좌구명은 이때 처음으로 안영(晏嬰)을 등장시키는데,
그 내용이 바로 안영이 행한 상례(喪禮)에 관한 것이었다.제(齊)나라 안환자(晏桓子)가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 안영(晏嬰)은 굵은 삼베옷을 입고, 삼으로 꼰 띠를 머리와 허리에 둘렀다.
죽장(竹杖)을 짚고, 짚신을 신었으며, 음식은 죽만을 먹었다.
상주는 움막에서 지내며, 거적 위에서 잠자고, 풀뭉치를 베개로 삼았다. 집안의 노인이 말하였다.
"그건 대부가 지킬 상례가 아니네."안영(晏嬰)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경(卿)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대부의 상례를 행하겠지요."
아마도 이 무렵에는 장례가 매우 사치스러웠던 모양이다. 즉 서민은 대부의 예(禮)에 따라
상례를 치르고, 대부는 경(卿)의 예에 따라 장례를 지냈다.
그런데 안영(晏嬰)은 원리원칙대로 대부 신분에 맞는 상례를 취했다.
당시 현실로서는 서민들이 취하는 상례인 셈이다.
이것을 본 집안 노인이 못 마땅했던지 상주 안영에게 충고했다.
- 대부 신분인 그대는 어찌하여 경(卿)이 취하는 상례를 행하지 않는 것인가?
그러자 안영(晏嬰)이 대답했다.
- 이것이 대부의 상례가 아니라면 다음날 경으로 있는 누군가가 대부의 상례를 행하겠지요.
내가 지금 취하는 상례가 대부의 상례가 아니라면 훗날 누군가 정신이 제대로 박힌 경(卿)이 나타나
자기 신분에 맞는 상례를 취하겠지요, 라는 뜻이다.안영(晏嬰)은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당시 사치와 허영에 빠진 제(齊)나라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안약(晏弱)이 죽은 다음해, 즉 BC 555년(제영공 27년) 여름.
제영공(齊靈公)은 다시 노나라 북쪽 변경을 침공했다. 다섯 번째였다.
출병하기 앞서 재상 최저(崔杼)와 아경 고후(高厚) 사이에 다소간 의견 차이가 있었다.
- 이번에야말로 진(晉)나라가 출격할 것이다. 따라서 3군 모두 노나라 땅으로 진격하기로 한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었다.문제는 텅 빈 임치성(臨淄城)을 누가 지키느냐였다.
- 당연히 세자 광(光)이 남아서 도성을 지켜야 합니다.최저(崔杼)의 주장이었다.
반면 고후(高厚)는 공자 아(牙)를 내세웠다.- 세자가 도읍에 남는 경우는 없습니다.
공자 아(牙)를 남겨 도성 수비를 맡기고, 세자는 주공의 곁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두 의견에 대해 제영공(齊靈公)은 명쾌하게 답변을 내렸다.- 공자 아(牙)를 남긴다.
최저(崔杼)는 불쾌했다. 아니, 불안했다.
'진(晉)나라 출병이 확실시되는 이 마당에 후사인 세자를 전쟁터로 끌고 나가다니.'
그러나 그 문제로 다툼을 벌일 상황이 아니었다.
앞으로 닥쳐올 진(晉)나라와의 대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 급선무였다.
마침내 제군(齊軍)은 세 길로 나누어 노나라 땅으로 쳐들어갔다.
고후(高厚)가 이끄는 일군이 가장 먼저 진격했고, 그 다음으로 제영공(齊靈公)이 지휘하는 일군,
마지막으로 최저(崔杼)가 후군이 되어 임치성(臨淄城)을 떠났다.
501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