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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Gaesar”는 누구인가?
가이사, 카이사르, 시이저(Gaesar, Caesar)
카이사르의 유래
원래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정 말기 율리우스 카아사르(BC100-BC44)의 이름으로 가문(성씨)의 이름이었다.
영어단어 시저(Caesar)는 독일에서는 카이저(kaiser), 러시아에서는 차르(czar) 라고 하지만 모두 황제를 뜻하는 말이다.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각국에서 다르게 발음되며 모두 황제를 가리키게 된 것이다.
BC8세기경 이탈리아 반도에서 생긴 작은 도시국가가, 신구약의 중간기에 선지서의 예언대로, BC270년경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BC146년 그리이스를 정복하고, BC64년 이집트를 정복하고 지중해 연안국가들의 제국으로 부상한다.
로마는 이 시대에 귀족과 평민대표(호민관)로 구성된 공화정 정치를 실현하고 있었고, BC60년경 로마공화정 말기에 원로원의 저지에도 굴하지 않고, 스파르타쿠스 바란을 진압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와 함께 1차 삼두정치를 실행한다. 하지만 이 셋의 대립이 계속되었고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전쟁에서 전사하고, 결국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하면서 율리우스는 폼페이우스가 다스리는 로마로 진격해 로마를 손에 넣고,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해 훗날을 기약하지만 이집트 프톨레미13세에게 암살당해 죽는다.
이제 천하를 얻은 율리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를 사랑하게 되고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왕위 얻어내고, 그 사이에서 난 아들 가이사리온을 차기 로마제국의 황제로 키우려 한다.
로마제국은 율리우스의 독재정치로 시민권 확대, 복지와 식민지 정책사업으로 곡물 분배 수익자의 제한, 빈민·노병의 해외에서의 식민지 건설, 배심 제도의 개정, 태양력의 개정, 통화개혁 등 대사업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귀족들은 율리우스가 황제가 되는 것을 반대했고 그의 독재에 반발하여 가장 총애하는 부하 브르투스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제 가이사리온이 제국의 대를 이어야 했지만, 율리우스의 유언에는 생각지도 않게 누나(율리아 카이사리스)의 외손자 옥타비아누스가 지명되 있었다.
로마의 2인자였던 안토니우스와 가이사리온의 세력들은 옥타비아누스와 대립을 벌이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이들과 손을 잡고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벌인다.
이집트와 동방을 맡은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지고 거기서 난 아들을 왕으로 앉혔고 클레오파트라를 왕들의 여왕이란 호칭을 줌으로서 로마의 미움을 샀다. 이후 이 둘의 대결은 절정에 오르고 BC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는 패배하고 옥타비아누스가 제국의 황제로 등극한다. 원로원으로부터 '존엄한 자'란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절대권력의 초대 로마 황제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이후 로마 황제뿐만 아니라 나아가 전제적 권력을 가진 '황제'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는 200년간 계속 평화를 누리며 발전하였다. 이 시기를 '팍스로마나'라고 하며, 로마제국은 BC63~AD565까지 약 600년을 존속하게 된다.
성경과 카이사르(가이사)의 관계
신약 시대의 팔레스틴과 유대인들은 로마 가이사의 정권 하에 있었다.
1. 아우구스투스 시이저 (아구스도) - BC 31- AD 14, 원래 옥타비아누스
2. 티베리우스 시저 (디베료) - AD 14-37,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
3. 칼리큘라 - AD 37 -41
4. 클라우디우스 (글라우디오) - AD 41- 54
5. 네로 - AD 54- 68
신약 성경에는 이들 중에 칼리큘라를 제외한 4인의 가이사가 나온다.
1. 아구스도 : 복음서에는 누가복음에 아우구스투스가 예수 탄생할 때 호적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눅 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디베료 : 디베료 때에 세례 요한은 전도하며 요단 강에서 세례를 주었고, 그 외의 누가복음 2장을 제외하고는
다른 복음서 전부의 인용은 티베리우스(디베료)를 가리키고 있다.
- 눅 3:1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 눅 20:25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막 12:17)
- 눅 23: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 요한 19: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3. 글라우디오 : 이 때 아가보 선지자는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와서, 성령의 지시로 흉년이 들 것을예언했고,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야손의 난' 이 있었다.
- 행 11: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 행 17:7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4. 네로 : 이 때에 사도바울이 베스도 앞에서 가이사 네로에게 호소했고, 네로 치하의 관료, 특별히 전도한
호위군들에게 문안했다. 폭군으로 유명한 네로 때부터 기독교인들을 박해했고 이때 바울이 로마의 옥에 갖히고
결국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했다.
- 행 25: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 빌 4:22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성경과 관련하여 알아두어야 할 로마 황제는 Render unto Ceasar 때문이다. 이 영문의 뜻은 '가이사에게 주라'는 뜻이다. 곧 유명한 문장인 (눅 20:24-25) 『[24] Shew me a penny. Whose image and superscription hath it? They answered and said, Caesar's. [25] And he said unto them, Render therefore unto Caesar the things which be Caesar's, and unto God the things which be God's.』 이 전체문장이다.
한글로 보면, (눅 20:24-25) 『[24]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5]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만큼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는 나라와 사람들은 '가이사의 것'에 대한 질문, 의문, 반문, 대답 등이 늘 따라왔다.
어떤 분은 이 문장을 국세는 국세로 잘 내고, 하나님의 것 즉 십일조는 십일조의 주인인 하나님께 잘 내라는 말씀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는 반은 맞지만, 또 반은 틀리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시 주님의 대답에 바리새인들은 충분한 이해를 못했을 것이다.
잠깐!
가이사가 누구인가를 살펴보자.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칭호다. 본래 가이사는 Gaius Julius Caesar 중 맨 뒤의 Caesar 라는 성(姓)을 부르는 것이다. 이 가이사는 로마 공화정 말기에 집정관으로 활약을 하다가, 로마가 황제정으로 바뀔 직전의 인물이다. 이 가이사가 세운 수많은 혁혁한 공으로 인해, 로마는 공화정을 마감하고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으로 나아간다.
가이사는 로마의 제1대 황제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시작을 그가 다 닦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애썼다. 이후 삼두정치가 진행되다가 마침내 그중 1두인 '옥타비아누스'가 추후 제1대 황제가 된다. 이후 모든 로마 황제가 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칭호를 사용한다. 가이사는 '카이사르'의 발음이다.
성경, 곧 신약을 잘 살펴보면 5명의 로마 황제가 등장한다.
🧒 아우구스투스 (제1대 로마황제, BC 27~AD 14)
옥타비아누스다. 옥타비아누스 이야기는 반드시 클레오파트라와, 또 율리어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가 함께 등장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 링크를 참조하라. 그는 최대의 정복자요, 입법자였으며, 대 건축가이면서도 사제였다. 추후에는 위대한 신으로 연결되었다. 이 '위대한 신'이 바로 '가이사의 것'과 연결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2장에는 아우구스투스를 '아구스도 가이사'로 말했다. (눅 2:1)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곧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통치자인 그가 호적을 하라는 명을 내린다.
예수께서 여전히 모친의 태중에 있을 때,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이었기에 살던 곳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가게 된다.
👦 티베리우스 (제2대 로마황제, AD 14~37)
제1대 로마황제의 양아들이다. 로마의 많은 황제들은 양아들(sonship)을 뒀다. 혈연에 따른 직계 연결보다는 당시 최고의 칭찬과 영광을 얻던 자를 양아들로 삼아 황제를 이어나갔다. 그게 로마의 독특하면서도 지혜로운 승계 방식이었다. 티베리우스가 양아들로 낙점되기 전, 수많은 경쟁자가 있었다.
티베리우스의 치적에 관혀 여러 말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확실하고 중요한 점은 바로 당시 그 자신은 몰랐겠지만 최대의 종교라 할 수 있는 기독교의 발흥,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가 시작 및 부흥을 이뤘다는 시대라는 점이다.
신약에서는 누가복음 3장에 나오며 '디베료 가이사'로 나온다. (눅 3:1)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갈리리 호수 서쪽 마을의 이름이 또한 디베랴(티베리아스)로 티베리우스 황제에게서 따왔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이곳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잡이 하던 제자들을 찾아오는 요한복음 21장의 장소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뒤, 이곳 디베랴가 유대문화의 중심지로 변모한다. 나중에는 미쉬나가 편찬되기도 하고, 탈무드도 이곳에서 완성되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말씀의 당시, 가이사는 바로 이 티베리우스 황제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는 상징적일 뿐 지상의 모든 권력의 집중자, 모든 통치자를 상징하는 것이 가이사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가이사는 '세상 임금'이라고 본다.
👱 네로(제5대 로마황제, AD 54~68)
그렇다. 폭군 네로를 말한다. 3대와 4대는 보통 칼리쿨라와 크라우디우스라고 말한다. 네로는 모친의 죽음 전까지는 광적인 성품을 억제시켰다. 늘 자신을 예술가로 생각해왔다. 모친의 죽음 이후, 아들도 아내도 다 죽인다. 모든 것을 퍼모먼스하려고 했고 로마 군중을 항상 생각했다.
역대 모든 황제들이 로마에 머무르지 않고 변방을 돌아다니는 등, 제국을 넓히는 일을 했다. 그러나 네로는 로마에만 머물렀다. #가두리효과 라고도 할 수 있다. 온갖 폭정과 방화, 사치, 특히 그는 기독교인들을 죽이고 박해하는데 매우 힘썼다. 모든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려 했다. 네로는 로마에 큰 불을 지르며 예술가적 기질을 뽐내려 했다. 그러나 그건 광기였다. 광기도 이런 광기가 없을 정도였다. 끝은 자살. 얼마나 네로가 욕을 먹었던지 네로를 향해서는 '가이사'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았고 아우구스투스 영묘의 매장도 거부되었다.
네로라는 이름은 성경에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시대, 곧 사도들의 활동하던 시기의 로마 황제는 네로였다. 네로가 다스릴 때에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한다. 빌리보서 4장의 ''가이사 집 사람'은 네로의 때이니, 엄청난 박해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황제의 폭정에도 이겨내며 신앙을 가졌던 그들이다. 바울을 그들을 축복하고 격려하는 편지를 쓴 것이다.
👨 도미티아누스 (제11대 로마황제, AD 81~96)
베시파시아누스 황제의 친아들(둘째. 첫째가 10대 황제인 티투스)이다. 우선 베시파시아누스를 잠시 살펴보자. 그에게 좋은 황제의 별명이 붙는다. '로마 최초의 평민 황제'다. 그간 대부분의 황제가 원로원 출신이었으나, 그는 평민이었다. 그러나 원로원을 매우 존중해줬다. 다양한 사람을 엘리트로 뽑는 등 인재활용의 최고 전문가였다.
콜로세움도 이때 세워졌다. 즉 교육에 관해서 유명한 황제였고, 사람들의 요구와 로마의 내일을 위해 애썼기에 '로마 최고의 황제'로도 불리운다. 베시파시아누스는 관용, 적응, 실용, 창조의 핵심 개념을 늘 적용해왔다.
형 티투스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황제가 되었다. 도미티아누스도 얼마되지 않아 암살을 당한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와 신약의 연결점은 사도 요한이다. 그가 밧모 섬에 유배되었을 때 통치한 황제가 도미티아누스다.
자, 이상으로 네 명의 황제가 신약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 1명이 더 있다. 바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이다.
🤴 콘스탄티누스 대제 (AD 330~337)
로마 최초의 기독교 황제이다. 기독교 국가라는 절대 과업을 성취했다. 아울러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을 세워 로마의 동쪽으로의 방향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모친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된 것은 유명하다.
일요일의 개념, 이스탄불의 유명세, 그리스도의 보편화 는 결국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떼레야 뗄 수 없다. 로마를 정복하면서 계속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 임을 알렸다. 정치적인 후원을 얻기 위한 계획이라기보다는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개종했음을 알리려 했다.
아우구스(아우구스투스Augustus, BC31)의 승리로 네로가 죽을 때까지 로마제국의 권력을 장악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케사르(Gaius Julius Caesar)의 성 인데 아우구스투스에 의하여 로마제국이 조직된 후에는 모든 로마황제에게 붙여진 칭호가 되었다. 성경에는 직접 거명된 3명의 가이사와 직접 거명되지 아니했지만 2명의 관련된 가이사가 있다.(행25:8,10,11,12, 21, 26:32, 27:24, 28:19)
① 아구스도(옥타비아누스)(눅2:1) BC27~14)
② 디베료(눅3:1) BC14~AD37)
③ 글라우디오(AD41~54)(행11:28, 18:2)
④ 네로(빌4:22) (베드로와 바울 순교AD54~68)
⑤ 도마타아누스(AD8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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