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조 운동 20년. 부모형제 내팽개치고 살면서 내가 이 바닥에서 온몸으로 굴러온 게 20년이 넘었는데, 두렵더라도 나부터 돌아볼 때가 되지 않았나.”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조선소의 유일한 ‘처녀 용접사’였던 김진숙(47)씨. 봉제공장 시다, 시내버스 안내양, 해고통지, 출근투쟁, 대공분실, 무자비하고 끝없던 폭행, 수배 5년, 두 번의 감옥살이…. 김지하의 팍팍한 〈서울길〉을 연상케 하는 개발독재시대의 서럽고 고단했던 한 ‘공순이’의 인생얘기가 〈소금꽃 나무〉(후마니타스)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김진숙은 그러나 ‘서울’이 아니라 부산으로 갔다. 학교 월사금도 제대로 낼 수 없는 강화도 가난뱅이집에서 태어나 중학생 때 가출했고 자살도 기도했다. 열대여섯 때 살아보겠다고 부산까지 질질 끌고 간 가출 보따리엔 그래도 참고서가 가득했다. 꼭 대학생이 돼 지옥에서 탈출하려고.
그래서 소원을 이뤘나? 대한조선공사(한진중공업 전신) 입사 얼마 뒤 몇년을 별렀던 대입검정고시를 위해 방송통신고등학교 입학용 재직증명서를 떼러 간 그에게 하늘 같은 과장님은 말했다. “회사가 오데 자선사업 하는 덴 줄 아나? 니 공부하라고 회사에서 비싼 밥 멕이고 월급 주는지 아나?” 노무과 대리는 비웃었다. “방통고 나온다고 니 인생에 꽃이 필 거 같나?” 봄부터 가을까지 용접공들 등에 핀 것은 땀이 말라붙은 허연 소금꽃이었다.
대우실업 봉제공장. 축축하던 방에는 빈대가 들끓었다.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등 오사리잡탕들이 모여 있던 그 방에는 애초 그들이 고향을 떠날 때 싸들었던 보따리보다 더 컸을 청운의 꿈이 슬라브 벽에 얼룩진 빈대 핏자국처럼 흔적만 얼룩덜룩 남기고 있었다.”
가난·가출·자살기도…조선소 입사
“등에 땀 말라 소금꽃 피도록 일”
‘전태일 평전’ 읽고 노동자 ‘개안’
‘경총’ 복직 반대…21년째 투쟁중
다시 해운대 백사장에서 아이스크림 장사, 신문배달, 우유배달, 샴푸와 주방세제·정수기 외판원으로 떠돌았다. 가방공장에도 들어갔다. 그때가 18살. 그리고 “속옷 구석구석까지 홀딱 벗고 항문까지 몸 검신” 당한 김해에서 부산 충무로까지 가는 122번 버스 안내양. 그 다음이 대한조선공사. (1981년 7월1일) 21살 그의 운명은 다시 크게 회전했다. 거기서 그는 “빨갱이”, “자생공산주의자”가 돼 노동해방에 눈떴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난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 꺼이꺼이 지리산 계곡처럼 울었다.” “내가 곧 그들”이라는 사실이 더 이상 부끄럽지도 치욕스럽지도 않았다. 같이 살아야 된다는 생각, 내가 달라져야 그들이 달라진다는 생각, 그들이 딛고 선 땅이 변해야 내가 딛고 선 땅도 변한다는 생각, 인간이 참 고귀한 존재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1986년 그때까지 이름뿐이던 어용노조 대의원이 됐고, 그해 26살이던 그와 27살이던 박영제, 28살이던 이정식 세 사람이 ‘대의원대회를 다녀와서’라는 유인물을 배포했고 도시락투쟁, 생활임금 투쟁이 시작됐다. 최초의 단결이었고 최초의 승리였다. 부서이동 명령을 거부하자 해고통지서가 날아왔다. 1986년 7월14일이었다. 그리고 20년을 버텼다. 부산노동자연합 의장을 했고 지금은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다. 겁먹고 애태우던 그들의 부모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2003년 한진중공업 노조 김주익 지회장이 농성하던 크레인 위에서 129일 만에 목을 맸고 2주 뒤 곽재규가 도크에서 투신했다. 그들의 희생으로 한진중공업 해고자 모두가 복직됐다. 박영제, 이정식도 2006년 1월1일 50살이 다 돼 복직했다. 그러나 김진숙은 거부당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반대한다는 게 이유였다.
세상 별 바뀐 게 없다. 적어도 노동자들에겐.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 한승동 선임기자 <한겨레 2007/05/22>
전태일과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 김주익 열사 추모사
작년에 한진에서 밀려난 아저씨를 우연희 길에서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30년 일해 온 일터에서 명퇴란 이름으로 강제로 밀려난 아저씨는 술이 한잔 들어가자 바갗ㅇ수 위원장 이야기를 하며,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 아저씨가 자꾸 미안하다며 울었습니다.
50년이 넘은 사내가 10년도 더 지난 일로 술잔에 눈물, 콧물을 빠뜨리는 걸 보면서 우리 모두에게 박창수란 이름은 세월의 무게로도 덮을 수 없는 아픔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박창수 하나만으로도 우린 무겁고 아픕니다.
두번 쨉니다. 대한조선공사를 한진중공업이 인수한 이후 여섯 명의 위원장 중 두명은 구속 뒤에 해고되고, 한 명은 고성으로, 율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쫒겨 다니고, 두 명은 죽었습니다.
지난 번 위원장 선거가 끝나고 어떤 아저씨가 그러셨습니다. "내는 김주익이 안 찍었다. 똑똑하고 아까운 사람들, 위원장 뽑아 놓으면 다 짤리고 감방 가고 죽어 삐는데,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김주익이를 우째 또 사지로 몰아넣겠노?"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우리가 뭘 그렇게 죽을 죄를 졌습니까? 조양호 회장님, 조남호 부회장님, 언제까지 하실 겁니까? 이 소름 끼치는 살인 게임이 앞으로 몇 판이 더 남았습니까?
LNG 선상 파업으로 김주익 지회장이 구속됐을 때 인권 변호사 이름을 팔아 그를 변호했던 노무현 대통령 각하! 노동자의 가련한 처지를 팔아 따 낸 권력의 맛이 그렇게 달콤합디까? 조중동 그 찌라시들의 꼬붕 노릇이 그렇게 안락하더이까? 대기업 노조가 나라를 망친다 했습니까?
21녀 된 노동자의 임금이 105만 원. 세금 때면 80만 원, 그마저도 가압류로 12만 원. 129일 크레인에 매달려 절규를 해도, 늙은 노동자가 88일 애원해도, 청와대. 노동부. 국회의원 누구 하나 코빼기 내미는 놈이 없었습니다.
동지 여러분 죄송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민주노조 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 교도소 짬밥보다 못한 냄새나는 꽁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던 도시락 그냥 물 말아서 먹고, 불똥 맞아 타들어 간 작업복, 테이프 덕지덕지 넝마처럼 기워 입고 체감온도 영하 수십도 한겨울에도 고양이 세수해 가며, 쥐새끼가 버글거리던 생활관에서 쥐새끼들처럼 뒹굴며 그냥 살 걸 그랬습니다. 변소에 버글거리던 구더기들 처럼 그냥 그렇개 살 걸 그랬습니다.
한여름 감전 사고로 혈관이 다 터져 죽어도, 비 오는 날 족장에서 미끄러져 라면발 같은 뇌수가 산산이 흩어져 죽어도, 바다에 빠져 퉁퉁 불어 죽어도, 인명은 재천이라던데 그냥 못 본 척 못 들은 척 살 걸 그랬나 봅니다.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도, 내일에 대한 희망도, 새끼들에 대한 미래 따위 같은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며, 조선소 짬밥 20년에 100만 원 받아도 '회장님,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감지덕지 살 걸 그랬습니다.
노예가 품었던 인간의 꿈. 그 꿈을 포기해서 박창수가, 김주익이가, 그 천금 같은 삶들이, 그 억만금 같은 사람들이 되돌아올 수 있다면, 그 단단한 어깨를, 그 순박하 웃음을,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볼 수 있다면, 용찬이 예란이에게, 준엽이, 혜민이, 준하에게 아빠를 다시 되돌려 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습니다.
자본이 주인인 나라에서, 자본의 천국인 나라에서, 어쩌자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꿈을 감히 품었단 말입니까? 어쩌자고 그렇게 착하고, 어쩌자고 그렇게 우직했단 말입니까?
애비 잘 만난 조양호, 조남호, 조수호, 조강호는 태어날 때부터 회장님, 부회장님으로 세자 책봉받는 나라. 이병철 회장님의 아들이 이건희 회장님으로 재계 순위 1위가 되고, 또 그 아들 이재용 상무님이 2위가 되는 나라. 정주영 회장님의 아들이 정몽구 회장님이 되고, 또 그 아들 정의선 부사장님이 재계 순위 4위가 되는 나라.
태어날 때부터 그 순서는 이미 다 점지되고, 골프나 치고 해외로 수백억씩 빼돌리고, 한 달 수천만 원을 써도 재산이 오히려 늘어나는 그들이 보기에 한 달 100만 원을 벌겠다고 수도 쉴 수 없고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탱크 안에서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우리가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순이익 수백 억이 나고 주식만 가지고 있으면 수십 억이 배당금으로 저절로 굴러들어 오는데, 2년치 임금 7만 5,000원을 올리겠다고 크레인까지 기어올라 간 그 사내가 얼마나 불가사의했겠습니까?
비자금으로, 탈세로 감방을 살고도, 징계는커녕 여전히 회장님인 그들이 보기에, 동료들 정리해고 막겠"다고 직장에서 맞서다 직장에서 해고된 노동자가 징계 철회를 주장하는 게 얼마나 가소로웠겠습니까? 100만 원 주던 노동자 잘라 내면 70만 원만 줘도 하청으로 줄줄이 들어오는 게 얼마나 신통했겠습니까? 철이 노동자를 외치며 수백 명이 달려들다가도 고작해야 석 달만 버티면 한결 순해져서 다시 그들 품으로 돌아오는데, 그게 또 알마나 같잖았겠습니까?
'조선강국'을 위해 한 해 수십 명의 노동자가 골반 압착으로 두부 협착으로 죽어 가는 나라. '물류강국'을 위해 또 수십 명의 화물 노동자가 길바닥에 사자밥을 깔아야 하는 나라. 섬유 도시 대구, 전자 도시 구미, 자동차 도시 울산, 화학 도시 여수, 온산. 그 허황한 이름들을 위해 노동자의 목숨이 바쳐지고 그들의 뼈가 쌓여 갈수록 자본의 아성이 점점 높아지는 나라.
쉰이 넘은 농민은 남의 나라에 가서 제 심장에 칼 꽂고 마지막 유언마저 영어로 남겨야 하는, 참으로 세계화된 나라. 전 자본주의가 정말 싫습니다. 이제 정말 소름 끼치게 무섭습니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이 유서와, 세기를 건너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던 김주익이 죽는 방식이 같은 나라.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국경을 넘어, 업종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리는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그들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저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으므로 깨지는 겁니다. 만날 우리만 죽고 천 날 우리만 깨집니다. 아무리 통곡하고 몸부림을 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를, 피가 꺼꾸로 솟구치는 이 억울함을, 연젠가는 갚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는 고스란히 되돌려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버이날 요구르트 병에 카네이션을 꽂아 놓고 아빠를 기다린 용찬이. 아빠 얼굴을 그려 보며 일자리 구해 줄테니 사랑하는 아빠 빨리 오라던 혜민이. 그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동지 여러분!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2003년 10월 22일 부산역 광장에서 열린 '노동탄압 규탄 전국대회'에서
소금꽃나무 중...
故 배달호 노조원 추모사
- 민주노총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
나이 50 이 넘으면 새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기보단 뿌려놓은 것들을 거둬들여야 하는게 훨씬 자연스러울 나이입니다.
그 나이쯤 되면 주머니 속 불룩한 지갑엔 황금빛 카드가 너댓장 꽂혀있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주눅들만한 장짜리 명함도 서너장쯤 구색갖춰 꽂아놓고 술자리에선 그들과의 인연을 힘주어 역설하며 '글마 내가 키웠다 아이가' 호기를 부려야 술맛도 나는 그런 나이입니다. 명절이면 하다못해 무슨무슨 과장이나 무슨무슨 이사장 명함 꽂힌 굴비두름에 갈비짝이 가슴께 까지는 쌓여야 명절기분도 날법한 그런 나이입니다. 몸이 재산이라며 가시오가피에 홍삼에 옥돌침대에 철따라 체질따라 끔찍히 지몸 챙기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그런 나이입니다.
별로 특별하지 않아도 입이 딱벌어지게 잘나가지 않더라도 대부분 그렇게 산다는데 남들은 그러고 산다는데 그걸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평생을 바둥거려도 그게 안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머니 속에선 카드 대신 유인물이 나오던 사람. 나이 50이 넘어 허구헌날 호루라기를 불고 다니던 사람. 아빠를 잃고 남편을 잃고 아들을 잃고 그렇게 이 모진 세상 남겨질 가족들에게 마지막이라는 이름으로도 애비라는 이름으로도 수도꼭지 고쳐놓는 거 밖엔 남겨줄 게 아무것도 없었던 사람. 이 세상에서 가장 힘겨웠을 마지막 휴가를 보내며 마누라와 함께 저녁을 먹는 걸로 그동안의 고마움과 평생의 죄스러움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수도꼭지 틀 때 마다 물보다 눈물이 먼저 쏟아질 가족들 생각을 그라고 왜 안했겠습니까? 막내딸 끌어안고 "못난 아빠 용서해라" 그게 마지막인줄 알았다면 '아빠, 괜찮아 난 그래도 우리 아빠가 최고야' 천만번이라도 더했을 그 한마디를 평생안고 살아야 할 막내딸의 한을 그라고 왜 헤아리지 못했겠습니까?
구속된 동지들 면회 가서는 어떤 신신당부 보다 더 절박한 통곡을 목 메이게 쏟아놓고 돌아섰던 그 눈물의 의미를 이제사 헤아리며 가슴을 치는 동지들이 평생 안고 가야 할 짐을 그라고 왜 짐작치 못했겠습니까?
살기 위해서 호루라기를 불었던 사람. 제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 10년이나 기꺼이 대의원을 맡았던 사람. 정말 사는 것처럼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 어떤 타협도 할수 없었던 사람.
그날 새벽 걸었다가는 끊고 걸었다가는 끊고 끝내 마지막 숨소리만 흘러나오던 전화. 당신과 함께 새카맣게 타버린 그 전화기를 통해 무슨 말이 하고 싶으셨습니까?
이 땅에 50년을 살았던 당신에게, 50년을 뼈빠지게 상머슴으로 살았던 늙은 노동자에게 전과자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당신이 떠난 1주일 후에도 법정에선 배달호 피고인을 불렀다던 이 기가막힌 나라에 무슨말을 더 남기고 싶더이까?
청년이었던 시절부터 그 날까지 큰 딸이 장성한 세월 20년을 고스란히 바쳤던, 소금꽃 흐드러지게 피고지는 소금꽃나무 당신을, 징계자 가압류자로 내몰던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가 천국에 어떤 말을 더하고 싶더이까?
50년을 살고도 영정에 쓸 사진 한 장 변변히 남길 수 없었던 이 빌어먹을 세상에 무슨 할말이 더 있더이까?
유서에 남긴 마지막 한마디 "미안합니다"
미안하다고 하셨습니까? 평생 노동으로 내려앉은 삭신에 신나를 붓고 다리가 오그라붙고 손가락이 타들어가고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가 숨통을 막아 마지막까지도 그렇게 고통뿐이었으면서도 뭐가 그리 미안합디까? 당신을 그렇게 죽인 자들은 문상 한번 안오는데 뭐가 그리도 미안합디까? 가압류가 생존권을 포기하라는 사형선고 임을 뻔히 알면서도 변변한 투쟁한번 못했던 자들에게 도대체 뭐가 그토록 미안합디까?
얼마나 더 죽어야 합니까? 다음엔 또 누구 차례입니까? 도대체 우린 언제까지 만장을 앞세워야 합니까?
한진중공업에서 30년을 일했던 노동자가 명퇴로 짤리고 모가지가 짤렸는데도 30년 오래된 습관은 새벽 5시면 어김없이 몸과 마음을 깨우는데 그 시간에 일어나 갈데가 없는 게 새삼 또 서럽더라는 강씨 아저씬 보일러공장 하청 노동자가 됐다는데 언놈이 아직도 개혁을 말합니까?
파업 한번에 전과자에 징계에 가압류에 그야말로 합법적인 패가망신이 보장되는 5%의 왕국에서 누가 여전히 복지사회를 떠듭니까?
두산중공업 악랄하다지만 부산에 가면 한진중공업이 그렇고 서울에 가면 재능교사노조,건설운송노조,한국 시그네틱스 노조가 그렇고 목포에 가면 목포카톨릭병원 노조가 그렇고 광주에 가면 동광주병원 노조가 그렇고 울산에 가면 효성 노조가 그렇고 태광 노조가 그렇고 제주에 가면 한라병원 노조가 그렇고 발전노조, 철도노조,장은증권 노조 대우자판 노조가 그렇는데 누가 또다시 변화를 얘기합니까?
배 달호 동지,배 달호 열사여!
혼자 가기엔 너무 먼 길...
새카맣게 오그라붙은 몸뚱아리론 너무 힘겨울..
구비구비 구천길이 아득하거들랑 언제나 처럼 호루라기 불며 앞장서시구려..
동지의 넋이 함성이 될 산자들의 투쟁속에..
자본의 사슬을 끊어내고 노동해방 깃발 휘날리며 당당히 앞장서십시오..
첫댓글 얼마전에 수원에서 강연이 있었는데, 정말 재미있게 잘들었습니다. 아쉽게도 다음날 일정땜시 급히 내려갔지만... 언제 한번 안산에도 초청강연을 함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