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기림의 찬가
8p~9p
진리와 사랑을 찾는 애틋한 편력을 회상하면서 님을 기리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입니다ㆍ
회상이라 해도 영혼이 혼자서 주고받는 플라톤식 사유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같은 독백도 아니며,착잡한 콤플렉스를 속 시원히 털어놓는 정신분석의 카타르시스는 더더욱 아닙니다ㆍ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요 기도입니다ㆍ
남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는 애바르면서도 자기 생활을 고치는 데는 게으른 사람들에게 참회록을 내놓는 문학자들이 있습니다ㆍ
그러나 능력 없는 돌팔이 의원들에게 제아무리 곡진한 솜씨로 병을 그려 보인들 그것이 구원의 문학이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살인한 자선가가 만찬장의 손님들 앞에서 무서운 비밀을 토로하고 달갑게 죽어가는 모습이라든지,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자백을 하고 시베리아 유형길을 떠나는 장면이 아우구스티누스적 수법으로 다루어졌던들 크나큰 아쉬움을 남기진 않았을 것입니다ㆍ
우리는 자유로운 인간이기에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ㆍ
어쩌면 라스콜리니코프보다 더 무서운 죄를 지을 수도, 살인한 자선가 이상의 비밀을 지닐 수 있을는지도 모릅니다ㆍ
이것이 인간의 비참입니다ㆍ
그럼에도 인생에 절망할 수 없는 터무니가 있습니다ㆍ
내 앞에 계시는 전능하신 의사!
하느님은 내가 입은 치명상을 고스란히 보여드릴 때, 그 당장 씻은 듯이 나를 낫게 해주십니다ㆍ
이것이 바로 인간의 구원이며 자아완성입니다ㆍ
죄인이기에 구원이 필요한 우리!
최악의 심연을 거쳐 구원에 이른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1,500년 뒤인 오늘에도 이렇듯 절절한 감동을 주는 것은, 중세 신비가 데레사가 술회했듯이 '고백록을 읽으면서 나는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ㆍ'
하는 심경이 메아리쳐 오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현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안한 정신, 진리에 목마른 지성과 죄 많은 영혼은 여기서 평화와 신앙의 빛과 은총을 얻을 것입니다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