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시집 『입속의 검은 잎』, 1989)
[어휘풀이]
-윗목 : 온돌방의 위쪽, 곧 굴뚝에 가까운 방바닥, 반대말 : 아랫목
[작품해설]
이 시는 어린 시절 홀로 남아 빈방을 지키던 외로움에 대한 회환을 시인 특유의 독창적이고도 개성적인 문체로 노래한 작품이다. 2연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첫째 연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하나는 ‘열무 삼십 단을 이고 / 시장에 가’서 ‘해는 시든 지 오래’서야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내며 돌아오시곤 하던 어머니의 고된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 하나는 어머니가 시장에 가고 나면 ‘찬밥처럼 방에 담겨’져 ‘어둡고 무서워’ 그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어린 시절 화자의 외로움과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두 개의 이야기는 ‘장사 가신 어머니’와 ‘빈방에 담겨진 나’, ‘배추잎 같은 발소리’와 ‘창틈으로 들리는 빗소리’, ‘어머니의 고된 삶’과 ‘나의 외로움과 두려움’이 철저한 대응을 이룸으로써 시인이 유년에 경험했던 가난과 외로움에 대한 회환을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둘째 연에서는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있는 그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을 말한다. 비록 유년의 체험이지마, 그 기억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만큼 고통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그 고통은 세월의 흐름에 힘입어 이제 그리움을 동반하고 화자에게 돌아온다. 이렇게 본다면, 비종결 어미로 끝을 맺고 있는 각 시행들은 모두 마지막 행의 ‘내 유년의 윗못’을 수식하고 있으며, 이러한 문장 구조은 전체 시상을 ‘내 유년의 윗목’에 집중시킴으로써 유년기의 고통이 현재까지 이어지게 하는 효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시는 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소재로 하여 가난했던 유년을 회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박재삼의 시 「추억에서」와 매우 흡사하다. ‘채소장수’와 ‘생선장수’로 각각 구체화되어 있는 어머니의 고단한 삶과, ‘찬밥처럼 방에 담긴 나’와 ‘골방 안에서 머리 맞댄 오누이’로 각각 표현되어 있는 어린 시절 화자의 외로움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추억에서」가 주로 어머니의 아픔에 초점을 맞추어 애틋하면서도 밝은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면, 이 시는 화자의 아픔를 주로 드러내고 있기에 「추억에서」보다 좀더 어둡고 불행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로테시크(grotesque)[인간이나 동물을 풀이나 꽃에 환상적으로 결합시킨 장식 예술의 양식, 괴기하고 황당무계하게 묘사한 괴기미] 현실주의’로 명명되고 있는 기형도의 시 세계는 우울한 유년 시절과 부조리한 체함의 기억들을 기이하면서도 따뜻하고,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시 공간 속에서 펼쳐 보인다. 그의 유고 시집인 『입속의 검은 잎』은 바로 그러한 소재를 바탕으로 하여 죽음과 절망, 불안과 허무를 그려내는 한편, 환상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작가소개]
기형도(奇亨度)
1960년 경기도 연펼 출생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등단
중앙일보사 기자
1989년 사망
시집 : 『입속의 검은 잎』(유고시집, 1989), 『기형도전집』(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