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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뭔가 하실 수 있지 않겠나? 어째서 다 간섭하지 않으시는 것일까?
하나님이 전쟁을 끝내고 사람에게 비극적인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즉시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시지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혼란의 도가니 속에 있는데 왜 하나님은 이를 중단하지 않으시는가?
이런 의문들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아무 답도 얻지 못한 채로 있으면 이런 의문들은 우리의 믿음을 크게 손상한다.
그러나 여기 답이 있다.
그 답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악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보다도 자유의지가 더 귀중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악이 남아 있도록 허용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유의지가 있는 사람으로 창조하셨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사람 이하일 수 밖에 없고 존재의 의미도 없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로보트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과 더불어 관계를 맺기 원하시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도 똑같이 하기를 원하시는데, 이와 같은 질적인 관계를 위해서는 자유의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꼭두각시가 사랑을 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사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는 바로 관계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외롭다거나 심심해서 그러신 것이 아니다.
마음에 뭔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도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충족해 드리지 못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충족시키는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더불어 친밀한 관계 맺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원하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누기 원하셨던 관계는 기계적인 존재와의 관계가 아니다. 넘어지거나 건전지를 교체하면 “사랑해요"라고 소리를 내는 기계적인 인형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일 우리가 꼭두각시 인형처럼한 가닥 줄만 당기면 애정을 표현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하늘에 계신아버지와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친밀한 관계에서 오는 기쁨을 누리기란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사랑을 주고받기로 선택하든지,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는 자유는 관계의 기초가 된다.
자유의지는 악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보다도 더 귀중하다.
도대체 얼마나 귀중한가? 다음과 같은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자.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모든 전쟁과 기아, 재난, 재앙, 폭력, 불의, 이기심, 성도착증, 증오, 분노 등 이 모든 것을 막고 있는 어마어마한 제방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나서 우리는 악이 사라진 세상을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던 악이 거대한 제방으로 차단되었다.
상상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자.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그렇게 모든 것을 끝내 버리는데 그 선택권을 당신에게 주신다면 어떻겠는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거함과 동시에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이 사라질 수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결정하셨다.
우리가 지은 모든 악을 견디는 것이 좋을 만큼 자유의지는 고귀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간 됨, 자유의지를 박탈하는 것보다도 더 잔혹하게 대하실수 있다. 그러나 악취가 나는 모든 악이 사라진 상태가 결코 당신의 자유의지와 마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전도 팀에 있던 어떤 사람이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의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고심한 적이 있다. 당신도 이와 같은 문제로 고심해 보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또 모든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면 어째서 세상에 악을 그대로 방치해 두시는가? 왜 죄 없는 아기들이 죽도록 내버려 두실까? 세상의 온갖 재난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든지, 아니면 사라지게 해주실 수는 없는 것인가?"
이런 의문은 좋은 질문인데, 이런 질문에는 사실상 철학적인 논쟁이 따른다. 가령, “하나님은 모든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모든 능력의 하나님은 아니다”라든가,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이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전능과 사랑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말이다.
▶ 하나님께서 오류를 범하셨는가?
우리는 한편으로 이에 반박할 논증을 찾아보지만 그 말이 확실히 맞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예를 들어 보자.
만일 길모퉁이에 서 있는데 어떤 꼬마가 달려오는 버스에 정면으로 뛰어들었다고 할 때, 그냥 보고만 있었다고 한다면 '살인 방조'라는 죄책감에 빠질 수 있다. 그 꼬마의 죽음을 막는 데 어떤 지식이나 능력이 있었음에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분명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이제 그 사건이 수없이 반복된다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참혹한 일을 보고 계시며 또한 알고 계신다.
인간의 고통에 대해 납득되지 않는 것이 많다.
하나님과 그분의 무한하신 지혜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우리는 극히 제한된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C. S. 루이스가 '고통의 문제'라고 일컫는 문제들에 대해 모든 해답을 갖고 있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지 않고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것으로 우리는 어떤 해답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지만 그와 동일하게 다른 중요한 요인들 때문에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셨다.
우리는 이미 그와 같은 주요 요인의 하나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다.
또 다른 요인이 있는데 여기에는 공의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 같은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다. 그분의 공의는 타협이 없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공정하고 공평하신 분이다.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서 한 가지 전쟁만 없애지는 않으신다. 또 모든 악을 제거하지 않고 하나의 악만 없애는분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악을 사라지게 하신다면 모든 사람의 자유의지를 동결시켜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유의지가 말살될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나누는 진정한 사귐의 기회 또한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그러면 전부 다 없애 버리지 않고? 세상의 악을 없애 버리는 것 같은 가치가 있을 텐데."
예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 멸절하고 의롭지 않은 모든 인생을 없애 버리셨다.
노아 때에 홍수로 쓸어버리신 것이었다. 그리고 여덟 명만 살아남았다.
그렇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최종 해결책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형편과 인간사에 깊이 관심을 가지시는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크게 탄식하신다.
모든 악,모든 불의, 모든 고통, 모든 비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탄식하게 하는 것이다(사 63:10; 시78:40).
그런 하나님은 다만 뒤로 물러가서 악이 관영하도록 그냥 놔두실 수도 없고, 결코 그렇게 하신 적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간섭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악을 저지하는 역사를 멈추신 일이 없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엇이나 필요한 것이라면 다 하신다.
하지만 공의라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친히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넘지 않는 선에서 그분의 능력을 제한하신다(마 23:37 잠 1:24 사 65:1-3).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전능하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다. 또 지혜로우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지혜로 인간에게 한 길이 마련되었다.
그것은 순전히 인간의 자유의지로 이 세상의 속박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공의와 지혜의 방법은 다름 아닌 곧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였다(요 3:16).
▶ 악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우리의 고통은 일시적이다. 누구도 오랫동안 악을 견디며 고통을 참을 수는 없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이 지상의 수명이란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사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고통이란 것도 별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과 영혼에 자유와 평화와 생명을 알 수 있도록 한 가지 길을 제시하셨다. 이것은 고해와 같은 세상에서 신체적인 장애로 사람이 감내하는 그 어떠한 고통보다도 더 놀랍고 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이기심이 미치는 결과에서 벗어날 길을 마련해주셨는데, 그것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 당하게 되는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이제 사람은 생명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잠시 동안 받는 고난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든지, 아니면 영원한 고통과 죽음 속에서 지내든지 할 수 있다.
만일 사람에게 선택권이 없다면 고통이란 것도 영원히 없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자유의지라는 것이 악이 없는 것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에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자유의지를 통해 악을 다루시기로 결정하셨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상관 없이 일하시는 법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시키는 방향에서 역사하시며, 종국에는 이 세상에 악이 완전히 제거되도록 하신다.
▶ 패배자가 아니라 이기는 자가 되라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성장과 성숙을 위한 것이다.
인간이 세상에 악을 가져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악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으로 인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한 차원 더 높이고 악과 싸울 수 있는 사람으로 성숙시키기 위해 타락한 세상과 이 땅에 존재하는 악을 얼마든지 사용하신다.
성경에서 '이긴다'는 말을 쓰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기는 자가 되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악하고 이기적인 세상이 어떤지 알아야 한다.
악과 이기심은 세계 도처에서 항상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락한 세상을 접하고 있고 또 그 결과 때문에 고통당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기심 때문에 눌려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흔들려서도 안 된다. 오히려 악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태연한 마음을 갖는 것이 좋다.
죄악이 관영한다고 불안한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다(히 11:24-26).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악을 사용하시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가지는 그것을 우리 삶의 격전장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혼란과 분노와 원망 속에 빠져서 패배자로 남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고 우리 주위에는 악이 없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것도 원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악이 우리를 압도하지 못하게 하면서 우리 삶을 성숙시키기 위해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내버려 두신다.
세상은 그 상태 그대로 존재하지만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우리는 더욱 굳건해지고 세상에 변화를 주기 위한 각오를 더욱 결연하게 할 수 있는 반면, 우리는 세상에서 연약해질 수도 있고 전쟁에서 패잔병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타락한 세상을 통해 우리를 성숙시키는 데 갖가지 시련과 고난과 역경을 사용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각종 시련과 고난과 역경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마치 이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태연한 척할 수 있다.
어떤 종교는 이와 같은 악에 대해 환영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심지어 어떤 그리스도인은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그런 부정적인 말은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좋지 않은 일은 실제로 존재하며 없어지지 않는다.
만일 기도했는데도 여전히 상황이 좋아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상황을 우리가 성숙해질 수 있는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런 것들을 좋아해서도 안 되겠지만 또한 그것들이 승리를 앗아 가도록 해서도 안 된다.
승리는 마음에 있는 것이다.
승리는 모든 상황에 있어서 이기는 자로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시련과 고난과 역경을 실감하고 이로써 무장되어 있다면 이런 일들을 만나도 압도되거나 눌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지?" 하고 고개를 저으며 말하지 말라.
그 대신 조금 못한 상황을 발판으로 하여 성장하고 성숙하는 기회로 삼으라. 이것이 승리다.
들을 필요가 없는 패잔병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듣는다.
교회가 분열했다든지, 재정적인 압박으로 사역을 못하게 됐다든지, 목사가 젊은 자매와 바람을 피웠다든지, 이런 말들을 들으면 사람들은 충격을 받고 혼란에 빠진다.
그러면 다시 의심이 일기 시작하고 하나님까지 비난한다.
어떤 사람들은 떨어져 나가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그만둔다.
이런 일들은 연약한 사람은 물론이고 기적을 본 사람에게도, 능력 있는 사역에 함께 참여한 사람에게도, 그리고 하나님의 엄청난 믿음의 증거를 받은 사람에게도 일어난다.(대사도 바울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 사형 당함)
▶ 승리는 방탄유리 속에서 안전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타락한 세상의 피할 수 없는 문제들을 실제로 대면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승리를 각종 시련이나 고난, 유혹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구원을 비참한 일이 없어진 것이라고 하면서 환상의 세계를 꾸며 놓고 지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현실적인 문제가 들이 닥치게 되면 속수무책이 된다.
타락한 세상의 현실을 인정하는 만큼 또한 그것을 성숙의 기회로 삼기로 결정한다면 우리는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2-13).
베드로는 매일 핍박과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사는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서신을 보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콜롯세움에서 사자에게 찢김을 당하기 전에 대기하면서 이 서신을 읽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온몸이 기름에 적셔져 황제의 축제에 인간 횃불이 되기 전에 이 서신을 읽었다.
베드로는 권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일을 겪을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 도리어 그런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 우리가 미쳤거나 아니면 뭔가 정말 잘 아는 것이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갖가지 일들이 일어나게 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놀라서는 안 된다.
역경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미쳤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과 이 세상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형편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인용한 베드로전서 말씀은 범사에 우리가 하는 일이나 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한다.
우리의 행실과 반응을 통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성품을 나타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치우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일을 겪고 나서도 즐거워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한결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를 향한 인자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은 결단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실망스러운 일이 닥칠 때마다 우리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승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날 것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야고보서 1:2-4).
여러 가지 시험, 너희 믿음의 시련, 이런 말들은 결코 즐거운 일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쁨으로 여겨야 한다.
누구나 혼란의 시기를 겪을 수 있는데 그 고통이 육체적·정신적·정서적으로 힘겨운 것이라 해도 우리는 “이것이 기쁨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런가? 비참하고 혹독한 시련이라 해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어떤 것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내다.
서양에서는 인내를 거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사회는 편의와 안락에 대한 요구가 늘어만 간다.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일이 있다면 바꿔 버린다.
그런데도 대개의 사람들은 삶 속에서 자신들의 상황을 바꾸려 들지 않는다. 인내를 알고 있는 것 같다.
어떠한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은 시련을 겪는다.
인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승자다.
인내에 대해서는 어떠한 가치로도 평가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인내는 우리에게 마음의 기쁨과 함께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을 우리도 모두 볼 수 있다면 인내가 가져다 주는 부요함을 참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16:23)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서 참된 기쁨으로 기뻐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로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극복하게 하기 위해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형편에 맞는 은혜를 내려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삶을 사셨으며, 십자가를지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셨으며, 음부에 내려가서 사탄의 죄와 죽음의 권세와 능력을 파하셨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매 순간 중보하고 계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로 충분하지 않다면, 또 이것이 어떤 상황이든 인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지 못하고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되지 못한다면, 더 나은 종교를 찾아다녀야 할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아무 일에도 부족함이 없이 온전하고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인내하면 된다.
그리고 인내하면서 “이것이 내게 기쁨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최면을 거는 것도 아니며 마음을 속이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힘든 상황을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성숙의 기회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내하며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언제나 이곳에 임재하여 계신다.
우리를 위해 모든 상황을 축복되고 유익하게 사용하신다.
이것이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이 의미하는 바다.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도록 모든 상황 가운데 언제나 역사하시는 분이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일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인내하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 5:1-5).
▶ 환난으로 인해 즐거워하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환난을 피하라는 말이 아니다.
환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도 아니다.
또한 우리 삶에 찾아오는 모든 부정적인 일에 대항하라는 말도 아니다. 묵묵히 상황을 감내하며 이를 악물라는 말도 아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말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상황이나 견디기 어려운 일, 절망 등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여기서 즐거워한다는 말은 환난 중에도 온전히 기뻐한다는 뜻인데, “환난이 있음에도”가 아니라 "바로 그 환난 때문에 기쁜 것이다.
세상에서는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환난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측량할 수 없는 유익을 생각하면 그렇게 즐거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 세상과 마귀가 몰아 넣을 수 있는 모든 일 가운데 서서 진심으로 기뻐하고 극복해 나가며 인내하는 그리스도인…. 이보다 더한 증인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일들을 우리에게 유익한 일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영적 전쟁이다.
로마서 5장 4-5절에서 인내가 '연단'을 이룬다는 것에 주목하라.
이것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목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연단된 사람이 되도록 이같은 시련을 겪게 하신다.
연단은 또 소망을 이룬다. 그리고 어떤 일에서든지 소망을 발견하기 때문에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담대함으로 어떤 상황에든지 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시다.
예수님처럼 강건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세우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지 않으시는 순간이란 절대로 없다.
이것이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는 이유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명기 8: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 그 이상이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가르치는 많은 교훈이 있다.
이스라엘에게 광야는 매우 실제적인 장소였다.
그곳은 매 순간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며, 과거에 노예로 지내며 누리던, 아주 작은 안락함도 없는 곳이다.
광야는 절대 멋진 곳이 아니다. 그곳은 안식과 휴식의장소가 아니었다.
뜨거운 햇볕 때문에 에너지가 빠져나가고 매서운 광야 바람으로 고통당하는 그런 장소다. 먹을 것이나 물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 태어나고 자라나는 곳, 광야
광야는 죽음의 장소였다. 한 세대 전체가 노쇠해지고 그곳에서 멸망하였다.
그들의 멸망과 동시에 원망과 쓴 뿌리와 두려움과 연약함도 사라졌다.
또한 광야는 생명의 장소가 되었다. 새로운 세대가 이스라엘의 정복자들이 되었다. 이들에게는 강하고 용맹스러운 기질이 있었는데, 이러한 기질은 광야에서 닦인 것이었다.
척박한 광야는 편안한 생활을 전혀 할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광야로 보내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바가 분명히 있었다.
우리 광야는 모래언덕에 간혹 물웅덩이가 있는 그런 곳이아니지만, 이와 똑같이 실제적이다. 광야 생활은 타락한 세상에서의 삶을 말한다.
누구도 예외 없이 이곳을 통과한다.
실제로 생활 속에 많은 광야가 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그 광야를지나가도록 하시는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절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할수밖에 없다.
믿음이 충만하면 광야 길을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일부분만 맞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믿는데도 광야를 통과하게 된다면,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자책하거나 하나님께서 약속을 깨뜨리셨다고 원망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의 거친 상황 속에서 원수마귀를 이기셨다.
우리도 광야를 만나면, 그것을 극복하고 실제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시는가?
첫째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다.
광야 기간에 우리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며,또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인지 알게 된다. 광야에서는 언제나 겸손할 수밖에 없다. 갈수록 의존적이 되어 가고, 또 광야에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형편을 알아차리면 우리는 어려운 시간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아마 기분이 언짢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에서는 그런 초라한 모습은 피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제일 위대한 것은 겸손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광야를 피해 달아나려고 하거나 겸손을 회피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 겸손은 훌륭한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바로 교만이다.
우리는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겸손하게 하신삶을 인내하며 감사해야 한다.
▶ 시험 도상에 있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시는 두 번째 이유는 시험하기 위해서다.
만일 자동차를 산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장기적으로 쓸 수 있겠다고 믿고 사는데, 그것은 이미 충격이나 안전성, 주행성 시험을 거쳤기 때문이다.
실제 차량을 시험할 때는 일반 차량을 사용할 때 받을 수있는 어떠한 환경보다도 훨씬 더 강도 높은 시험을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실 때도 이와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성품이 다 드러나는 상황에 우리를 있게 하심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표출되게 하신다.
시험은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지닌 장 · 단점, 우리 자신에 대한 장·단점이 표출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역의 길로 나가기 전, 먼저 연약함을 다루길 바라신다.
광야에서만이 우리 마음에 담긴 것을 알 수 있다.
40년 동안 주일예배만 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지낼 수 있다.
그러나 광야를 지나가기를 꺼린다면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전혀 알 수가 없다.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을 만난다든지 뭔가 빼앗겼을 때, 혹은 손을 쓸수 없도록 상황이 복잡해졌을 때, 우리 안에서 표출되는 것을 보고 짐짓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여러 가지 반응을 할 수 있다.언짢게 느낄 수도 있고, 분노가 치밀 수도 있고, 불평, 불만이 생길 수도있다. 또 남을 비난할 수도 있다.
교만할수록 우리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교만한 사람은 표출되는 모든 태도나 감정, 반응을 부정하는 반면, 겸손한 사람은 보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책임 있게 그것을 다루려 할 것이다.
▶ 광야에서 해야 하는 일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보여 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라.
어떤 죄나 잘못된 동기들을 용서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회개하라. 또한 필요하면 다른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면서 새로운 습관과 태도를 주시도록 기도하라.
생활 속에서 원수 마귀가 획책하지 못하도록 그를 대적하라.
광야 생활을 하는 것을 결코 거부하지 마라.
광야 생활을 하면서 자신 안에서 드러난 것을 정죄하지 마라.
간단하게 이렇게 말하라.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보여주셔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그것을 고치겠습니다."
사탄의 정죄는 두리뭉실하고 모호하기 때문에 아무런 결실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의 깨우치심은 구체적이고, 즉시 문제를 다룬다.
우리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성령의 깨우치심은 우리가 자유로워지도록 인도한다.
▶ 어째서 그렇게 많은 지도자들이 타락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를 찾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몸에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안정감 있고 성숙하고 한결같은 지도자다.
외부에 보이기 위한 직책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겸손과 능력으로 인도할 지도자가 필요하다.
사탄은 모든 사회 계층의 지도자를 엄습하고 있다.
목사부터 시작해서 정치가, 부모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매일 타락하게 한다.
지도자가 타락하면 무서운 결과가 나타난다.
타락한 지도자라고 꼭 성품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아마도 광야에서 알맞은 시험을 거치지 못했을 것이다.
명성이나 재물, 혹은 자기 신학이 광야의 시험을 받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에 자신을 강건하게 하고 올바로 세우며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게 하는 기회를 놓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도망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어느 날 자신이 광야 한복판에 와 있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만 실족하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라면 광야에 들어가 인내하며 시험 받기를 원하신다.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많은 큰 사람일수록 그가 당하는 시험은 더 클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나는 솔직히 지도력을 약속할 수 있다.
직책은 말할 수 없지만 지도력은 약속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갖추고자 헌신한다면, 또 시험을 거쳐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면, 은사나 배경이나 성격에 상관없이 세상은 당신에게 평탄대로를 만들어 줄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이 지니고 있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이 모범을 보임으로써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다.
교회에는 하나님이 성장시키시도록 자신을 내어 맡긴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들은 전쟁의 열기 속에서도 우뚝 서 있으며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결코 배반하거나 실망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기 위해서 광야를 통과한다. 광야에서는 거의 언제나 지치게 하는 일이 있다.
그곳은 우리가 타락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어떤 죄들에 대한 특별한 성향을 갖는 곳이기도 한다.
따라서 잘못되기가 쉬운 곳이다.
당신이 정욕에 대한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광야에서 정욕이라는 문제에 걸리고 만다. 낙담하여 그만 이 길을 중단하고 죄를 짓고 싶은 욕망이 생길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려는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시기를 결코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기를 바라신다.
만일 우리가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며 신실함을 나타낸다면, 어떠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넉넉히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광야는 성숙해지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광야를 지나갈 때 죄를 거절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어떠한 유혹이라도 견뎌 낸다면, 우리는 참으로 잘 닦인 성품을 갖추고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험에 빠졌다 해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럴 때는 회개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극복해야 한다. 원수 마귀가 우리를 광야 학교에서 빠져나오게 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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