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버랜드 모텔 (Timberland Motel)
- 우리가 드라이덴을 방문하고 밴쿠버로 돌아와서 지인들에게 그곳 이야기를 해주고 우리도 그곳에서 모텔을 해보고 싶다고 하자 모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들이 내세운 첫째 이유는 그곳은 깡촌에다 또 너무 멀고 교통편이 아주 불편하다는게 주 이유였다.
- 그곳에서 한번 밴쿠버로 나오려면 드라이덴-위니펙 은 그레이 하운드 버스로 4시간, 위니펙-밴쿠버 구간이 비행기로 3시간 반 도합 7시간 반이나 걸리는데 위니펙에서 밴쿠버행 연결 항공기 대기시간까지 감안하면 같은 캐나다 땅인데도 불구하고 밴쿠버에서 한국 나오는 시간보다 더 걸린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 그리고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모텔을 하겠다면 모르겠으나 언제고 밴쿠버에 와서 살 예정이라면 그 때 그 모텔을 파는데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필자와는 달리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그런 깡촌은 일단 거주지에서 제외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맞는 말이었다. 뉴욕이나 LA한인타운을 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그들과는 좀 달랐다. 그곳은 그야말로 깡촌이라서 한인들이 많은곳 보다 경쟁이 덜하고 더구나 여름 성수기 장사에 겨울 비수기도 그런대로 고른 수입이 있다면 모텔운영은 땅 집고 헤엄치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이곳 말로 Fortune Teller ( 점쟁이 ) 는 아니었지만 두고 보니 이 예측은 적중하였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 어찌 좋은 일만 생기겠는가? 고진감래, 흥진비래가 아닌가? 아무튼 후에 전혀 예상치 못한 다른 일로 고통을 겪는다.
- 나중에 모텔을 팔아야할 경우도 생각해 보았는데 영업실적만 좋으면 파는데는 큰 문제가 없으리라는게 필자의 생각이었다. 그런 종류의 모텔을 사려는 사람들이 주로 한국인들이지만 실적만 좋으면 중국인 인도인들도 관심을 보일테니 말이다.
- 우리가 드라이덴 답사로부터 돌아온지 꼭 2주만에 C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바로 1번국도( Trans Canada Highway ) 상에 위치한 조그만 모텔이 나와, 1차로 주인과 통화 했었는데 수입이 꽤 짭잘한 곳이란다. 필자는 1분 1초라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2주전에 갔던 길을 되짚어가며 드라이덴에 도착하니 역시 밤 10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그날도 C사장의 호숫가 궁궐 (?) 에서 묵으며 우리는 다음날의 작전계획을 세우노라 잠을 설쳤다.
- 이튿날 오후 1시경 ( 이 때가 하루 중 모텔이 가장 한가 할 때임 ) 그 팀버랜드 모텔 ( Timberland Motel ) 을 찾아가 주인 부부와 간단히 대화를 나눈후 그들의 안내로 모텔을 둘러보고 가격도 체크하고 구입 의사가 있음을 알렸다.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그리고 지난 5년간 그 모텔의 재무제표를 작성한 회계사도 만났다. 주인도 믿을만 했지만 회계사는 더욱 더 믿음직 했다.
-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확인하면 끝이었다. 필자가 주인에게 물었다. “이렇게 잘되는 모텔을 팔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안 주인이 기다렸다는듯이 말 해준다. “ 그건 애들 때문입니다. 이제 큰 애가 초등학교 3학년, 둘째가 초등학교 1학년이니 그 애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며 그들에게 추억을 만들어 줄 때 입니다. 앞으로 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모텔을 하다보면 도저히 그런 시간을 낼 수 없어요. 정선생네는 그런 부담이 없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 더 간곡히 부탁드릴 사항이 있는데 들어 주셔야 합니다. 이 모텔을 팔고난 후에도 이곳에서 거주하실 예정이라고 하는데 우리 같은 초보가 처음 모텔을 운영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 할텐데 그 때 도움을 요청하면 바로 오셔서 도움을 베풀어야 주셔야 합니다. 이것만 약속해 주시면 그걸로 끝입니다.”
- 그들이 언제든지 요청만 하면 기꺼이 우리를 돕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우리는 가 계약을 한 상태로 다음날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법적절차를 밟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 변호사는 바로 C사장네 모텔 인계인수를 도와주고 그 동네 유일한 한국인 마 선생을 C사장에게 소개해준 번즈 변호사(Mr. Burns) 였다.
- 그에 의하면 이제부터는 법인을 바꾸는 법적절차를 진행하는데 보통 2개월이 걸리며 그게 끝나야 새 법인 명의로 은행구좌도 틀 수 있으며 대출상담도 그 때야 가능하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법인등록이 끝나기 전까지는 필자가 그곳에서 할 일은 없다는 이야기 였다.
- 그날 밤은 거의 내것이나 다름없는 팀버랜드 모텔에서 허룻밤을 묵기로 했다. 주인 내외는 영업을 해야하니 함께 식사도 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C사장네도 바빠 우리는 마선생 부부와 그곳의 유일한 동양식당인 중국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 워낙 작은 고장이라 마선생 부부도 팀버랜드 모텔을 잘 알고 있었으며 우리가 그곳을 인수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하자 아주 잘 했다고 했다. 장사가 잘 되는 모텔이며 남편은 독일계로 위니펙 출신이며 부인은 그곳 토박이로 한 때는 마선생이 근무하는 제지회사에도 근무했었다는 이야기도 해 줬다.
-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모두 믿을만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모텔이 객실 13개 ( 후에 장사가 잘 되어 10개를 증축해서 총 23개 객실이 되었슴) 로 시작 할 때 초대 사장부터 현 주인이 2대 사장, 그리고 우리가 인수 하면 3대 사장이 된다고도 했다. 1대 사장은 모텔로 돈을 벌어 지금은 그곳에서 여행 관련 잡지사를 하고 있단다.
- 아침부터 아내는 이 일은 절대로 그렇게 서둘 일이 아니라고 했으며 그래도 그날로 가계약을 맺자 " 무식하면 용감하다 " 더니 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이 모텔의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잘 알고있는 마선생으로부터 이 모텔은 적어도 망할 (?) 일은 없다는 이야기에 아내는 다소 안심이 되는 눈치였다. 필자 역시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그동안 이 새가슴에 꼬기꼬기 뭉쳐있던 갖가지 우려가 다소 풀어지는 듯 했다.
- 그러자 " 나는 시력 ( 무언가 보는 눈 ) 이 너무 탁월해 큰일 " 이라는 농담을 하다 아내에게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사람으로 낙인 찍힌다. 9시경 식당에서 나와 마선생 차를 타고 팀버랜드 모텔로 가니 NO VACANCY (빈방 없슴) 사인 켜져 있는것을 보고 놀랐다. 1월 중순 영하 20도가 넘는 혹한에 방이 꽉 차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 마선생 부부도 함께 사무실로 들어가니 그들은 이미 서로 잘 알고 있던지라 반갑게 맞이하며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화제를 NO VACANCY 로 돌렸더니 이번주 금.토.일 3일간 방이 다 나갔다고 했다. 하키경기 ( 물론 아이스 하키다 ) 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조금 더 재미있는 시간을 가진후 마선생 부부가 떠나고 우리는 우리를 위해 남겨둔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깔끔했다.
-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다는 말이있다. 오늘 필자가 한 일이 그랬다. 얼른 목욕을 하고 바로 깊은 잠에 빠졌다. 꿈 속에서는 팀버랜드 모텔에 매일 NO VACANCY 사인이 켜져 있었다.
첫댓글 이민살이가 비슷 비슷한 듯 합니다.
수없는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던 초기...
상원사에서 뵌 기이한 보살님께서 방송국 허가는 어렵게나도 오래 걸리고 못하게 될 것이니, 뭔가 먹고 살 거리가 나타나거든 열성으로 하라던 예언을 들었던터라
돈 세다가 지쳐서 쓰러져 잠들 것이란 희망찬 얘기들만 골라 들으며 계약서 사인하고, 인수 이틀 전에 돌아 오기로 가족들 데리고 로키로
떠났던 제 경우가 아련한 추억으로 떠 오르게 합니다.
- 실제로 돈을 셀 수 없을 정도로 장사가 잘되서 푸대에 아무렇게나 넣은 돈을 집에와서 부부가 밤 늦도록 세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알고 있습니다.
- 밴프에서 다 망해가는 선물가게를 거의 공짜로 인수했는데 인수 하자마자 한국인에게 비자면제가 실시되 한국인 관광객이 미어터져 떼돈을 벌고 부부 각자 벤츠를 몰고 다니고 주변 분들의 부러움도 많이 받았지요.
- 25- 6년전 이야긴데 끝은 좋지 않았습니다.
- 쉽게 번 돈은 싑게 나간다. Easy earned, easy gone. 이 말이 꼭 맞는듯.
저희도 그러다가, 콘도 3동이 싹 퇴거하고, 2년만에 다시 입주를 시작할 무렵 리세션으로 연타를 맞은데다
교민사회 단체장의 비리를 막아섰다가, 여러 번 고소 고발까지 당해 다 이기긴 했지만 ....
가게를 반으로 줄여 다시 직접 셑업해 이전하고
무려 14년간 셀폰 버리고 일에 빠져 살았네요.
어느 지방 도시의 축제를 다큐멘터리 제작할 때 였는데, 정말 만원 짜리를 부대에 담아 단상 아래로 밀어 넣데요. 방송않는 조건으로 보여만 주는데 자루가 몇개인지 모를 정도...
시티마케팅으로 축제들 하는 이유!
얼빠진 공무원들이 잘못 끼면 그 수익을 외지인 장돌뱅이들이 다 벌어가죠.
인생을 살다보면 지난일중에 '해볼껄' 하는일이 누구나 있죠
정선생님께선 마음에 하고싶은 일을 꼭 실행에 옮기는 것이 참으로 좋습니다
비록 성공적이든 실패를했든
많은걸 배우는 결과를 낳게되지요
정선생님의 추진력은 보는이로 하여금 힘이나게
합니다 담얘기 기대합니다
- 무엇인가 해야했는데 그 때 걸려든 것이 모텔업 이었지요.
- 너무 재다가 실기하는 경우를 많이 당해 봐서 복불복의 심정으로 시작한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