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 시집 『사랑의 감옥』(문학과지성사, 1991) ..........................................................
드라마를 즐겨보는 사람이라면 18년 전 기혼남성의 사랑에 관한 흔들리는 정체성을 다룬 <푸른 안개>란 주말연속극을 기억할 것이다. 그 최종회 에필로그를 장식했던 시가 ‘한 잎의 여자’다. 원작과는 달리 첫 연을 행갈이로 길게 늘여 엔딩 크래딧 처리했다. 당시 이 드라마는 평소에 멜로드라마를 외면해왔던 40~50대 남성 시청자들의 적잖은 관심을 끌었다. 아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앉게 하였고, 나아가 시청자 의견이란 형식을 통해 적극적으로 드라마에 대한 반응을 표출했다. 반응은 갈라졌다. 불륜 미화와 선정성의 극치라는 비난이 있는가하면. 진솔한 사랑의 감정을 순수하게 잘 그렸다는 찬사도 보냈다.
46세의 극중 성재는 명문대를 나와 부잣집 딸과 결혼하여 순조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처가의 사업체를 맡아 운영하는데 빈틈없고 깔끔한 성격의 그는 외도를 죄악시 한다. 그렇게 앞만 보며 달려온 성재의 인생에 눈부신 23세의 재즈 강사 신우가 나타난다. 아버지를 어린 시절 잃은 그녀는 성재에게서 부성의 느낌에 더한 미묘한 감정을 갖는다. 성재 역시 너무나 맑고 자유로워 두려움이 뭔지조차 모르는 신우에게 빨려 든다. 둘의 사랑은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성재는 신우와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삶을 찾는다. 성공이라 믿었던 많은 것들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아직도 뛰는 가슴을 느끼게 된다.
20대 미혼녀와 40대 유부남의 사랑은 수많은 멜로드라마의 진부한 소재임에도 왜 그토록 ‘푸른 안개’가 큰 반향을 일으켰을까. 과거 ‘간통죄’가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란 점을 환기하면 전통적 윤리와 규범을 깨부순 해방론적 애정관이 적잖게 먹혀들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그래서 남자에게 사랑이란 영원한 로망이며, 사랑이 공유된다면 유부남이란 조건과 나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일까. 가정과 사회적 지위까지 내던진 극중 이경영과 이요원의 사랑에 결실을 맺게 해달라는 많은 남성시청자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이요원을 떠나보낸 이경영은 다 내려놓고 지방에서 조그마한 서점을 운영하며 홀로서기 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사랑이 결혼으로 완결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기에 두 사람을 결합시키지 않았다”고 작가는 말했다. 결혼이 사랑의 완결이 아니듯 사랑이란 반드시 결론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결혼이 감정의 무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20대 여성 시청자의 상당수가 이요원처럼 사랑이 있다면 형식이 중요치 않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가정과 도덕을 가장 소중한 덕목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겐 충격이겠으나 사랑은 제도나 도덕에 앞선다는 입장의 여성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대개는 ‘내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란 이중적인 허위의식을 드러냈다.
모든 남성들이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한 잎의 여자’에 목말라 할까.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은밀한 미숙성에 침을 꼴까닥 삼키고들 있을까. 사람들은 나무껍질을 벗겨 물에 담그면 물빛이 푸르스름해진다고 해서 붙여진 물푸레나무를 공연히 궁금해 했다. 시에서도 유행처럼 물푸레가 등장했다. 드라마 종영 1년 후 ‘푸른 안개’의 주인공 이경영은 극중에서처럼 여대생도 아니고 여고생과의 원조교제가 발각되어 곤욕을 치렀다. 그 여파로 오랜 기간 공중파 방송의 출연을 못하다가 근년에야 그의 무르익은 연기를 본다. 고인이 된 오규원 시인의 이 시를 두고도 말들이 좀 있다.
과연 잠재된 욕망 안에 꽁꽁 가두어둔 판타지만일까. 특정한 ‘한 잎의 여자’가 실존했던 걸까. 그의 재혼 사연이 들먹여지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로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한 잎의 여자’를 불륜의 이미지와 엮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한 잎의 여자’가 갖는 함의와는 다르게 그 아류쯤으로 잘못 인식된 ‘영계’라는 말이 한때 횡횡했다. ‘나이 어린 이성’을 성적인 것과 연관 지어 속되게 부를 때 쓰곤 했는데 인간의 양심을 무디게 하고 마비시키는 말의 다름 아니다. 몇 년 전엔 성 역할이 바뀐 <밀회>란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의 입을 톨해 ‘영계’란 말이 툭 튀어나오기도 했다.
지금은 함부로 뇌까렸다가는 개망신 당할 수도 있지만 과거엔 무슨 보약처럼 인식되던 시절이 있었다. 딸 같은 이웃집 아이를 성폭행하고, 선생이 제자를, 학부형이 교사를, 목사가 어린 여학생 신도를 꼬드겨 욕망을 채우고도 별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성적 자기 결정권을 서로 존중할 수 있다면 설령 개별적으론 가정이 파탄 날지언정 누구든 성숙한 연애를 통해 비로소 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되고 ‘안개’가 걷힌 자아를 보게 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한 잎의 여자’가 아니라 ‘영계’를 탐하는 천박하고 반인륜적인 범죄까지 용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안희정의 아내 민주원 씨의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또 그럴지도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죄가 가벼워지지 않는 것은 그 ‘바람’이 진정한 사랑을 기반 하지 않은 단지 수컷의 ‘가지고 논’ 일시적 욕망의 한 방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상대여성을 유린했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것은 안희정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남성들이 폐기치 않으면 안 될 반인륜적인 못된 야수의 근성인 것이다. 그 생각의 싹을 자르지 않는 한 ‘미투’는 멈추지 않을 것이며, 탄실 김명순과 같은 억울한 삶이 또 다시 방치될 수도 있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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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詩하늘 통신 원문보기 글쓴이: 제4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