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에 대한 모독’(1)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 12장 28절)
이윽고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
예수의 선언은 파격적이다.
“당신이 지금 사탄의 힘을 빌리고 있지 않으냐?”며 공격하는 이들에게 “너희에게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와 있다”고 공표했다.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의 눈앞에 와 있는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말이다.
20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 안에 있으면서도 그 나라를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하고 있다.
예수는 그 이유까지 설명한다.
사람들이 짓는 죄와 신에 대한 불경은 모두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용서받지 못하는 딱 한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성령에 대한 모독’이다.
성령에 대해 모욕적인 말을 하는 것이 ‘성령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해석은 너무 일차원적이다. 그것이 아니다.
‘모독’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블라스페미아(blasphemia)’이다.
무언가를 ‘해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 예수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고 지적한 것은 ‘성령을 해치는 일’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다. 속성이 통한다. 셋이 하나다. 그래서 삼위일체다.
모두 하나님의 위격이다. 다시 말해 ‘신의 속성’이다.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전래했던 초기에는 성령을 ‘숨님’이라 불렀다.
신이 인간을 지을 때 불어넣은 숨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성령을 해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렇다. 신의 속성을 해치는 것이다.
신의 속성에서 어긋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예수는 왜 ‘신의 속성에서 어긋나는 일’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을까.
우리가 짓는 죄와 신에 대한 불경은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해놓고선 말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신의 속성’이 밭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짓는 죄와 신에 대한 불경은 모두 그 밭에서 자라는 오이나 가지, 토마토 정도에 불과하다.
가령 오이나 가지가 썩었다면 잘라서 버리면 된다.
시간이 지나면 밭에서 다시 오이와 가지가 올라온다.
그런데 밭 자체가 망가지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씨앗을 심어도 싹이 트지 않는다.
어떤 농작물도 자랄 수 없다. 토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이와 가지, 토마토를 망치는 일은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밭을 해치는 일은 결코 회복될 수 없다. 이치가 그렇다.
그래서 예수는 “성령을 해치는 일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예수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 12장 32절)
무슨 뜻일까. 농사법이 잘못됐으면 고치면 된다.
그런데 밭이 망가지면 방도가 없다.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예수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표현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다는 뜻이다.
왜 그럴까.
그것이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우주의 이치이기 때문이 아닐까.
[백성호의 예수뎐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