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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5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마르코 16,15-20ㄴ
더 좋은 꿈을 구별하는 법
내가 살고 앞으로 살 세상을 결정하는 것은 나의 ‘꿈’입니다.
이 세상에 산다고 같은 세상에 사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 어떤 사람은 감옥에 삽니다. 세 번의 올스타, 여섯 번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텍사스 레인저스의 짐 선버그가 어느 날 감옥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너는 훌륭한 메이저리거가 될 거야!”라고 하셔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한 죄수가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너는 감옥에 갈 거야!’라고 해서 그 꿈을 이뤄드렸어요.”라고 했습니다.
꿈은 나를 무생물로도, 생물이나 동물로도, 인간이나 하느님처럼 만들기도 합니다.
어떤 자해하던 군인은 자해하면 할 일이 있어 살아있음을 느끼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주 공간에
붕 떠 있는 먼지처럼 느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일이 다 나를 더 높은 행복이나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연예인들은 돈이나 명예만 좇다가 결국 파경에 이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요?
나를 하느님 나라로 이끄는 꿈은 하느님 나라의 지원을 받습니다.
단편 영화 ‘요나’(Jonah)가 있습니다.
움부나와는 사진기를 훔쳐 아름다운 자신들의 마을을 홍보하여 더 큰 휴양지로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의 친구 주마가 음부나와를 촬영하는 그 순간
거대한 물고기가 물 위로 솟아올랐습니다. 음부나와는 이 사진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고
물고기를 보러 관광객이 넘쳐났습니다.
움부나와는 돈과 향락에 물들어갔고 물고기는 그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친구는 떠났고 음부나와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마을은 오염되었고 관광객이 더는 찾지 않는 곳이 되었습니다.
외롭게 바닷가를 바라보던 노인 움부나와에게 그 큰 물고기가 보였습니다.
그는 물고기를 잡아 자기를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물고기와 싸우다 이번엔 물고기에게 먹혀 생을 마감합니다.
물고기는 음부나와의 꿈을 이뤄주었습니다. 그러나 더는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고 그렇게 할 의무도 없습니다. 어떤 아이가 늑대나 원숭이처럼 되고 싶다고
한다면 많은 지원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되고 싶다면 많은 지원이 필요합니다.
저의 대학 친구는 아이 하나인데도 유학을 보내어 매년 1억씩 보내야 한다고 합니다.
더 높은 곳에 살려면 더 높은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더 높은 지원이 옵니다.
이것이 법칙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어떤 약속을 주십니까?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며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약속합니다.
저도 사제로 살지 않았으면 보지 못했을 많은 표징들을 보며 삽니다.
그 표징들을 보며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느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뇌종양이 있는 아기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을 때 그 종양이 싹 사라졌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이러한 표징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끌어내리는 꿈은 그것을 준 놈이 지원해 줄 수 없습니다.
능력도 없고 사랑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높은 꿈을 꿉시다.
더 큰 지원이 오는 꿈을 꿉시다.
그러면 더 완전하고 사랑 가득하고 영원한 능력의 나라에서 이 지상에서부터 살게 될 것입니다.
그 꿈이란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25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언젠가 동남아시아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주최 측에서는 각국에서 온 손님들을 그야말로 극진히 챙겼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남국 특유의 향기 가득한 산해진미가 매 끼니 마다 풍성하게 차려졌습니다.
그러나 맛이 너무도 밋밋했고,그 특유의 향료 냄새 때문에 음식에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주로 맛이 검증된 빵이나 음료, 야채, 과일 쪽으로만 손이 갔고, 제 머릿속에는 매콤하고 칼칼한 한국 음식만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김치, 어리굴젓, 우럭매운탕, 부대찌개, 갈치조림...
겨울 일주일 남짓한 시간인데도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때문에 정말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새삼 선교사 형제들이 우러러 보였습니다.
음식이나 문화, 기후, 환경이 180도 다른 이역만리 타국에서 가장 음식을 비롯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물론이고 수시로 떠오르는 향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일상적으로 포기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그분들이 정말 대단해보였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예수님의 당부말씀에 따라 세상 구석구석까지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해외 선교사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삶의 태도가 무엇일까 생각해봤을 때 아마도 타문화에 대한 관대하고 부드러운 시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 만민들 한 형제,한 동포로 바라보는 만민동포애, 인류 전체가 이웃이요 한 형제로 바라보는 큰마음이 아닐까요?
그런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지칠 줄 모르는 선교열정과 기적을 이루는 힘을 선교사들에게 부여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인간 존재이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세상 모든 사람들을 품어 안을 수 있는 훌륭한 선교사로 거듭납니다.
이렇게 선교사들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협력자인 성령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여러 가지 설명이나 비유를 통해 성령께 대해 설명할 수 있겠지만, 성령은 다른 무엇에 앞서 ‘바람’ 같은 분이십니다.
바람이 무엇입니까?
공기의 흐름입니다.
밀도 높은 고기압에서 저기압을 향해 흘러가는 공기가 바람입니다.
성령도 마찬가지로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움직이십니다.
영원한 생명과 구원, 기쁨, 은총의 에너지로 충만한 성령, 결국 고기압 자리에 위치한 성령께서는 죄와 죽음, 질병과 상처, 좌절과 분노 상태에 놓인 우리, 결국 저기압 자리에 위치한 우리 인간을 향해 내려오십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이 뜨뜨미지근합니다.
신앙생활에 감동이나 열정이 전혀 없습니다.
역동적이고 폭발적이며 뜨거운 하느님 현존 체험도 요원합니다.
그러다보니 적극적인 이웃 선교나 능동적인 복음 선포는 뒷전입니다.
신앙생활은 다분히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협조자이신 성령과의 친교가 활발하지 못해서입니다.
성령께 온전히 내어맡기는 노력의 결핍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 성령과 함께,그분의 인도에 따라 하겠다는 의지의 부족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도 낮추고 그분께 내어드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놀라운 일을 체험할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사랑의 기적을 우리 각자가 계속해나갈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강론>
(2024. 4. 25. 목)(마르 16,15-20ㄴ)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15-20ㄴ).”
1)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명령이기 때문에,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이 직접
‘새 계명’이라고 표현하신 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새 계명’이라는 말은 ‘마지막 계명’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르코복음의 마지막 명령과 요한복음의 마지막 계명을 합해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또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복음 선포는 곧 사랑 실천입니다.>
2)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말고, 사람이신 예수님의 심정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그 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6-38)”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인류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처지였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활동하실 때에도, 승천하신 뒤에도, 여전히 그런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그런 처지에 대한 예수님의 심정은
‘안쓰러움’이었을 것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는, “심판 날이 다가오는데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다.”로 해석되고,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는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회개해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청하여라.”로 해석됩니다.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심정은 ‘안타까움’입니다.
<그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이 바로 “잃은 양 하나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입니다(마태 18,12).>
그런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떠나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심정은,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못 믿어서 걱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믿지만, 그들이 겪게 될 고생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안쓰러워하신 것입니다.
3)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사랑’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도 예수님의 심정과 사랑을 나타낸 말씀으로 해석하면,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는, ‘흐뭇함’으로,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는, ‘안타까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위협이나 경고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즉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심정을 나타내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또는 예수님의 심정을 전하는 일이기도 하고,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의 내 모습’을 보신다면 어떤 심정이 되실까?
흐뭇하실까? 안타까워하실까? 안쓰러워하실까?
나는 지금,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또 내가 사랑하고 있는 주님께 얼마나 ‘기쁨’을 드리고 있는가?>
4) 17절과 20절에 언급되어 있는 ‘표징들’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고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항상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증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함께 일하시면서’입니다.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고,
반대로, 기대했지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아서
실망할 때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체험’과 ‘확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한 14,18).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우리를 외로운 처지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고, 지켜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