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속을 여행한 느낌… 이곳이 '시크릿 가든'
붕어빵엔 붕어가 없듯, 홍릉길에는 홍릉(洪陵)이 없다. 홍릉길은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207번지 일대에 있는 길이 1.2㎞, 너비 20~25m의 왕복 4차선 도로다. 동네로 따지면 청량리·제기동 일대가 대략 홍릉길에 포함된다. 그런데 정작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홍릉’을 치면 청량리나 제기동이 아니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을 안내해준다. 홍릉길에 꼭 붙어 있을 법한 홍릉에 대해선, 설명이 거의 없다.
홍릉길에 홍릉이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오래전에 터만 남기고 멀리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1895년 8월 20일 경복궁 곤녕전에서 시해된 명성황후는 1897년 11월 21일 서울 청량리의 한쪽 대지에 묻혔다. 명성황후의 시신을 모신 곳은 대지가 넓고 푸르렀고, 홍릉이라는 예쁜 이름을 갖고 있었다.
- ▲ 책 향기 사이로 나무 냄새가 솔솔 새어나오는 숲 속 도서관, 동대문정보화도서관.
그렇게 빈 무덤으로 남은 홍릉터 남쪽에는 현재 영휘원이 들어서 있다. 명성황후 시해 후 고종의 계비가 된 순헌귀비 엄씨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로 치욕의 역사를 살았던 영친왕의 아들 이진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워낙 어린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왕족의 무덤이다 보니, 이진의 무덤 숭인원을 굳이 찾아 역사를 기념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명성황후가 묻혔던 홍릉에는 훗날 국립산림과학원(수목원)과 세종대왕기념관이 들어섰고,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한국개발연구원 등 각종 과학연구기관과 영화진흥위원회가 터를 잡았다.
불과 1㎞ 근방의 청량리 일대는 사람들로 바글대지만, 홍릉로와 회기로가 교차하는 삼거리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점점 드물어졌다. 인적 없는 거리에는 나무들만 해마다 꽃을 피우고 살집을 불려나갔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 홍릉에 홍릉은 없지만 꼭 한번 들러볼 만한 산책 코스가 만들어진 이유다. 봄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고, 가을에는 은행나무가 샛노랗게 익어가는 거리, 눈발이 성성한 겨울에는 겨울 숲의 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
- ▲ 하얀 눈을 얹어 고즈넉한 정취를 자아내는 세종대왕기념관.
동대문정보화도서관이 '숲속 도서관'으로 불리는 이유는 자연 친화적인 건물 덕분이다. 책을 보다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열람실 밖으로 걸어 나오면, 그 자리에서 숲 속 풍경을 한눈에 만끽할 수 있다. 내친김에 옥상 야외 체험장으로 올라가면 마치 산 정상에라도 오른 것 같은 뿌듯함이 샘솟는다. 워낙 높은 곳에 지어진 도서관이라 4층 옥상에서 바라봐도 고층 건물 위에 올라선 것처럼 시야가 확 트인다.
교통이 조금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문턱이 높은 만큼 나오기도 쉽지 않으니 도서관의 본분을 지키기엔 안성맞춤이다. 동대문정보화도서관은 한 번 문을 열고 들어가면 좀처럼 나올 엄두가 나지 않는, 굽이진 숲 속에 숨겨진 '비밀 아지트' 같은 곳이다. 길은 높고, 비뚤고, 굽이져 있다.
회기동을 부지런히 오가는 사람들조차 홍릉초등학교 뒤편 언덕배기에 이처럼 멀쩡하게 생긴 현대적인 건물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 역시 어느 쪽으로 나가야 번화가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을 만날 수 있는지 늘 헷갈린다. 도서관 출입문 앞에 사방으로 뻗은 골목길은, 그래서 그 자체로 다양한 여행의 관문이 된다. 위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오솔길과 공원이 있고, 아랫길로 내려가면 생활의 냄새가 흥건한 서민들의 마을이 이어진다.
2006년 문을 연 동대문정보화도서관은 이제 홍릉길 일대를 산책한 후 오래 쉬어가기 좋은 '문화의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신간 도서를 전국에서 제일 빨리 갖춰놓는 부지런한 도서관이기도 하고, 정보화도서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각종 영화와 다큐멘터리 DVD를 알차게 갖추고 있기도 하다. 타 지역에서 온 손님도 굳이 배척하지 않는다. 회원증만 만들면 누구나 쉽게 DVD 룸을 이용할 수 있고, 책도 빌릴 수 있다.
홍릉길 주변을 산책하다 책 향기에 이끌려 이곳에 온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숲 속 도서관에 오래 감금되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빠져나오기 쉽지 않고, 굳이 빠져나가고 싶지도 않은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로 만든 집'같은 도서관이다.
시간을 잊게 만드는 도서관에서 한나절을 보낸 후, 골목길을 터벅터벅 걸어 나오면 잠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한 장면을 체험한 것 같은 작은 착각이 일기도 한다. 그러니까 홍릉로와 동대문정보화도서관은 '동화 속 여행'이 가능한 낭만적인 '시크릿 가든'인 셈이다.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에서 하차했다면 2번 출구로 나와 세종대왕기념관 방면으로 직진. 도보로 20~30분, 버스로 5분가량 걸린다. 지하철 1호선 회기역 1번 출구로도 이동 가능. 홍릉초등학교 앞에서 하차한 후 표지판을 따라가면 된다. 도서관을 중심으로 다양한 골목길 탐험이 가능하다. 수목원을 함께 들를 예정이라면 반드시 주말 4시(하절기 5시) 이전에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