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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 뜰과 출입문의 휘장
출 38:9-20
9 그가 또 뜰을 만들었으니 남으로 뜰의 남쪽에는 세마포 포장이 백 규빗이라
10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이 스물이니 놋이요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이며
11 그 북쪽에도 백 규빗이라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이 스물이니 놋이요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이며
12 서쪽에 포장은 쉰 규빗이라 그 기둥이 열이요 받침이 열이며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이며
13 동으로 동쪽에도 쉰 규빗이라
14 문 이쪽의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요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며
15 문 저쪽도 그와 같으니 뜰 문 이쪽, 저쪽의 포장이 열다섯 규빗씩이요 그 기둥이 셋씩, 받침이 셋씩이라
16 뜰 주위의 포장은 세마포요
17 기둥 받침은 놋이요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이요 기둥 머리 싸개는 은이며 뜰의 모든 기둥에 은 가름대를 꿰었으며
18 뜰의 휘장 문을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짰으니 길이는 스무 규빗이요 너비와 높이는 뜰의 포장과 같이 다섯 규빗이며
19 그 기둥은 넷인데 그 받침 넷은 놋이요 그 갈고리는 은이요 그 머리 싸개와 가름대도 은이며
20 성막 말뚝과 뜰 주위의 말뚝은 모두 놋이더라
출 38:9-20 / [성막 울의 휘장을 만들다] 브사렐은 성막을 둘러칠 휘장을 만들었다. 오른편인 남쪽에는 가늘게 꼬아 짠 베로 길이가 45미터 되는 휘장을 만들어 쳤다. 10) 이 휘장을 칠 기둥을 20개 만들었고 기둥 밑받침도 마찬가지로 20개 만들었다. 기둥과 그 밑받침은 모두 놋쇠로 만들었고 기둥에 달 갈고리와 고리는 모두 은으로 만들었다. 11) 북쪽에 칠 휘장도 길이가 45미터 되게 짰으며 이 휘장을 칠 기둥과 그 기둥을 받칠 밑받침도 20개씩 모두 놋쇠로 만들었으며 기둥에 달 갈고리와 고리는 은으로 만들었다. 12) 서쪽에 칠 휘장의 길이는 22.5미터가 되게 짰으며 그 길이가 남쪽이나 북쪽보다 절반이 짧으므로 휘장을 칠 기둥은 10개 만들었으며 기둥을 받칠 밑받침도 10개 만들었다. 기둥과 그 밑받침은 다른 쪽과 마찬가지로 놋쇠로 만들었다. 휘장을 칠 때 사용할 기둥에 달 갈고리와 고리 역시 은으로 만들었다. 13) 해가 떠오르는 동쪽에는 길이가 22.5미터 되게 휘장을 짰다. 14) 그리고 이 동쪽에 정문이 나 있게 하였다. 문의 한쪽에 칠 휘장을 길이가 6.8미터 되게 만들었으며 이 휘장을 치기 위해서 기둥 세 개를 만들었고 그 기둥 밑에 받칠 밑받침도 세 개 만들었다. 15) 또 문의 다른 쪽에 칠 휘장도 그 길이가 6.8미터 되게 만들었고 이 휘장을 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기둥 세 개와 기둥을 받쳐 줄 밑받침을 세 개씩 만들었다. 16) 이처럼 성막의 울을 따라 둘러친 휘장은 모두 가늘게 꼰 베실로 짰다. 17) 또 기둥의 밑받침은 놋쇠로 만들었고 각 기둥에 달아 휘장을 칠 때 사용할 갈고리와 고리는 은으로 만들었다. 또한 기둥머리를 씌울 덮개도 은으로 만들었으며 울의 모든 기둥에도 은으로 장식을 만들어 달았다. 18) 울 정문에는 자줏빛 털실과 붉은빛 털실과 진홍빛 털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무늬를 놓아가며 길이 9미터, 나비 2.3미터가 되게 짠 천으로 막을 만들어 달았다. 19) 이 막을 칠 기둥을 네 개, 그 기둥을 받칠 밑받침도 네 개씩 모두 놋쇠로 만들었고 막을 치기 위해서 기둥에 달 갈고리와 기둥머리에 씌울 덮개와 그 고리는 모두 은으로 만들었다. 20) 성막을 튼튼하게 고정시킬 말뚝과 성막을 둘러친 울을 고정시킬 말뚝은 모두 놋쇠로 만들었다.
브살렐은 성막 뜰을 만들고 흰 세마포 포장 즉, 흰색 세마포로 성막과 외부를 구별하여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였습니다.
그가 또 뜰을 만들었으니(9-13) 세마포 포장은 가는 모시실로 짜서 만든 담장용 세마포 커튼으로 성막 뜰 주변에 남북으로 100규빗(45.6m)과 동서로 50규빗(22.8m)으로 둘러쳐져 있습니다. 이는 일반 사람이나 짐승의 출입을 제한하여, 성막의 거룩함을 보존하는 담장의 역할을 하기 위함입니다. 놋 기둥(남쪽 20개, 북쪽 20개, 서쪽 10개)은 포장이 넘어지지 않게 하였으며, 받침은 그 기둥들을 든든히 고정시키는데 필요하였습니다. 갈고리는 성막 뜰 포장(커튼)을 걸기 위한 고리나 못이며, 가름대는 기둥이 넘어지지 않도록 기둥과 기둥들을 연결시켜 주는 구실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속전으로 낸 은으로 만들어졌으며(30:11-16), 받침과 기둥, 갈고리와 가름대는 서로 연결되어 광야의 모진 바람을 이겨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뜰의 휘장 문 포장(14-17) 성막 뜰 동편 포장과 그 가운데 20규빗(9.12m) 길이의 문이 하나 있으며 그 양쪽으로는 15규빗(6.84m)씩의 포장들이 쳐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밖에서 성막 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직 그 문을 통과하여야 하는데 이는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요 10:9). 뜰 사면의 포장은 흰 세마포로서, 흰 색상은 거룩함과 순결함을 의미합니다. 광야와 같이 먼지와 바람이 많은 지역에서 성막 뜰의 포장을 흰 세마포로 만든 것은 성막 전체가 거룩하고 성결한 곳임을 알려주는 것으로, 멀리서도 성막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경외심을 갖고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다짐하게 했을 것입니다.
뜰의 휘장 문(18-20) 그 뜰의 휘장 문이란 성막 뜰 동편 입구의 문을 이루는 휘장으로서 이 휘장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장차 구원을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과 영광, 그의 대속 사역 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막을 위한 말뚝은 성막 본체를 덮는 막 가운데 세 번째와 네 번째 덮개를 줄로 잡아당겨 고정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위의 말뚝은 성막 뜰 주변에 둘러쳐진 휘장 기둥을 꼿꼿하게 세우기 위하여 성막 안쪽과 바깥쪽, 기둥 안팎으로 땅에 박혀 있는 말뚝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모든 기둥이 광야의 어떤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고, 능히 서 있을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친밀하고 세심한 은혜를 실감하게 됩니다.
적용: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의 성막은 성막 커텐으로 세상과 분명히 구별되었습니다. 당신의 삶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 믿음의 말뚝은 넘어지지 않는 삶입니까?
칭기즈칸은 사냥을 나갈 때면 늘 매를 데리고 다녔고 친구처럼 여기며 길렀습니다. 하루는 사냥을 마치고 매를 공중으로 날려 보내고, 자신은 목이 말라 물을 찾았습니다. 바위틈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을 잔에 받아 마시려는데 난데없이 자신의 매가 그의 손을 쳐서 잔을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방해하자 몹시 화가 난 칭기즈칸은 칼을 휘둘러 매를 죽인 후 죽은 매를 치우면서 바위 위를 보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죽은 독사가 샘물 안에서 썩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칭기즈칸은 금으로 매의 동상을 만들어 양 날개에 각각 다음과 같은 문구를 새겼다고 합니다. ‘분노로 한 일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설령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더라도, 벗은 여전히 벗이다.’
< 설 교 >
성막 뜰과 성도
출 38:9-20
하나님의 집 성막의 거국적인 건축이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그리고 많은 성막 기물들이 하나하나 만들어져 갔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 그것은 성막을 성막되게 하는 즉 주변과 성막뜰을 구분하는 세마포 울타리 공사가 한창입니다. 가로 45.6미터, 세로 22.8미터의 울타리가 완성되면 성막 뜰이 생겨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모든 성막 공사는 완공될 것입니다. 이렇게 공사가 완공됨으로 인해 생긴 성막 뜰이 어떤 장소이며 그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성막 뜰은 희생을 상징합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물들이 피흘리며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을 통해서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었으며 죄 씻음을 바대고 성막 뜰에 설수 있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뜰에 거하는 무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머물 수 있는 것 역시 피흘린 희생을 통해서입니다. 실로 그 희생은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친히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 그분의 희생은 우리를 거룩한 세마포 안, 곧 거룩한 성도의 반열에 머물게 하시고 하나님께로 담대히 나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희생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결단코 하나님이 구별하신 성도의 무리 속에 거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도,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라는 사실도,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믿지 못하여 의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감히 구원받은 무리에 들게 해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찬송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2. 성도간의 화목을 상징합니다.
성막뜰은 희생을 상징할 뿐 아니라 제사장의 가족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장소로서 화목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곳에는 거룩한 제사에서 물려진 음식물을 놓고 제사장의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며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 인간과 인간의 화목이 전제됨으로서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는 성막뜰에 거하는 성도의 무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성막뜰에 거하는 우리는 매일 매순간 하나님과 화목한 생활을 해야 하며 더불어 주변의 이웃과 화목해야 합니다. 이것일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화목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행4:32)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서로 사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바른 신앙을 견재했을 뿐 아니라 이웃과 사심없는 교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희생을 깊이 기억한다면 적어도 성도간에 불화는 삼가야 합니다. 성막 뜰에 거하는 무리로서 서로 헐뜯고 비방함이 왠 말입니까? 초대교회 성도철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위로 하나님과 화목하며 옆으로 형제들과 화목하는 참성도가 되시길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젠가 주님이 오시는 날 우리를 포함한 모든 세상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 성막뜰에 거한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을 확연히 구별하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막 뜰에 있었다 할지라도 단순희 뜰만 밟고 서 있었던 사람 또한 하나님의 책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뜰에 거하는 사람이 할 바 곧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거룩해지며 이웃과 화목한 생활을 이뤄가야 합니다. 우리는 결단코 잔치집에 참여하긴 하였으나 예복을 입지 않아 쫓겨난 어리석은 사람(마22:11,12)이 되지 맙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의 자리
출애굽기 38장 9~20절 /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1. 예배의 자리인 ‘주의 뜰’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책망이나 비난이나 비판보다는 칭찬과 격려 그리고 소망과 약속을 듣는 것이 훨씬 좋은 법입니다. 누구나 예외가 없습니다. 자기가 잘못했을 때 누군가가 와서 ‘잘못했다. 왜 이렇게 했느냐?’라고 하면 내가 잘못한 걸 알아도 마음이 상합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한 것을 아는데도 와서 ‘괜찮다. 더 잘할 수 있어.’라고 할 때 굉장히 힘이 됩니다.
요즘 올림픽이 진행되고 있는데 어제 한국 여자배구 팀이 세계 13위인데 4위인 터키와 8강전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4강에 올라갔습니다. 한국 팀의 어느 선수가 인터뷰를 한 기사를 보았는데, 자기가 실수를 했을 때 세계적인 선수가 와서 ‘왜 너는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느냐?’라고 할 만한 상황인데 ‘괜찮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선수뿐 아니라 주변 동료들이 모두 ‘괜찮다. 너는 원래 수비 전문이 아니라 공격 전문이니까 네가 잘하는 공격을 해서 점수를 따주면 된다.’라고 해서 굉장히 힘이 났다고 합니다.
사실 어이없는 실수를 하면 팀 전체가 의기소침해집니다. ‘왜 저러나? 왜 저것도 못 받나?’라고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럴 때 ‘괜찮아. 그건 원래 네가 제일 잘하는 게 아니야. 네가 제일 잘하는 걸로 하면 된다.’라고 해주었다는 겁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한국 팀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객관적으로 전력이 떨어지는데 One Team이 되어서 계속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교회가 저래야 하지 않는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 잘못을 하면 잘못한 걸 다 압니다. 누가 모릅니까? 그런데 잘못한 걸 또 ‘왜 잘못했느냐? 왜 그렇게 하느냐?’가 아니라 ‘괜찮다. 다른 것을 잘하니까 그 잘하는 것으로 하면 된다.’라고 해주면 얼마나 용기가 되고 또 얼마나 하나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그런 격려와 칭찬을 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 근거가 되는 말씀이 고린도전서 14장 3절입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고전 14:3)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서 사도 바울이 은사가 많았던 고린도교회에게 은사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12장과 14장이 그래서 ‘은사 장’이고 그 중간의 13장은 ‘사랑 장’입니다. 은사를 사용하되 사랑으로 하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특히 14장에서 방언과 예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방언은 개인에게 유익하지만 통역하지 않으면 교회에 유익하지 않으니까, 사람에 대해서 하는 예언하기를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그 당시 고린도교회가 은사 때문에 무질서했습니다. 이렇게 예배를 하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일어나 막 방언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이 저쪽에서 일어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하고, 그러면 또 다른 사람도 일어나 뭐라고 했습니다. 예배가 너무 무질서했고, 특히 여인들 중 그런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고린도전서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무조건 여자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여성들 중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덕을 세우며’(strengthening), ‘권면하며’(encouraging), ‘위로하는’(comfort) 것입니다. 그러니까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혹시 예언기도를 받은 분이 계신지 모르겠는데, 종종 보면 특별한 은사를 받은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예언기도를 한다면서 이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언기도를 받고 와서 마음에 근심이 되고 괴로워지면 뭔가 잘못된 겁니다. 예언은 항상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메시지입니다. 예언은 저주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너는 전에 죄를 지었는데 그것 때문에 집안이 망해!’라는 건 예언이 아닙니다. 그건 사탄의 메시지이지 하나님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물론 때에 따라 하나님이 책망도 하시고 야단을 치기도 하십니다. 구약을 보면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이 나와서 책망을 했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그것은 결코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망하실 때는 우리가 잘못 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변화되게 제대로 가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예언을 할 때 어떤 책망의 메시지를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 잘못 가고 있기 때문에 빨리 마음을 돌이키게 해서 바른 길로 가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언은 항상 그 내용과 상관없이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메시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무슨 저주하고 괴롭히고 옭아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춘기 청소년이나 청년의 때에 마음이 정의감으로 충만해서 나는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세상은 부조리에 사로잡히고 다 틀렸다고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성경에서 야단치는 말씀을 좋아하게 됩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분노하시는 하나님’, ‘악한 자들을 다 쓸어버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크리스천들 중에서 운동권이었던 학생들이 가장 좋아했던 말씀이 이것입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암 5:24)
그 심판의 칼날이 자기에게는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줄 알고 그 말씀을 그렇게 좋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그룹이 소위 ‘586세대’입니다. 5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을 말합니다(386-486-586으로 변해왔고 곧 686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들이 몇 년 전부터 국회의원이나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대부분 기득권 세력으로 변질된 것을 보며 씁쓸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러한 정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제대로 깨닫는다면,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알아가게 되고 인생의 무게를 느끼게 되면서
그런 심판의 말씀이 다른 사람들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러한 말씀이 무섭게 다가오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삶의 어려움 가운데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그런 무서운 심판과 책망의 말씀이 결코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과 복을 선포하는 것이 참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깨달아 그 말씀을 좋아하고 그 말씀을 붙들게 됩니다.
그러한 말씀 중 하나가 바로 시편 65편입니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라고 시작되는 이 아름다운 시편에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예배와 기도와 결단과 그러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도록 들어 있습니다. 요즘 쓰는 표현 가운데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시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러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표현으로 가득합니다. 그 가운데 몇 구절을 축복을 누리는 마음으로 읽어 보십시오.
“땅 끝에 사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시 65:8-13)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에게 귀한 복을 주십니다. 이것은 정말 기가 막힌 축복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복 주심의 말씀 가운데 우리가 온전히 꽉 붙잡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4절입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65:4)
이것은 참으로 기가 막힌 말씀인데, 앞쪽의 두 가지 표현,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이 그대로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이라는 말은 조금 설명이 필요합니다.
왜 여기서 성소나 지성소가 아니라 ‘주의 뜰’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까? 주의 뜰에 살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당신의 사람을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셔서 거기에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까? 또한 그것이 무엇이기에 거기 살게 하신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표현을 자신 있게 할 수가 있습니까?
‘주의 뜰’이라는 것은 바로 예배의 현장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어떤 종류의 예배이든지, 예배가 일어나고 있는 그 현장이 ‘주의 뜰’입니다. 주일에 주일예배를 드리는 그곳, 수요일에 수요예배를 드리는 그곳, 새벽에 새벽예배를 드리는 그곳이 바로 ‘주의 뜰’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신 사람을 다른 곳이 아닌 주님의 뜰, 즉 예배의 현장에 머물게 하시며 그런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2. 성막의 뜰에 서는 은혜
성막의 구조 중에서 지성소와 성소가 있는 성막 밖에 울타리로 쳐 있는 뜰이 있습니다. 그 울타리의 사이즈는 100×50규빗(50×25미터)이고, 높이는 5규빗(2.5미터) 정도입니다.
“그가 또 뜰을 만들었으니 남으로 뜰의 남쪽에는 세마포 포장이 백 규빗이라” (9절)
“그 북쪽에도 백 규빗이라” (11a절)
“서쪽에 포장은 쉰 규빗이라” (12a절)
“동으로 동쪽에도 쉰 규빗이라” (13절)
한국 규격으로 400평(13,400 sq ft)이 조금 안 되는 공간 한가운데 22평(740 sq ft)쯤 되는 성막이 있는데, 성막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이 바로 뜰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성전의 뜰은 보통 무시하기 쉬운데, ‘성전 뜰만 밟고 간다’는 말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이 아니지만 성경 말씀만큼 영향력이 있는 말 중 하나입니다. 사실 이 말이 잘못된 표현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로 깊이 들어오지 못하고 그저 몸만 살짝 왔다 가는 잘못된 예배를 경고하는 아주 적절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 때문에 성전 뜰을 하찮게 여기는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성전 뜰을 가리켜 예배와 상관이 없고, 아무나 밟을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전 뜰만 밟고 간다.’라는 말 때문에 성전(성막) 뜰까지 무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뜰도 성전의 아주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도 예배의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보통 성막을 말할 때 그것을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합니다.
(1) 성막: 벽과 덮개와 휘장
(2) 집기들: 언약궤를 비롯한 여러 가지
(3) 뜰과 울타리
(4) 성막을 섬기는 사람들: 제사장들
(5) 제사의 진행
우리는 뜰과 울타리가 바로 이 성막의 다섯 요소 가운데 들어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막 뜰에 선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배의 현장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것들이 예배의 내용과 기능을 말하는 것이라면, 성막 뜰은 예배의 현장을 가리킵니다.
요즘 아무리 다양한 예배의 형태가 있다고 해도, 예배의 현장인 것과 예배의 현장이 아닌 것은 분명히 구분됩니다. 예배의 현장은 예배를 드리기 위한 기본 요소입니다. 진짜 예배가 되려면, 그 자리가 예배의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형태든지 예배의 현장에 서 있다는 것은 정말 복된 것입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65:4)
1) 뜰까지 온 것만으로도 복이다
시편 65편 말씀을 통해 이미 확인한 것처럼, 하나님이 택해주지 않으시면 거기에 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전 뜰은 아무나 밟는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뜰만 밟고 간다고 표현하니까 누구나 아무 때든지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동쪽 울타리의 정문에 칠 막은,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모시 실로 수를 놓아 짠 것으로, 그 길이는 스무 자이고, 너비 곧 높이는 뜰의 휘장과 마찬가지로 다섯 자이다.” (18절, 새번역)
뜰은 5규빗(2.5미터) 높이의 울타리로 구별되어 있고, 들어오는 입구도 비록 20규빗(10미터) 정도 되는 넓은 문이기는 하지만, 열리고 닫히는 문이 달려 있습니다. 즉, 아무나 들락날락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이전에 성막 은 받침을 이야기하면서 언급했지만, 예배는 성도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막 뜰, 즉 예배의 현장에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배의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엉겁결에 끌려온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예배하러 온 것이라면, 자신이 예배의 자리에 와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은 사람은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2) 하나님께 가까이 오게 하시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 예배의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가까이하겠다고 하신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복입니다. 예배의 자리인 성막 뜰에 서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아주 가까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반항입니다. 구약에서 대표적으로 반항한 사람이 요나입니다.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그 반대편인 스페인의 다시스로 갔습니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상태를 말합니다.
시편 65편 4절에서 분명히 “가까이 오게 하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오라고 부르시고 실제로 가까이 오게 하심으로 가능한 입니다. 그래서 예배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 73:28)
이 말씀처럼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것이 복입니다. 어떤 것보다도 최고의 복은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죄는 왜 무서운 저주가 됩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 자꾸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고난이 어떻게 복이 됩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고, 그러다 보니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 때문에 가장 큰 복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찬양사역자가 있는데, 찬양을 인도하면서 거의 매번 두 가지 멘트를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라는 말씀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a)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우리에게 복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배의 모든 것 아니겠습니까? 그 두 가지가 가장 실제적인 예배의 축복입니다.
3) 예배의 현장에 있는 것이 복이다
성막 뜰, 즉 예배의 현장에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예배의 현장에 있는 것이 복이 되는 겁니다. 성막의 뜰은 그냥 뜰이 아닙니다. 그곳은 바로 예배의 역사가 일어나는 예배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배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귀하기 때문에, 그 주님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이사를 했는데, 부모님은 이전에 살던 동네에 있는 교회의 장로님, 권사님이셨고 계속 그 교회를 섬기셨고 주일마다 늦게 오셨기 때문에, 저희를 데리고 다니시기보다는 같은 교단에 소속된 동네 교회를 다니게 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상가에 있는 교회여서 포근함과 따뜻함을 느끼기 힘든 분위기였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처음 그 교회에 갔을 때 뭔가 포근함을 느꼈습니다. 그때 제가 있는 반의 주일학교 선생님이 늘 미소를 띤 얼굴로 친절하게 대해주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그렇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때 제가 교회 안에 들어갔을 때, 선생님이 항상 잘해주셔서 너무 좋았고, 교회는 참 좋은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부모님과 함께 부모님이 섬기시던 교회를 다닐 때도 사랑해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실은 그보다도 전 제가 5~6살쯤에 다니던 옥인동의 어느 작은 개척 교회도 그랬습니다. 선생님 한 분이 환한 얼굴로 항상 맞이해주시며 마치 제가 아주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맞아주시는 것이 좋았습니다. 사실 결정적으로 좋았던 것은 당시 구하기 힘들었던 ‘미제’ 캐러멜을 매주 하나씩 주셨습니다. 그게 너무 좋았습니다. 어린 마음에 ‘야, 교회는 정말 달콤한 곳이구나. 좋다.’라고 느꼈습니다. 또 뭔가를 잘하면 하나를 더 주시는 겁니다.
그런 것들을 통하여 교회는 따뜻하고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남았습니다. 우리도 어린이들에게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작은 것 하나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까? 제가 어렸지만 주의 뜰, 즉 예배의 현장에 갔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안 간 아이들은 못 받아먹고 따뜻함과 친절함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갔기 때문에,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따뜻함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셔서 주의 뜰에 머물게 하시는 복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즉 예배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아름다운 역사를 체험하는 참된 예배자로서 참으로 복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