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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으로 천하를 굽어보던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대흠무
력사를 좀 아는 사람들은 대흠무라고 하면 발해사연구에 귀중한 무덤비석과 벽화가 나온 정혜공주무덤과 정효공주무덤에 대한 생각을 곁달아 떠올릴것이다. 대흠무는 바로 그 정혜공주(둘째딸)와 정효공주(넷째딸)의 아버지였다.
사랑하는 딸들을 잃고 비애에 잠겨 조상전래의 돌칸흙무덤과 벽돌무덤을 요란하게 꾸려주고 벽화까지 그리여 지하궁전을 만들어주며 지상에서 못다 누린 행복을 저 세상에 가서 마저 누리도록 해주려고 마음쓴 다심한 아버지의 그날의 정경이 유적의 구석구석에 오늘도 느껴진다.
그러나 대흠무는 아버지이기 전에 자존으로 천하를 굽어보며 발해를 번영의 길에 세운 능력있는 정치가, 임금이였다.
그는 형인 태자 대도리행이 728년에 객사한 후 아버지인 2대 무왕 대무예의 어명으로 태자가 되였다. 737년에 대무예가 죽자 그는 숭경전에서 보위에 올랐다.
대흠무(737-793년)는 력대 제왕들가운데서 보기 드문 장수자로 200여년간의 발해력사에서 4분의 1을 차지하는 57년간의 오랜 통치기간에 정치, 경제, 문화의 여러 부문을 발전시켜 발해를 강력한 대국으로 세상에 우뚝 내세웠다.
대흠무는 집권후의 첫 사업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당시 수도였던 《구국》일대는 천험의 요새이기는 하지만 경제를 발전시키는데서는 일련의 제한성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새 수도로 정한 중경(화룡현 서고성자)일대는 토지가 비옥하고 관개에 편리하여 농업을 발전시키는데 적합하였으며 쇠돌광산이 곁에 있어 철생산을 늘일수 있었다.
또한 대흠무가 천도를 결심하게 된것은 부패한 정치를 일신하고 자기의 통치지반을 확립하려고 한데도 그 목적이 있었다.
발해국의 첫 수도인 《구국》에는 무력으로 고왕, 무왕의 전제통치를 뒤받침해주던 무신들이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있었고 국가권력은 권신들의 수중에 장악되여있었다.
당시의 형편에 대하여 일부 관리들은 《태묘》를 여는 의식을 빌어 대흠무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상소하였다.
… 개국초에 관직을 설치하고 재상을 두어 6부를 거느리게 하였고 감, 시, 창고를 두어 6부를 돕게 하여 제도가 극성하였다. 그런데 법이 오래되고 쇠진하여 법 맡은 자는 선택하여 추천하는 사업을 모르며 군적을 보는 자는 군액을 모르며 지어 호구의 참과 모자람, 돈과 낟알의 많고 적음도 모른다. 감옥소송이 밝지 못하고 가렴주구를 다스리지 못하고있다. 호적을 짜고 법을 만드는 자는 가득하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무릇 6부 백관의 근본은 정사를 하는것이다. 근본이 어지러우니 다스리지 못하는것이다. … 옛날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먼저 기강을 세웠으니 나라에 기강이 있으면 몸에 혈맥이 있는것과 같다.…
야심만만한 청춘의 열기로 정치를 펴나가던 대흠무는 자기 측근들을 추동하여 부패해진 정치실태를 까밝히게 하였으며 그것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국왕의 전제군주제를 더욱 강화하고 통치기구들을 정비보강하기 위한 대책들을 강구하였다. 대왕을 황상으로 높이여 부르게 하고 황제국가에 어울리는 관직, 벼슬등급, 훈급, 작위 및 복장제도를 제정하도록 하였다. 대흠무의 통치기간에 발해에서는 3성(정당성, 선조성, 중대성) 6부〔충부(리부), 인부(호부), 의부(례부), 지부(병부), 례부(형부), 신부(공부)〕제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기구체계가 완비되였으며 직할지에 대한 지방행정구역단위로서 5경 15부 62주가 정비됨으로써 지방행정기구체계도 완비되였다. 이밖에 후국과 속령들에 대한 통치체계도 갖추어졌다.
742년경에 단행되였다고 보이는 중경에로의 천도도 바로 이러한 새로운 통치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였다.
그러나 얼마후에 수도는 다시 상경에로 옮겨졌다.
상경에로의 천도는 이웃한 당나라에서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날 즈음에 거행되였다.
돌궐족계통출신인 안록산은 당나라임금 현종과 그의 애첩 양귀비의 총애속에 은밀히 반변을 준비하고있었다.
대흠무는 동방의 강국인 발해와의 관계를 잘 가지려고 애쓰면서 군비를 증강하고있던 안록산세력을 주시하면서 그들과 본국과의 관계를 리용하여 서부변경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 벌어질 복잡한 사태를 예견하고 천도준비를 다그쳤다.
755년 11월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남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대흠무는 수도를 북쪽의 상경(흑룡강성 녕안시 발해진)으로 옮기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것은 안록산의 란을 계기로 당나라와 있을수 있는 군사적충돌을 미연에 방지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상경은 분지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주변은 장광재령과 로야령과 같은 산들로 둘러싸이고 홀한하(목단강)가 성을 감싸고 북으로 흘러 형세가 험하고 군사요충지로써는 리상적인 곳이였다. 동시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있고 토지가 비옥하며 관개가 편리하여 농경을 발전시키는데도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있었다.
대흠무는 수도를 상경에 정하고 당나라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능동적으로 대처해나갔다.
당나라정부측과 반란군측에서 부단히 사신을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해왔지만 모두 거절하였다. 당시의 복잡한 사태발전속에서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는것은 앞으로의 관계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수 있었다.
대흠무는 《안사의 란》의 후과로 당나라경내에 생겨난 《번진》들과의 관계에도 깊은 주의를 돌리였다. 특히 산동지방에 할거하고있던 평로치청과의 관계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친선관계를 유지하기에 노력하였다.
평로치청의 우두머리인 리회옥(리정기)은 고구려유민출신으로서 765년에 부하장병들의 요구에 의하여 당나라사람인 후희일의 후임으로 평로치청절도사로 되고 그후에 당나라임금의 《승인》을 받았다.
발해는 고구려계통출신의 권력자가 다스리는 번진을 방파제로 리용하려고 하였고 리정기는 당나라조정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자기의 후방안전을 도와주는 원조자로 발해를 리용하려고 하였다.
781년에 리정기가 죽은 다음 그의 아들 리납이 절도사를 스스로 세습하였다.
대흠무는 그들과의 관계를 계속 좋게 가지도록 함으로써 서부국경의 안전을 도모하도록 하였다.
한편 대흠무는 동족의 나라인 신라와 바다건너 일본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785년경에 수도를 동경(청진시 부거 혹은 중국의 길림성 훈춘 팔련성)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발해와 신라사이에는 역참이 개설되였는데 옛 문헌에 의하면 동경소재지인 책성으로부터 신라의 정천군(오늘의 덕원)까지 39개 역참이 있었다고 한다.
그 길을 따라 790년 3월 신라의 사신인 일길찬 백어가 북국(발해를 가리킴)에로 력사적인 행보를 하게 되였다.
대흠무는 통치 전기간 일본을 보잘것 없는 나라로, 일본의 임금을 속국의 제후와 같은 존재로 하대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는 발해에 비교도 안될만큼 뒤떨어져있었기때문이였다.
대흠무는 일본에 가는 사신들에게 국서도 지참시키지 않고 자기의 말을 구두로 전하게 하였으며 혹 문서를 보내는 경우에도 대충하였다. 그래도 일본측은 대흠무의 위세에 눌리워 발해사신들을 후대하여 보내였다.
대흠무가 대국이라고 자처하던 서쪽의 당나라에 취한 《오만》한 태도는 그의 자존심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보여주고있다.
중국의 력사이야기책 《수당연의》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740년대초경이였다. 그때 당나라임금 현종은 양귀비를 무척 총애하며 그의 치마폭에 푹 빠져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지방의 관리들이 임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공물을 올렸는데 도로에 끊길 날이 없었다. 이역의 여러 나라와 종족들도 령물스러운 새와 괴이한 짐승, 기이한 보물과 진귀한 토산음식물들을 가지고 산 넘고 바다 건너 바치러 왔다. 현종은 기뻐하며 멀든 가깝든 모두 손님으로 맞아주게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발해국에서 사신을 보내여왔는데 요란한 토산물은 고사하고 국서 한통만 가지고왔다.
연변의 관헌들이 먼저 글을 보내여 보고하고 발해사신은 며칠후에 수도에 도착하여 관사에 들었다.
현종왕은 소감 하지장에게 관반사(접대사신)의 임무를 맡겨 사신이 온 뜻을 문의하게 하였다.
사신은 통역관을 시켜 《국왕께서 국서를 보내신 뜻을 사신들이 어찌 알리까. 당국 임금께서 글을 펼쳐보고 더 분명히 알게 되기를 바랄뿐입니다.》라고 대답해주게 하였다.
조회때 하지장은 발해사신을 데리고 들어가 임금에게 국서를 올렸다. 합문사인이 전달받고 어전에 가져갔다.
현종왕은 발해사신에게 관사에 돌아가 있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날의 선주관이였던 소경에게 개봉하여 읽게 하였다. 소경은 국서를 개봉해보고 깜짝 놀랐다. 글자는 초서도, 예서도, 전서도 아닌데 글자형태가 기이하여 전혀 알아볼수 없었던것이다.
《발해글자 형적이 모두 올챙이형태 같은데다가 신이 본시 용렬하고 우둔하여 판별할수 없으니 성상께서 밝혀주시기를 엎드려 기다릴뿐이옵니다.》
소경은 땀을 철철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현종왕은 웃으며 시까슬렀다.
《경이 일전에 복랍이라고 읽어야 할것을 복렵이라고 하여 동료들에게 웃음거리가 된적이 있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한자도 모르는것이 많거늘 어찌 하물며 발해글자이겠는가. 재상들에게 보이도록 하라.》
리림보, 양국충 두사람이 임금앞에서 보았으나 눈뜬 소경이였다. 어찌할바를 몰라하는 재상들의 꼴을 본 현종왕은 전문 외국글자를 번역하는 관리들을 불러 보게 하였고 또 조정에 가득한 문무관료들에게 다 보이게 하였다. 그러나 한사람도 아는 자가 없었다.
현종왕은 몹시 노하였다.
《당당한 천조에 숱한 관료들이 있으면서 한장의 발해국서를 종시 한글자도 아는 자가 없단 말이냐! 편지속에 무슨 말이 있는지 모르고서야 어떻게 회답을 할수 있겠느냐. 작은 나라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느냐. 3일내로 상주하지 못하면 조정관원들은 대소를 물론하고 모두 파직이다.》
조회가 파하자 여러 관원들은 답답한 마음을 안고 흩어졌다.
하지장은 관사에 가서 발해사신을 대접하면서 몇번이고 국서사건을 터놓으려다가 부끄러워 꺼내놓지 못하고 한숨을 쉬며 늦게야 집으로 돌아갔다. 우울한 심정에 즐겁지 않았다. 그때 리태백이 마침 하지장의 집에 얹혀있었는데 그 모양을 보고 사연을 물었다.
지장은 국서사건을 이야기하고나서 《이제 임금이 준 기한이 박두하여 매우 급하고 절박한데 상주할길은 없소. 만약 이 글자를 알수 있는 자가 있으면 어떤 사람임을 막론하고 천거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풀어주련만.》 하고 덧붙였다.
리태백은 이 말을 듣고 미소하면서 발해글자도 번역할수 없는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지장은 기뻐하며 임금께 아뢰겠다고 하였다.
다음날 하지장의 상주를 받은 현종왕은 내시를 보내여 임금의 수레로 리태백을 데려오게 하였다. 리태백은 먼곳의 천한 선비가 배운것이 루추하고 귀한 사람들의 눈에 들게 하기에는 부족하니 감히 조서를 받들지 못하겠노라고 거절하였다.
내시는 그냥 돌아가 임금에게 상주하였다.
하지장은 현명한 그가 지난해 과거에 응시하여 떨어진것때문에 서민으로 입조하면 부끄러워 부름에 응하지 않았을것이라고 하면서 특별히 벼슬을 내려줄것을 희망하였다.
재상 양국충과 환관 고력사가 반대하였으나 여양, 왕진, 좌상 리적지 등이 《리태백은 기이한 재사니 신들은 잘 알고있소이다. 페하께서는 속히 부르시여 의심하지 말기를 바라나이다.》 하고 한목소리로 청하였다.
현종왕은 리태백에게 5품의 관과 띠를 하사하고 조정에 들어올데 대한 어지를 전하였다. 하지장이 임금의 명령을 전하며 리태백을 달래였다.
리태백은 하지장과 나란히 말을 타고 대궐에 들어갔다.
리태백을 본 현종왕은 기뻐하며 국서를 보여주었다. 리태백은 국서를 두루 훑어보고 아뢰였다.
《이역의 글자들이 각각 서로 같지 않은데 이것은 바로 발해국의 글자이옵니다. 다만 옛 제도에 이역에서 국서를 올리면 다 중국의 글자체를 따랐고 따로 부함(다른 함)에 본국의 글자로 베끼여 보내군 하였소이다. 지금 발해국이 표문을 갖추지 않고 마침내 국서를 올려 임금께서 보게 하였으니 이미 례를 다하지 않은것은 둘째치고 국서속의 말은 거슬리고 거만함이 더우기 한심하나이다.》
《그 국서안에 요구한것이 무슨 일이며 말한것은 무슨 말이냐? 경이 명백히 짐에게 아뢰여 듣게 하라.》
리태백은 명령을 받자 국서를 들고 임금의 앞에서 중국 당음으로 하나하나 번역해나갔다.
그 내용은 대체로 이러하였다.
《발해 대가독은 당조관가에 이 국서를 부치노라. 너희가 고려(고구려)를 차지한데로부터 우리 나라와 가까와지고 변강군사들이 루차 강역을 침범하였는데 관가의 뜻에서 나온것이리라 생각한다. 내 지금 참을수 없는것이니 관리를 파견하여 국서를 가지고와서 이에 대해 설명하며 장차 고구려의 176성을 우리 나라에 양도함이 옳을것이다. 나에게는 좋은 물건이 있으니 대신 보내줄것이다. 태백산의 토끼, 남해의 곤포, 책성의 메주, 부여의 사슴, 교힐의 돼지, 솔빈의 말, 옥야의 풀솜, 하타미의 붕어, 구도의 오얏, 락유의 배이다. 너희 집에는 다 구분이 있어 1년에 한번 공물을 바칠것이다. 만약 수락하지 않으면 우리 나라는 곧 군사를 일으켜 와서 쳐죽일것이니 또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가 보자.》
리태백은 소리를 높여 류창하게 번역하였다.
현종왕은 국서의 내용을 듣고 낯색을 흐리며 불만조로 관리들에게 물었다.
《발해가 무도하여 곧 고려를 차지하려고 하는데 재력이 다 소모되여 장차 어떻게 이에 응할것인가?》
리림보가 나섰다. 《발해인들이 비록 방자하게 큰소리를 치지만 그 병력을 헤아리건대 어찌 능히 천조에 맞설수 있사오리까. 이제 변장에게 지시하여 방어를 엄격히 하다가 침범하면 군사를 일으켜 치는것이 옳을것이옵니다.》
양국충이 뒤를 받았다.
《고려(고구려)는 멀고 원래 우리 령토의 밖에 있으며 그 군사들과 련이어 병화를 맺어 힘이 모자라는데 다 다루지 못할 땅을 다투는것은 앞으로 변방밖의 여러 성들을 버려두는것만 같지 못하나이다. 페하께서는 오직 힘껏 변방안의 지방을 굳게 지키는것이 편할것이옵니다.》
마침 조정에 있다가 두 재상의 말을 들은 삭방절도사 왕충사는 조심스레 자기 생각을 아뢰였다.
《옛날에 태종왕이 세차례 고려(고구려)를 치다가 재력이 다 소모되였소이다. 고종왕때에 이르러 대장 설인귀가 수십만의 용병으로 대소 수십차례 싸워서야 겨우 얻었나이다. 오늘 어찌 경솔하게 버리는 의견을 용납하리까. 다만 오늘날 태평세월이 오래되여 사람들이 얼마간 전쟁을 잊었으니 만약 다시 전쟁을 일으키면 작은 나라라고만 보고 적을 가볍게 대할수도 없소이다.》
여러 신하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현종은 침묵하며 결정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발해대왕(대가독) 대흠무가 보낸 《거만》한 국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당시 당나라조정의 당황망조한 모양을 보여주는 이야기의 한토막이다. 일부 인물들은 허구이지만 리태백이 발해국서를 번역한 내용은 진실이다. 국서내용에서 고구려의 176성을 양보하라는것은 당시 옛 고구려의 령역을 거의 전부 차지하고있던 발해가 당나라의 《안동도호부》를 페기하라는 요구였다고 볼수 있다. 《안동도호부》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둔 통치기관이였는데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에 의하여 쫓겨나 그무렵에는 연군(의현)에 가있었다. 유명무실한 통치기구로 전락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는 이 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동방에 대한 지배를 유지해보려고 하였다.
발해는 이 원한의 표적을 없애버리려고 하였다. 발해의 강경한 자세는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다시 군사를 일으켜 치겠다는 위협적인 언사에서 찾아볼수 있다.
당나라가 743년에 《안동도호부》를 료서고군성에로 옮기고 756년경에는 아예 철페해버리고만것은 발해의 강경한 자세와 관련되였다고 볼수 있다.
대국이라고 자처하던 당나라를 《너희》라고 하대하며 령토반환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켜 치겠다고 호통식의 편지를 써보낸 발해 제3대왕 문왕 대흠무.
그 위력으로 그는 주변의 여러 종족들을 제압하고 포섭함으로써 령토완정을 이룩하고 국토를 넓혔다.
조상의 나라를 크게 일떠세우리라는 웅지를 품고 청춘의 기백이 넘치는 홍안의 나이에 룡좌에 올라 년호를 《대흥》이라고 정하였던 대흠무. 774년에는 각종 문물제도를 완비하고 국력이 강화되는데 만족하여 나라의 복록이 영구하라는 의미에서 년호를 《보력》이라고 고쳤던 대흠무.
57년이라는 오랜 통치기간에 그가 발해국의 륭성을 위하여 한 일도 결코 적다고 할수 없다. 아마 대흠무자신도 그것을 자부하였기에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이라는 요란스러운 존호까지 괴여올리게 하였으리라.
《대흥》과 《보력》은 년호이고 《효감》은 효행의 덕이 스스로 신인을 감동시켰다는 뜻이다. 유교에서 쓰이는 이 표현의 적용은 대흠무를 존중하고 숭배하며 미화하자는데 목적을 둔것이며 이것을 통하여 그가 봉건적유교사상으로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 근본을 삼았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금륜성법》은 불교에서 쓰는 말이다. 《금륜》은 불교에서 말하는 《삼륜》(풍륜, 수륜, 금륜 혹은 지륜)가운데 하나이다. 금륜은 금륜전륜성왕이 감득한 7보가운데 하나로서 금륜의 전륜성왕을 금륜왕이라고도 한다. 이 륜이 굴러가는 곳이면 그곳에서는 모두 항복하고 귀순하였다고 한다. 당나라 녀임금 무측천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자기의 존호를 금륜성신황제라고 칭하게 했다. 대흠무가 존호에 《금륜성법》을 덧붙인것은 불교를 숭배하고 그것으로 백성을 다스리며 저들의 통치를 유지하려고 한데 그 목적이 있었다.
요란스러운 존호를 괴여올리게는 하였지만 그는 나라의 국력을 강화하고 높은 자존심으로 천하에 발해를 우뚝 세움으로써 그 존호에 어울릴만 한 공적을 세운 정치가이며 우리 민족사에서 자랑할만 한 군주였다.
클릭☞ 백두산현지여행사
첫댓글 대흠무가 현종왕한테 보낸 문서가 발해글로 쓰여있다니 그 당시 발해의 기세 대단하지요!
谢谢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잘 보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초 중 고 대학에 다니면서 국사과목을 필수로 배웠지만
발해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배운적이 없어서
역사가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글은 북한에서 나온 자료인데 제가 정리하여서 올렸습니다 .
정보감사합니다.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 곳이 지금이 연변입니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를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북한에 발해가 우리민족의 역사의 한부분이라고 연구한 자료가 적지 않더라구요.
방가
감사합니다
길지만 너무 좋은 글이라 단숨에 끝까지 읽었습니다.
발해국의 기개를 새롭게 인식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발해의 땅에서 사는것으로 행복감에 젓어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