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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위원회(KBO)는 11월 7일 전병호, 진갑용, 김재걸(이상 삼성), 권준헌, 차명주(이상 한화), 김수경(현대), 김종국(KIA), 박명환(두산), 김원형, 박경완(이상 SK), 노장진(롯데), 이병규(LG)를 프리에이전트(FA)로 공시했다.
11월 17일까지로 돼 있는 원소속구단과 우선협상 기간 안에 7명이 기존 유니폼을 다시 입었다. 해외 진출을 노리는 이병규와 박명환, 팀내 불화를 일으킨 노장진을 제외한 다른 선수들도 친정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더 높다.
구단 입장에서 실패로 점철된 FA 역사는 선뜻 '자유로운' 제안을 하기 어렵게 만든다. SPORTS2.0은 2000~2005년 FA 계약한 선수 43명을 대상으로 최악의 FA 계약 사례 5건(무순)을 선정했다. 이와 함께 FA 선수 43명의 계약 전∙후 성적을 비교했다.
임창용
2005년 삼성과 2년 계약 연봉 총액 18억 원
옵션 10승 이상 때 1승당 1천만 원. 10승 미만 때 -2억 원
BEFORE
2004년 시즌을 마친 뒤 임창용은 기대에 부풀었다. 그의 오랜 꿈은 해외 진출.
이미 2002년 포스팅시스템으로 한 차례 메이저리그 구단 입단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일본프로야구의 신생팀 라쿠텐 골든이글스는 총액 4억 엔을 부르며 임창용을 유혹했다.
1997~2000년에 보여준 임창용의 구위는 ‘한국프로야구 최고’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2001년 선발로 돌아선 뒤 구위와 제구력은 전성기보다 떨어졌다.
1997년부터 3년 연속 구원으로만 등판하며 규정이닝을 채운 혹사가 이유였다.
그러나 2004년 옛 보직인 마무리로 돌아서며 2승4패 36세이브 방어율 2.01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남겼다. 꿈은 갑자기 사라졌다.
라쿠텐의 2년 계약은 스스로 거절했고 입단을 바랐던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다른 투수를 찾겠다”고 통보했다.
2002년 그의 몸값을 65만 달러로 책정했던 메이저리그는 냉담했다.
어쩔 수 없이 돌아온 친정팀 삼성은 2년 18억 원을 제안했다.
‘2년 뒤에 다시 FA 자격을 주겠다(야구 규약에는 4년)’는 조건이 선심 쓰듯 달려 있긴 했지만.
AFTER
원래 임창용은 4년 계약을 할 수 있었다.
그해 삼성이 FA 계약한 4명 가운데 3명은 4년 조건을 제시받았다.
4년 계약을 하지 않은 건 삼성 프런트의 혜안이었다.
의기소침한 임창용의 성적이 급전직하하리라는 점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최고 투수가 배팅볼 투수로 전락할 것이라 예언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계약 전 임창용은 3년 평균 11승4패 13세이브를 기록했다.
FA 계약 기간 중 평균 성적은 3승4패 방어율 6.46이다.
임창용의 1승에 삼성은 무려 3억 원을 지급한 셈이다. 올시즌은 딱 한 경기만 등판했다.
교훈 성취동기를 잃어 버린 선수와 다년 계약해서는 안 된다.
삼성은 18억 원을 허공에 날려버렸지만 2년 계약으로 20억 원 가량은 절약할 수 있었다.
이강철
2000년 3년 계약 연봉 총액 8억 원│해태에서 삼성으로 이적
BEFORE
그 시절 해태를 떠나고 싶어했던 선수는 여럿이었다.
이강철도 그랬다.
해태의 재계약 제안을 뿌리치고 FA 제도가 시행된 첫 해 그는 주저 없이 권리를 행사했다.
1999년까지 이강철은 132승을 따냈다.
10년 연속 10승에 15승 이상도 다섯 차례 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선발투수였다.
그러나 1998년까지 통산 승수도 132승.
잠수함 투수 이강철은 오른쪽 무릎 수술을 받느라 1999년 한 해를 통째로 쉬었다.
그러나 삼성은 이에 개의치 않았다.
성적 보너스 3억 2천만 원을 합쳐 총액 8억 원에 3년 계약을 제안했다.
한 해는 포기해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1999년 삼성의 팀 방어율은 5.16이었다.
노장진과 김상진, 김진웅이 10승 투수가 됐지만 모두 팀을 우승시킬 수 있는 에이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AFTER
4월 한 달을 쉰 이강철은 5월 3일 대구구장에서 현대를 상대로 삼성 선수로 처음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결과는 참담했다.
1회는 무실점으로 막았지만 2회 초에 무려 6점을 내 주고 마운드에서 물러났다.
5월 9일 사직구장에서 롯데를 상대로 두 번째 선발 등판했지만 4회를 버티지 못하고 다시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이강철의 오른쪽 무릎은 다이내믹한 왼다리 키킹을 뒷받침할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즌 3번째 등판인 5월 13일 LG전에서 이강철의 보직은 패전처리로 바뀌어 있었다.
‘믿음직한 선발 에이스’라는 삼성의 꿈도 함께 사라졌다.
이강철은 3년 계약의 마지막 해인 2002년 마무리 투수로 보직을 바꿔 재기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때 이강철의 유니폼은 해태로 바뀌어 있었다.
삼성에서 남긴 성적은 27경기 등판 2승5패. 그리고 2001년 7월 30일 해태로 다시 트레이드됐다.
교훈 잠수함 투수에게 무릎은 생명이다.
홍현우
2001년 LG와 4년 계약. 연봉 총액 18억 원. 성적 옵션 2억 원 별도
BEFORE
2000년 LG는 전 해에 무너진 마운드를 어느 정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시즌 뒤 FA 시장에 나온 투수는 김상진과 조계현 정도. 두 투수 모두 전성기는 지나있었다.
LG의 선택은 타선 강화. 해태에서 FA를 선언한 홍현우는 최고의 카드였다.
2000년 LG에서 300타석 이상 출전한 타자 가운데 오른손잡이는 유격수 유지현 한 명.
홍현우는 LG가 오랫동안 바라던 오른손 강타자였다.
홍현우는 2000년까지 통산 173홈런을 치며 이 부문 역대 7위에 올라 있었다.
2001년 나이는 아직 29살. 타자로서 전성기가 한참 남아 있었다.
프로야구 사상 최고 3루수 자리는 예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LG가 홍현우에게 안겨 준 18억 원은 전년도 FA 최고 연봉보다 무려 10억 원 더 많은 거액이었다.
2000년 이적한 양준혁과 1999년 한화에서 45홈런을 친 댄 로마이어까지 더해 역대 최고의 타선이 구축될 것 같았다.
AFTER
홍현우는 끝내 200홈런 고지를 밟지 못하고 2005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LG에서 4년 동안 친 안타는 129개. 1996년 한 해 동안 때린 147안타에도 못 미쳤다.
시즌 전 해외 전지훈련에서 홍현우는 오른쪽 발바닥을 다쳤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왼쪽 무릎이었다.
전 해 홍현우는 88경기에 출전하는데 그쳤다.
시범경기에서 한화 로마이어와 부딪혀 발등을 다쳤기 때문.
그러나 6월에야 복귀한 진짜 이유는 고질적인 무릎 통증이었다.
당시 LG 지휘봉을 잡고 있던 이광은 연세대 감독은 “무릎 때문에 훈련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제 실력을 찾지 못하고 만 것”이라고 말했다.
FA 계약 전 3년 동안 홍현우는 연평균 타율 2할7푼3리 21홈런 74타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LG에서 보낸 4년 평균 성적은 타율 2할4리, 4홈런, 16타점이다.
교훈 선수들은 입단 협상 중에는 절대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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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음 필중이형은..?
홍현우가 최대 먹튀임을 확신합니다!! ㅠ.ㅠ ㅠ 평균 4홈런은 무슨...3.5홈런이지...
여긴 3명박에 없으니.. 진필중 확률이 높다... 일단 몸값부터 여기있는 선수들과 차원이 다르니..-.-
진필중 없어요 나머지 두명은 박정태랑 또..김기태.. 제 생각엔 김동수도 있어야 할거 같은데요
에라이 X현우... 욕나온다.
우리가 홍현우를 보는 심정이 텍사스팬들이 박찬호를 보는 심정과 똑같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