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무소속이다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올림픽 기간이라 간간이 반가운 금메달 소식이 들려온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면 우리들의 마음에는 애국심이 커져간다. 한 나라 사람이 멀리 외국에 가서 한 분야에서 일등을 하고 있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애국심이 너무 과도해지면 편협한 애국주의나 국수주의에 빠지기 쉽다.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거나 우리 민족은 활 잘 쏘는 DNA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는 것과 같은 선민의식이 여기에 해당한다. 때로는 애국심이 지나쳐 상대편 선수 국가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과 혐오 발언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기도 한다.
흔히 자긍심이 부족한 사람들이 국가나 인종 또는 출신 지역 같은 집단에 매달린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밖에 내세울 게 없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에 사로잡혀 흑인에 대한 테러를 일삼은 KKK단이 교육 수준이 낮은 백인 하층민 사이에서 만들어진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문단에는 이런 식으로 집단에 기대어 작가나 시인을 평가하고 차별하는 일이 아직도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다. 시인이나 작가의 출신을 따지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지면을 통해 등단했는지 그리고 시집이나 작품집을 어느 출판사에서 출판했는지를 가지고 시인이나 작가를 평가하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때로는 출신지나 발표 지면에 따라 A, B, C 등으로 등급을 나누기도 한다. 경계를 넘어 나 아닌 타인과의 소통을 꿈꾸는 문학에서 이런 세태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생지나 출신 대학 같은 한 사람의 소속 집단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자 하는 우리 사회의 병폐가 문학판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람을 그 사람 자신의 특성이나 실력으로 평가하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 붙어있는 간판과 상표로 평가한다는 것은 소외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인간적 이해나 교류보다는 그 사람의 외적 조건을 이용해 보겠다는 사악한 마음이 깔린 속물적 가치관의 반영이기도 하다.
우리가 문학을 하고 시나 소설 등의 작품을 쓰는 것은 바로 이러한 속물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세상의 속물성을 거부하고 나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자라나는 속물적인 생각들을 반성하고 털어내기 위한 정신적 고투가 바로 문학인의 길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그런데 출신과 활동하는 집단으로 문학인을 평가하는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속물성에 스스로 굴복하는 것과 같다. 시인이 시로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으로 말하지 않고 출신지나 활동무대의 후광으로 행세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시인도 작가도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파는 장사꾼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속물적 태도가 문학판에 만연하여 돈으로 문학상을 사는 파렴치나 스스로 자기 시비를 세우는 후안무치한 만행에까지 나아가고 있다.
문학은 오직 작품으로 평가된다. 어떤 시를 어떻게 쓰는지 또 얼마나 진지하게 문학적 성찰을 하고 그것을 치열하게 실천하는지가 시인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항목일 거다. 소설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시인이나 작가의 출신을 알아내 그것으로 시인 작가를 평가하려고 하는 것은 작품을 읽어줄 애정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 작품을 평가할 안목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일이며 자신의 무식과 무능을 감추려는 비겁한 행위이기도 하다.
문학인들이여 간판으로 자신을 치장하지 말자. 금메달은 국적이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실력이 만들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