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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경영 구루 명예의 전당
(입력: 2021.09.10.17:27 / 월간현대경영 2021년 9월호)
Hall of Fame - The Gurus 15 Management Hall of Fame
현대경영 구루 명예의 전당
현대경영 창간 55주년(1966-2021) 스페셜 에디션으로
평생을 한국경영학 발전에 헌신해온 고려대학교 송기철 박사와 김동기 박사가
현대경영에 기고한 ‘한국의 경영자 100인’ 및 ‘한국의 CEO 70인’ 가운데
현대 한국경영사 발전에 역사적 가치가 큰 우리나라 대중소기업 및 벤처기업가 15인을 선정해,
‘현대경영 구루(GURU) 명예의 전당’에 헌정하오니 후학들의 경영지침서로 많은 활용 바랍니다.
CONTENTS
강병중 넥센 회장 / 구자열 LS 회장 무역협회 회장 /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 / 문규영 아주 회장
박유재 에넥스 명예회장 / 박현주 미래에셋 GISO /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 이금기 일동후디스 회장
이학수 삼성 전 부회장 / 정몽규 HDC 회장 / 정몽원 한라 회장 /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
최오길 인팩 대표이사 회장 / 허창수 GS 명예회장 전경련 회장 / 홍완기 HJC 회장
-CEO명 가나다순
현대경영 구루 ① 강병중 넥센 회장 편
넥센 히어로(hero)
실제나이(82세)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이는 강병중 넥센그룹 회장(1939년생)은 동아대 법학과와 부산대 경영대학원을 나와 실업계에서 기업경영을 체험으로 익혀 성공한 자수성가(自手成家)형 기업인이다. 1973년 재생타이어 전문업체인 흥아타이어공업을 창업한 강 회장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시절, 자동차용 타이어를 생산하는 우성타이어를 전격 인수, 당시 부채비율이 6,000%에 달하던 우성을 오늘날 100% 초우량기업으로 평가받는 넥센타이어로 발전시켰다.
1999년 인수 당시의 연간 매출액은 1천806억원에 불과했으나 20년 뒤인 2019년에는 매출액 2조223억원, 영업이익 2천74억원, 직원 4천175명으로 지속가능 타이어 전문기업으로 성장했다. 참고로 넥센그룹 전체 직원은 약 7천500명이다. 위기에 처한 기업을 인수해 10여 년 만에 세계 타이어업계 최고 수준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서게 한 강 회장의 탁월한 경영능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첫째, 강 회장의 인생관에서 회사의 고속성장 비결을 찾아볼 수 있다. 좌우명이 명심보감의 심청사달(心淸事達: 마음이 맑으면 모든 일이 잘된다)이다. 또 골프철학이 ‘천고마비’이다. ‘천천히, 고개를 들지 말고, 마음을 비우면’ 공은 마음먹은 대로 날아간다’는 뜻이고, 이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한다는 자세다. 화끈하고 고매한 인생관과 경영관을 엿볼 수 있다.
둘째, 고무 관련 사업만을 고집하며 업종다각화는 지양한다는 경영철학을 갖고 있다. 단, 부산경남지역 대표방송 KNN을 별도 운영한다.
셋째, 세계 타이어 업계에선 ‘타이어 강’으로 불리며 해외시장 개척에도 적극 나서 오늘날 글로벌 기업으로 키웠다.
넷째, 회사가 발전해 지역과 국가의 경제발전에 기여하면, 국가도 한국기업의 이미지를 높이고 이익을 증대시켜 준다는 ‘두 개의 톱니바퀴’론을 편다. 기업과 국가의 발전이 상호의존, 상호보완 관계라는 것이다.
다섯째, 회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전 임직원들이 회사의 목표와 가치관을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사화합과 노사협동의 종업원관이 애사심과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함양한다는 것이 강 회장의 지론이다.
여섯째, 넥센월석문화재단과 KNN문화재단, 월석선도장학회를 만들어 다양한 사회환원을 해왔다. 또 스포츠산업 발전을 위해 ‘넥센히어로즈야구단’을 후원했다. 넥센타이어 이미지는 국민적 이미지로 고양됐다.
일곱째, 평소 “최고인재가 최고회사를 만든다”는 신념으로 인재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강 회장은 70세가 되던 해부터는 고향 진주와 부산 경남, 모교, 빈곤층 중증환자를 돕는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진주와 부산 경남에는 각급학교와 농촌, 문화예술계 등을 지원하고 있다. 또 선조 숭배를 실천해 문중 재실을 크게 중건했고, 모교인 마산고와 동아대에 장학금과 발전기금, 야구부 후원금 등을 지원해 명문 부활에 앞장서고 있다. 동아대에는 한꺼번에 150억 원을 기증하기도 했다. 또 의료인들과 협의해 빈곤층 중증환자의 수술비와 치료비를 지원할 계획이다. 강 회장은 수출 10억불 탑 수상, 노사협력대상 대통령 표창, 금탑산업훈장 등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강병중 회장이야말로 우리나라 타이어업계뿐만 아니라 부산경남지역 및 한국 경제계를 대표하는 ‘넥센 히어로’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강병중 회장흥아타이어공업 사장회장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넥센 대표이사 회장 KNN 회장
참고자료 김동기 박사 월간현대경영 2014년 1월호 기고
현대경영 구루 ② 구자열 LS 회장 무역협회 회장 편
혁신 없이 미래 없다
‘우리나라의 기업특성은 과연 무엇인가?’ 이 주제는 늘 나의 학문적 관심사였다. 그중 가장 대표적 특성으로 나는 ‘가족경영’을 들고 싶다. 가족경영의 대표적 기업으로는 구인회 회장이 일궈낸 LG그룹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구인회 회장의 초창기 ‘락희(樂喜)’그룹은 크게 성장해 오늘날 LG그룹이 되고, LG그룹은 다시 동업자인 허씨 가문과의 분리·독립으로 LG그룹과 GS그룹으로 나누어졌다. 구씨 가문의 LG그룹은 다시 LG그룹과 LS그룹으로 분리되었다.
2005년 11월 11일, LS그룹이 창립기념식을 개최했다. LS는 LG전선의 새 브랜드로 ‘리딩 솔루션(Leading Solution)’이라는 의미와 함께 ‘LG+GS’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LS는 현재 주력 4사(LS전선LS ELECTRICLS-Nikko 동제련LS엠트론) 등을 중심으로 산업용 전기전자 및 소재분야등의 계열사로 구성돼 있다.
처음엔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1923-2016)의 장남 구자홍 회장이 그룹 회장을 맡았고, 이어서 구평회 E1 명예회장(1926-2012)의 장남인 구자열 LS전선 회장이 해외사업과 신사업 추진 등 사업구조 혁신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LS그룹의 CEO에 올랐다.
오늘날 LS그룹의 성장에서 구자열 회장의 공로는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지도력으로 LG전선 시절부터 성공적인 사업 확장을 이끌어왔다. “혁신 없는 기업은 미래도 없다”고 강조하며 기업인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공격경영의 선봉장이 되어 왔다. 오늘날 LS그룹은 (주)LS를 지주회사로 LS전선LS ELECTRICLS-Nikko 동제련LS엠트론LS아이앤디LS글로벌GAONE1YESCO 등국가경제의 핵심인 소재산업 중심의 컨글로머릿(conglomerate)로 성장했다.
“가만히 수성만 하면 회사가 커지나요? 일을 벌여야 성장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구 회장은 재계에서는 기업경영을 통하여 위험 감수를 즐기는 CEO로 유명하다. 그의 공격경영의 원천은 아마도 적극적인 스포츠맨십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구 회장은 만능 스포츠맨이다. 2002년 독일에서 열린 ‘트랜스 알프스 산악자전거 대회’에선 동양인으로서는 물론 한국인 최초로 참가해 7박8일 동안 650Km를 완주했다. 언어장벽 등의 문제 때문에 기본코스를 제대로 찾기도 힘든 이 대회를 위해 그는 국내 산악자전거 코스를 돌며 사전에 7개월 동안 준비할 정도로 적극적인 스포츠맨이기도 한다.
구 회장은 그것이 스포츠이든, 기업경영이든, M&A이든, 힘든 일을 정면으로 승부할 때 세상을 사는 맛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에도 일주일에 하루는 청계산 등지에서 산악자전거를 타거나 서울 집에서 안양공장까지 40Km를 달리며 근성을 단련한다고 한다. LS가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역동적인 성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이러한 구 회장의 승부정신과 도전정신이 맺은 결실이 아닐까.
나(송기철 박사)는 그와의 인연을 고려대 경영학과에서 맺어왔다. 그는 1979년에 졸업한 나의 사랑하는 제자다. 수많은 고려대 졸업생 중에서도 ‘고대정신(高大精神)’을 본받아 공격적 경영으로 LS의 핵심사업들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그에게 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LS의 무한한 성장과 함께 그의 건투를 지켜보는 즐거움을 갖고 싶다.
구자열 회장 LG전선 대표이사 사장회장 LS그룹 회장 서울평화상 문화재단 이사 한국무역협회 회장
참고자료 송기철 박사 월간현대경영 2007년 1월호 기고
현대경영 구루 ③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 편
Visionary Leader
비저너리 리더십(visionary leadership).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의 리더십 키워드다. 김 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나의 애제자다. 김 회장은 그 후 일본 게이오대(Keio University)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MBA)를 받았는데 그는 이에 만족치 않고 중국의 MIT라고 불리는 칭화대학(Tsinghua University)의 ‘Executive MBA’ 과정에도 참가하여 “중국을 제대로 배우겠다”는 남다른 학구열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김동기 박사)와 사제지간(師弟之間)인 김남구 회장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김재철 동원그룹 창업자 겸 명예회장의 아드님으로 일찍이 내가 결혼주례를 서기도 했다. 그는 엄격한 아버지의 권유로 1986년 원양어선에 승, 명태잡이라는 중노동을 이겨낸 강철 같은 의지의 CEO다.
여기서 김남구 회장을 일본 도쿄(東京)에서 만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김 회장이 일본 게이오대에 유학중일 때 나 역시 마침 국제학술회의 참석차 도쿄에 간 김에 그를 만났었다. 나는 김 회장과 함께 일본 서점가를 둘러보다가 내가 기업경영 관련 신간서적 몇 권을 사서 ‘일본식 경영’과 ‘미국식 경영’을 잘 배워서 우리 한국기업은 어떤 경영모델을 만들어나가야 하는지를 잘 연구해보라고 격려했다. 그러자 김 회장은 “교수님 말씀 명심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귀국하겠다”고 약속했던 기억이 난다. 그의 남다른 학구열과 성취욕을 잘 말해주는 사례다.
김 회장은 업계에서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겸비한 CEO로 꼽힌다. ‘동원그룹 가(家)’의 장남인 그가 그룹의 금융사업을 물려받아 독자경영에 나선 것은 그의 나이 마흔부터였다. 김 회장이 이끌기 시작한 동원금융지주는 2003년 우리나라 증권계의 최초 지주회사였다. 김 회장은 취임 후부터 맹렬한 기세로 실력을 발휘했다. 마침내 동원증권보다 덩치가 큰 한국투자증권을 인수하는데 성공했고, 마침내 국내 대표 증권회사로 성장시켰다. 그렇다면 그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첫째, 국내 유일 증권업 중심의 한투금융그룹을 이끌면서 국내 금융시장보다 글로벌 투자금융시장으로 나가자고 독려했다. 일본과 중국 등의 고등교육기관에서 쌓아온 국제정세 분석과 노하우 덕분일 것이다.
둘째, ‘비전 있는 경영’을 들 수 있다. 국내외 사업경쟁력 강화와 수익구조 다각화 및 디지털 전환 등을 통해 아시아 최고의 투자금융그룹으로 육성시키겠다는 그의 비전은 가시적 성과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셋째, 일찍이 국립부산수산대(현 부경대)를 나와 원양어업사업에 뛰어들었던 부친 김재철 명예회장의 도전과 개척자정신을 받아들인 것은 그의 훌륭한 소통의 자세와 탁월한 학습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김 회장은 능력 있는 직원이라면 전폭 지원을 아끼지 않는 ‘믿음경영’ 철학을 갖고 있다. 과거 한국투자증권을 인수할 때 김 회장이 직접 나서 스카우트한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CEO는 2007년부터 2018년까지 사장으로서 11년 연임한 것도 그의 ‘믿음경영’을 잘 말해주는 사례다. 한국투자증권 직원들의 평균 근속연수 또한 11.3년에 달해 10년을 채우기 힘든 증권업계에선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부친 김재철 명예회장으로부터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뼛속까지 배워온 만큼 ‘믿음’을 줄 직원은 깐깐하게 뽑는다고 한다. 결국 좋은 사람들이 좋은 기업을 만들어간다는 평범한 진리를 그는 꿰뚫고 있다는 평이다.
김남구 회장 한국투자증권 부사장 동원금융지주 사장 한국투자금융지주 사장부회장회장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
참고자료 김동기 박사 월간현대경영 2015년 8월호 기고
현대경영 구루 ④ 문규영 아주 회장 편
아주의 역사는 혁신의 역사
“지역사회의 아이들을 위한 교육문화공간을 만들겠다.” 문태식 아주그룹 창업주(1928-2014)의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용두동) 생가가 ‘아주 좋은 꿈터’로 변신했다. 2017년 개관한 ‘아주 좋은 꿈터’는 세계적 건축가로 이름을 날린 재일 한국인 2세 이타미준(伊丹潤·한국명 庾東龍)의 장녀이자 건축가인 유이화 ITM건축사무소 대표가 직접 설계, 건축한 건축물이다.
청남(淸南) 문태식 아주그룹 창업주의 장남인 문규영 아주 회장은 “선친의 인재양성 철학을 기리는 뜻에서 이 공간을 국가사회에 기증했다”고 회상했다. 올해 창립(1960년) 61주년을 맞이한 아주는 오늘날 국가·사회발전에 이바지하는 주춧돌과 같은 중견기업그룹으로 성장, 발전해오고 있다. 문 회장은 아주의 미래 비전을 이같이 설명하고 있다.
“지난 1960년 건자재 사업을 시작으로 아주그룹은 금융, 자동차 유통, 호텔, 부동산 개발에서 해외 자원개발 등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을 확장해 왔으며, 지금도 쉬지 않고 100년 기업을 향한 힘찬 도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회사규모도 커지고 사업범위도 넓어졌지만 회사 구성원들이 먼저 행복해야 고객이 행복하고 고객이 행복하면 기업 역시 지속성장이라는 결과를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아주가 지향하고 실천해 나가고 있는 ‘행복의 선순환’ 고리입니다.” - 문규영 회장
문규영 회장은 또한 “아주그룹의 역사는 혁신의 역사”라고 강조한다. 예를 들면 “나무로 제작하던 전신주(전봇대)를 콘크리트로 바꾼 것이 아주산업이었고, 아파트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 아주가 제일 먼저 지하를 파는 대신 콘크리트파일로 쌓기 시작했다”며 “아주에는 단순제품을 응용제품으로 만드는 창의적 기업 DNA가 있다”고 소개한다. 문 회장은 직원들과의 스킨십을 중시한다. 수시로 사업장을 찾아가 현장직원들과 허물없이 소맥(소주+맥주)을 마시는가 하면, 직원들도 아무 주저 없이 회장에게 애로사항을 털어놓는다고 한다. CEO가 구성원을 믿고 먼저 다가가니 직원들의 애사심과 업무 효율성도 높아졌다. 문 회장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선친인 ‘청남 문태식 창업주’이다. 선친은 문 회장이 어릴 때 ‘나폴레옹과 무지개’ 이야기를 자주 해줬다.
“나폴레옹이 열 살 때 하늘에 뜬 무지개를 바라보며 ‘나는 무지개를 잡으러 갈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친구들은 비웃었지만 나폴레옹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지개를 잡으러 떠났다. 나중에 빈손으로 돌아온 나폴레옹에게 친구들은 야유를 보냈지만 문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들은 그냥 주저앉아 있었지만 나는 무지개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저기까지 갔다 왔단다….”
문태식 창업주가 문규영 회장에게 남기고 싶었던 메시지는 ‘도전정신’이 아닐까? 문 회장은 “하루를 살아도 도전에 대한 열정을 가져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그가 경영 전반에 나선 뒤 아주그룹은 과거의 안정지향적 기조에서 벗어나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공격경영 형으로 변신하고 있다. 과거 선친이 회사명을 ‘아주(亞洲)’라고 지었던 것은 ‘아시아의 주인’이 되겠다는 뜻이었는데, 오늘날의 ‘아주(Aju)’는 ‘아주’ 좋은 기업이라는 의미로 진화하고 있다. 시대정신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고려대 졸업 후 김우중 회장의 ㈜대우에서 종합상사 업무 전반을 배우고 런던지사 등에서 5년 6개월간 근무하면서 익힌 영어실력은 그 후 해외사업을 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문 회장은 고대경제인회 회장 등을 맡아 모교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문규영 회장 아주산업 회장 아주그룹 회장 휘문교우회 회장 고려대학교 경제인회 회장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참고자료 김동기 박사 저 ‘기업가정신(企業家精神)’, 월간현대경영 발간, 2019
현대경영 구루 ⑤ 박유재 에넥스 명예회장 편
‘사랑하라’는 한마디
과거 부뚜막에서 밥을 짓느라 허리를 펴지 못한 우리나라 1천만 주부들을 재래식 부엌에서 해방시켜, 입식 부엌 도입으로 ‘주부들의 은인’이라는 평을 받는 것을 생애의 큰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박유재 명예회장
우리나라 부엌가구의 시조(始祖)인 ‘오리표싱크’에서 에넥스(ENEX)로 회사명을 바꾸고, 이 땅에 최초로 입식(立式) 부엌문화를 선보인 선구적 경영자가 있다. (주)에넥스의 박유재 명예회장이다. 박 명예회장의 사업과의 인연은, 대학시절 ‘삼중물산’ 박진권 사장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일주일에 한 번씩 회사에 나가 일을 도우며 시작한 것이 결국 사업가의 길로 뛰어들게 되었다. 그 후 박 명예회장은 외국의 도기(陶器)를 수입, 판매하는 일을 시작하면서 선진각국의 수많은 부엌가구 등을 접하면서 싱크대 제조업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1960년대의 시대상황을 생각하면 이는 굉장한 모험이었다. 그가 싱크대 사업에 도전하겠다고 말하자 측근들은 “제조업은 3대가 망한다”며 “1대는 공장을 짓다가 망하고, 2대는 기계설비 갖추다가 망하고, 3대는 영업하다가 망하고, 4대 째에 이르러서야 겨우 공장이 돌아간다”고까지 핀잔을 받았다.
박 명예회장의 선견지명은 정확했다. 일본을 여러 차례 오가면서 그는 우리나라 경제가 일본의 경제 발전과 비슷하게 움직인다는 생각이 떠올랐고,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주거문제 해결을 위해 아파트를 건설할 거라고 예상한 것이다. 그의 예감대로 대한민국에 아파트 건설 열풍이 불었고, 그의 오리표싱크대는 대히트를 쳤다. 그가 처음 부엌가구 사업에 도전할 당시에는 제품공정이 뛰어난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가구 표면을 매끄럽게 갈아낼 수 있는 일본 ‘와코’사의 연마기를 거금을 들여 수입하면서 이 때 와코사의 니시다 야스마루(西田泰丸)회장과 인연을 맺어 그를 평생의 멘토(mentor)로 모시게 된다. 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깊어진다는 말처럼, 오리표싱크를 흉내 내어 모 대기업이 ‘거북표싱크’를 만들었다. 당시 그는 대기업의 자본 공세를 감당할 수 없어 마침 한국에 나와 있던 니시다 회장을 만나 “강력한 경쟁자의 출연으로 부엌싱크대 사업이 어렵게 됐다”고 하소연하자. 니시다 회장이 뜻밖에도 “사랑하라”라는 한마디를 내뱉었다고 한다. 내가 남에게 사랑을 베풀다보면 자신에게 그 사랑이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 그 말을 들은 박 명예회장은 우선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사랑을 베풀기 시작했고 그러자 가족들이 매우 기뻐하는 모습을 보게 됐고, 그 모습을 본 자신도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직원들에게도 사랑을 베풀자 회사 분위기가 환해졌다. 이 때 박 명예회장은 깨달았다. 니시다 회장의 “사랑하라”는 말의 함의(含意)를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 계속해서 성장가도를 달리던 오리표싱크는 글로벌 시대의 조류에 맞춰 1992년 정들었던 ‘오리표’ 브랜드를 포기하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에넥스’라는 새 이름을 선택했다. 에넥스(ENEX)란 더욱 강화시킨다는 의미 ‘엔(En)’에 ‘오랜 경험(Experience)’, ‘전문가(Expert)’, ‘최고(Excellent)’를 나타내는 ‘EX’를 합성한 상표라고 한다. 오늘날 그의 적극적이면서 담대한 창업정신, 목표, 경영철학은 2세 경영자인 박진규 회장에게 계승되어 제2기 에넥스 르네상스를 추구해나가고 있다. 에넥스(E.N.E.X)라는 이름처럼 에넥스가 영원히 발전하기를 기대해본다.
박유재 회장 오리표싱크 창업자 (주)에넥스 대표이사 회장 제11대 국회의원 에넥스 명예회장
참고자료 김동기 박사 저 ‘기업가정신(企業家精神)’, 월간현대경영 발간, 2019
현대경영 구루 ⑥ 박현주 미래에셋 Founder & GISO 편
The First & The Best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세상에 있으며 눈에 보이는 것은 현상(現象: Substance)이고, 현상 아래 있으며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라고 불렀다. 미래에셋그룹을 일군 박현주 Founder & GISO(GISO: Global Investment Strategy Officer)는,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물자체’라는 무한의 세계를 깊이 파고드는 ‘경영철학자’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나라 증권가에서 신데렐라 CEO, 마이더스의 손, 그리고 ‘3최(最)’라고도 불리는 ‘최초·최대·최고’의 CEO가 바로 박현주 회장이다. 과거 동원증권 시절에는 ‘최’ 연소 지점장(32세), ‘최’ 연소 이사(37세), 그리고 1998년에는 ‘최초’로 ‘박현주 펀드’를 발매하여 단연 증권업계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그는 맨손으로 증권회사를 창업해 남의 주식을 굴려주는 것으로 거대 미래에셋금융그룹을 일궈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또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로 인하여 주가가 폭락하자 주가지수 선물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도모했고 IMF로 촉발된 고금리 시절에는 채권투자를 통해 증권가의 ‘큰손’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2000년대 초 한때 시계(視界)가 불확실해지자 미국에 유학, 9개월간의 미국 체류 경험을 통하여 증권산업 경쟁력의 기본을 체득하고, 오늘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국내 최초로 그가 뮤추얼 펀드를 도입하고 국내 최초로 해외현지법인 등을 설립하는 등의 ‘최초 & 최고(The First & The Best)’ 전략은 모두 미국에서 구상하고 체득한 아이디어라고 한다.
‘오마하의 현인(Oracle of Omaha)’으로 불리는 워런버핏(Warren Buffett)에겐 “자신을 따르는 자는 성공하고 거스르는 자는 실패한다”는 ‘워런 버핏 포뮬러(Formula)’가 있다면, 한국에는 ‘박현주 포뮬러’가 있다.
① 루머에 휩쓸리지 말고 현상을 넘어 본질을 보아야 한다.
② 부동산보다 주식이유리하고 따라서 주식은 장기적으로 보아야 한다.
③ 주가하락 시에도 기회는 공포 속에서 나온다.
④ 세계증시의 발전 법칙에 비추어 한국증시는 여전히 저평가된 상태다.
⑤ 이젠 세계로 나가서 글로벌 자산운용을 도모해야 할 때다.
– 박현주 포뮬러(Formula)
박현주 파운더(Founder)의 관심은 이제 국내시장이 아니라 온통 해외시장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기본이요, 홍콩과 상해·베트남·인도에 이어 영국과 브라질 등에도 사무소를 두고 있다.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출신인 박 회장의사업가적인 재능은 이미 학창시절부터 빛난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시절부터 스스로 미래의 진로를 찾고,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투자금융 부문에서 최선의 전략과 기민한 전술을 통하여 세계적 금융투자가로 성공한 ‘박현주 모델’은 오늘의 청년세대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오마하의 현인 워린 버핏 말대로 그를 따르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
PS(Post Script): 금융위원회는 2016년 초대형 투자은행(IB) 육성방안을 발표했다. 금융위원회는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키우기 위해서는 중장기적으로 자기자본 10조원 이상의 IB를 만들어야 한다“고 부연설명(敷衍說明)했다. 자기자본이 10조원(약 100억달러) 정도는 돼야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글로벌 IB들과 경쟁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미래에셋증권이 국내 증권회사 가운데 최초로 자기자본 10조원을 돌파함으로써 글로벌 IB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 이로써 박현주 GISO는 세계 금융투자시장에서도 ‘큰손’으로 등극했다.
박현주 Founder & GISO 미래에셋 회장 하버드비즈니스스쿨 최고경영자과정 미래에셋대우 회장 마래에셋 GISO
참고자료 송기철 박사 월간현대경영 2006년 7월호 기고 | 김동기 박사 월간현대경영 2015년 9월호 기고
현대경영 구루 ⑦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편
오너십의 조건
윤동한 회장과 김동기 박사
한국콜마 창립 31주년 New CI
오너십이 있는 사람은 집에서 쓰던 볼펜을 갖고 회사로 나온다.
오너십이 없는 사람은 회사에서 쓰던 볼펜을 들고 집으로 가져간다.
오너십(ownership)에 관한 윤동한 회장의 명쾌한 해석이다. 오너십이란 무엇인가. 바로 주인의식이다. 단언컨대 일평생 일에 집중하여 얻어낸 키워드가 아닐까.
내가 윤동한 회장을 처음 조우(遭遇)하게 된 것은 고려대 경영대학교 교수, 경영대학 학장 시절이다. 그를 만난 것은 불과 10여년 안팎인데 그를 만나보면 그만큼 해박한 지식, 인격, 견해를 가진 CEO를 나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 특히 그의 뚜렷한 역사의식과 역사관은 학계에 몸담고 있는 나 자신에게도 많은 것을 그에게 배우게 되었다.
1990년 화장품 ODM※ 회사로 첫 출범한 한국콜마는 오늘날 화장품과 헬스케어 분야의 세계적인 기업으로 지속가능 성장하고 있다. 2018년에는 ‘1조원 클럽’에도 가입하면서 윤 회장과 한국콜마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증폭되는 가운데 그의 ‘기업가정신’을 소개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ODM(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ing: 제조업자 개발생산)
윤동한 회장은 영남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농협중앙회가 공모한 제1기 간부채용시험에 합격해 수년간 근무하다가 대웅제약 간부로 스카우트되었다. 그 후 대웅제약 부사장에 오른 윤 회장은 평소 자신의 꿈을 관철시키고자 한국콜마를 창업했다. 초기 설립자본의 부족으로 고민했지만 일본콜마를 찾아가서 출자 약속을 받아내는 등 사업가적 능력과 자질을 일찍부터 인정받았다. 설립 당시 자본금 10억원, 종업원 3명으로 시작한 한국콜마는 1990년 사업 첫해에 10억원의 매출액을 올렸고, 회사를 세운지 28년만에 1조 클럽에 이름을 올렸으니 1,000배(1990-2018)나 되는 초고속 성장이다. 참고로 2020년 매출액은 1조3천221억원(IFRS 연결)이다. 윤동한 회장을 만나 그의 말을 들어보면 ‘기업가정신’이 무엇인지 귀에 쏙 들어온다.
오너십이 있는 사람은 집에서 쓰던 메모지 한 장이라도 들고 나와 회사에서 쓴다. 오너십이 없는 사람은 회사에서 쓰던 메모지와 볼펜을 들고 집으로 들어간다. 이 간단한 차이가 회사의 분위기를 정직하게도, 정직하지 않게도 만든다. 오너십은 주인의식이다. 필자는 젊은 시절 판공비라는 항목이 있었음에도 1만원 이하는 거의 청구하지 않고 사비로 처리하곤 했다. 그런데 당시 대부분의 직원들이 심지어는 임원들까지도 10원짜리 한 장이라도 쓰면 청구하는 것을 보았다. 오너십의 자세는 이런 기본 정신자세에서 판가름 난다. - 윤동한 회장
한국콜마 창업 초창기 때의 일이다. 창업 당시라, 전기료를 내지 못해 단전(斷電)하겠다는 통보가 떨어지는 등 어려움을 겪던 어느 날, 거래처로부터 “세금계산서를 끊지 말고 거래하자”는 무자료거래와 리베이트 요구가 들어왔다. 당시 “돈이냐 도덕이냐?”라는 극한의 갈림길에서 윤 회장은 “무자료거래를 하지 않기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윤 회장은 기업활동 외에도 충무공 이순신 정신의 연구와 교육 등을 위해 서울여해재단을 설립했다. 여해(汝諧)는 충무공의 자(子)이다. 윤 회장은 “서울여해재단은 사랑과 정성, 그리고 정의와 자력에 뿌리를 둔 이순신 정신을 선양하고 교육하는데 목적이 있다”며 “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근본을 바로 세우고 건강한 사회를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기업가이면서 역사학자이며 또한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윤동한 회장 농협중앙회 근무 대웅제약 부사장 한국콜마 회장 서울여해재단 이사장
참고자료 김동기 박사 월간현대경영 2012년 2월호 기고
현대경영 구루 ⑧ 이금기 일동후디스 회장 편
유아식에서 종합식품으로
한국의 제약업계에는 ‘전설처럼’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최고경영자가 있다. 일동제약 회장에 이어 일동후디스 회장을 맡고 있는 이금기 회장이다. 1960년 일동제약에 입사해 사장·회장에 오른 이금기 회장은 탁월한 리더십과 마케팅능력으로 이른바 ‘아로나민’ 효과를 창출, 오늘날의 일동제약을 성장시킨 장본인이다. 바로 여기까지가 이금기 회장의 제1기 전문경영자 시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금기 회장의 진짜 이야기(Real story)는 일동후디스 오너 회장으로서 ‘제약하는 마음으로’ 유아식 시장을 창출하는 제2기 인생에서 더욱 빛난다. 1996년 남양산업을 인수, 일동후디스로 사명을 변경하고 CEO로 취임한 이금기 회장은 2000년 트루맘, 2003년 산양분유, 2007년 국내 최초 LOHAS 인증 등으로 한국 유아식 시장을 ‘천하통일’시켰고 그 후 그릭요거트, 노블커피, 후디스 키요, 하이뮴 등등 식품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제약에서 유아식, 종합식품에 이르기까지 업종을 불문하고 이금기 회장이 나타나면 시장에서 항상 1등을 만드는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는 돌파형 리더십이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외환위기로 1998년 일동제약이 잠시 워크아웃에 들어갔을 때엔 ‘왕년의 이금기 회장’이 다시 CEO로 복귀하여 3년 만에 경영정상화를 성공시켰다.
둘째, 인간존중과 인화중시의 경영이다. 의약품과 식품은 국민건강에 직결되는 제품이기 때문에 “불량의약품이나 부정 식·음료품은 절대로 생산·판매돼서는 안된다”는 생명존중 철학과, “회사와 임직원 간의 절대적 신뢰, 그리고 임직원 상호간의 인화가 없이는 우수의약품과 우수식품을 만들 수 없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셋째, 목표가 설정되고 확신이 서면 과감한 투자로 밀어붙이는 도전성이다. 일동제약에서의 ‘아로나민’ 투자, 그리고 유아식 및 유제품 개발에서도 과감한 투자로 업계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해오고 있다.
넷째, 국가사회와 고객에 대한 기여와 공헌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을 솔선수범하기 위해 과거 한국제약협회 회장 직을 맡았을 때에는 ‘공정경쟁규약’ 제정, ‘의약품 유통거래질서 개선’ 등을 위해 공헌한 것은 지금도 업계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아울러 ‘인류의 건강과 행복한 삶에 기여하는 초일류 기업’이라는 일동후디스의 경영이념처럼 고객존중 경영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다섯째, 불굴의 신념과 연구개발 정신이다. 일동후디스가 오늘날 산양분유 시장에서 점유율 80%를 보유한 분유회사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물론 그의 뛰어난 경영능력 덕분이겠지만, 종합식품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식품업계 대표이사 중 원로경영자(?)임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현장에서 제품개발과 고객만족을 체크하는 이금기 회장의 연구개발 정신과 불굴의 신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평사원으로 시작해 대표이사 회장 직을 지낸 제1세대 ‘제약업계의 신화’에 머무르지 않고 이 회장이 오늘날에도 새로운 창업기업가, 연구개발형 오너기업가로서 한국 식품업계의 현주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그의 휴먼스토리에 박수를 보내며, 일동후디스가 추구하는 세계 일류 종합식품기업으로의 그림이 완성되기를 기원한다.
이금기 회장 일동제약 대표이사 사장회장 일동후디스 회장 일동제약 명예회장
참고자료 김동기 박사 월간현대경영 2012년 4월호 기고
현대경영 구루 ⑨ 이학수 삼성 전 부회장 편
삼성의 오오반도大番頭
지금은 공식적으로는 해체되었지만 일본의 자이바츠(財閥: Zaibatsu)에는 ‘오오반도(大番頭)’란 직책이 있었다. 오너의 뜻을 받들어 자이바츠를 총괄 관리하는 총사령관을 일컫는 말이다. 물론 일본의 그것과 우리의 그것은 기능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삼성그룹의 전략기획실장인 이학수 부회장은, 그가 현직에 있을 때엔 삼성그룹의 경영전략을 총괄 지휘하는 한국판 총사령관, 즉 ‘삼성의 오오반도’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학수 전 부회장은 1971년 당시 삼성그룹의 모체기업인 제일모직에 입사하여 경리 파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제일모직은 삼성그룹의 ‘경리사관학교’로까지 불릴 정도로 관리 및 회계에 관해서 엄격한 교육훈련과 실행이 이루어졌었다.
그는 여기에서 실력을 닦고 성장하여 1979년 제일모직 관리부장을 거쳐 그 후 삼성그룹의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의중을 가장 잘 파악해 이를 일선에 정확히 전달하고 그 결과를 챙기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997년 회장비서실장에 임명되었고, IMF 금융위기 때엔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 따라 삼성의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여, 2004년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2006년 전략기획실장으로 올랐다.
나(송기철 박사)는 이학수 부회장과 아주 각별한 인연이 있다. 그는 내가 봉직했던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학생으로 재학했었다. 그는 재학 중 학생회장을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통솔력을 가진 인재로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려대를 졸업한 이후 제일모직에 취직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내가 그때 대구상공회의소 등의 초청으로 대구에 간 때가 있었는데 그가 연락을 해서 만나는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직책이 제일모직의 관리부장이라고 했다. 그때 그는 서울과 같은 도시의 유복한 자제로서의 생활을 해보지 못한 ‘부산 촌놈’으로서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겠지만) “전화기에 대한 부담감,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의 생경함, 양식(洋食)을 대했을 때의 당황스러움” 등 자신의 치부恥部도 솔직히 털어놓는 순박함을 그의 재치 있는 말솜씨로 이야기해주어 서로 웃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는 내가 호텔에 투숙했을 때 은사에 대한 예절로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찾아와 스승에 대한 예의를 다했다.
그때 나는 “그가 앞으로 대성할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역시나 다르지 않게 대성했음을 볼 때 흐뭇하기 짝이 없다.
그의 모교사랑과 은사사랑은 아주 각별한 바 있다. 자신은 해외유학파도 아니요, 학벌도 부산상고와 고대 상대뿐인데 “어찌 모교와 모교 은사님들의 학은學恩을 잊을 수 있느냐”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따라서 모교 일이라면 팔을 걷고 나서고 있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은사님들을 모시고, 사은 모임이라도 있을라치면 그 바쁜 와중에도 직접 백화점을 찾아가서 일일이 은사님들을 위한 넥타이를 고르는 정성과 세심함까지 보여주어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외면과는 달리 훈훈한 인간미를 갖춘 품성과 효심이 깊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정말로 순수한 사람이었다. 아무쪼록 건강하여 앞으로도 오랫동안 한국의 삼성, 나아가서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앞으로 50년, 100년, 아니 영원히 안심하게 ‘삶’을 영위하는데 큰 몫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학수 전 부회장 삼성 회장비서실 부사장 삼성화재 사장 삼성 회장실장사장부회장 고려대 교우회 회장
참고자료 송기철 박사 월간현대경영 2007년 3월호 기고
현대경영 구루 ⑩ 정몽규 HDC 회장 편
왕성한 기업가정신
HDC그룹이 탄생했다. 과거 현대아파트, IPARK 아파트로 유명한 HDC현대산업개발의 지주회사다. HDC는 2018년 5월 기존의 현대산업개발을, 지주회사인 HDC와 사업회사인 HDC현대산업개발로 분할하고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HDC는 ①금융·투자 ②부동산 개발 ③사회간접자본 ④기술·첨단소재 ⑤문화·콘텐츠 등 5대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며 지속가능 성장을 추구하고 있다. 지주회사로 전환되면서 HDC는 자산총액 기준 재계 46위에서 33위로 올랐고, 2020년 31위에서 2021년에는 세 단계 뛰어 28위로 올랐다. HDC의 ‘변화와 혁신’의 중심에는 ‘지속가능 성장’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오너 최고경영자인 정몽규 회장의 리더십이 있다. 정 회장은 지주회사 출범 후 가진 첫 번째 경영전략회의에서 “주거플랫폼을 바탕으로 한 임대 및 운영, IT, 문화, 금융콘텐츠 등 그룹 계열사 간의 통합과 융합”을 강조했다.
최근 들어 정 회장이 공들여 추진하는 ‘BT(Big Transformation) 워크숍’을 통한 ‘빅 프로젝트’들이 가시적인 성과를 맺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광운대 역세권 복합개발사업’이다. 2018년 부동산114를 전격 인수했고, 2019년 ‘오크밸리’로 유명한 한솔개발 유상증자에 참여, 경영권을 인수했다. HDC는 오크밸리가 국내 최고 수준의 프리미엄 리조트로 재도약할 수 있도록 기존 시설을 리뉴얼하고, 신규 골프코스를 신설하는 등 세계적 종합 레저시설로 키울 계획이다. HDC는 오크밸리와 함께 기존 의 파크하얏트 서울·부산, 강원도 정선 소재 웰니스 리조트 파크로쉬(PARK ROCHE), 고성 아이파크콘도 등 강원도 소재 HDC그룹의 통합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HDC는 이밖에도 용산역 전면공원 지하공간 개발, 용산병원부지 등 매머드 개발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나는 현대자동차와, 현대산업개발, 그리고 HDC까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현 HDC의 정몽규 회장은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조카이자, 아산의 아랫동생인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전 명예회장의 장남이다. 정몽규 회장은 또한 내가 평생 봉직한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나온 애제자(愛弟子)이다. 고려대를 나온 후 영국 옥스퍼드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1988년)를 받고 귀국한 그는 선친 정세영 회장이 운영하던 현대자동차에 입사, 상무·전무·부사장을거쳐 회장(1996-98)을 지냈다. 그 후 1999년 현대자동차가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으로 경영권이 넘어가자 정세영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그는 현대산업개발 회장에 취임했다. 정몽규 회장이 현대자동차에서 일할 때 선친 정세영 회장의 ‘뜻’이라면서 고려대학교 연구실의 나를 찾아와서, 현대자동차 사외이사를 맡아달라고 했다. 그의 스승에 대한 예우를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고려대에서 은퇴하고 대한민국학술원 회장에 봉직하고 있는 지금도 나는 1년에 수차례씩 정몽규 회장을 만난다. 고려대 출신 경제인 5인의 모임이라고 해서 ‘오고회(五高會)’라고 부르는 이 모임은, HDC그룹이 운영하는 파크하얏트서울(서울 강남 6성호텔)에서 자주 모인다. 대한축구협회 회장 직도 맡고 있는 정 회장은 축구협회의 발전과 유소년 축구 활성화를 위해 매년 거금을 내놓는 ‘기부천사’이기도 하다. HDC의 르네상스를 도모하는 그의 왕성한 ‘기업가정신’에 감사를 드리며, 언제나 활력에 차 있던 선친 고 정세영 회장이 오늘따라 그립다.
정몽규 회장 현대자동차 회장 현대산업개발 회장 대한축구협회 회장 FIFA 평의회 위원 HDC 회장
참고자료 김동기 박사 저 ‘기업가정신(企業家精神)’, 월간현대경영 발간, 2019
현대경영 구루 ⑪ 정몽원 한라 회장 편
나아가지 못하면 진다
김동기 박사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취임 기념 모임
(오른쪽부터 정몽원 회장 김동기 회장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
대한민국 아이스하키는 2018 평창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내며 무한 발전가능성을 확인하는 성과를 이뤘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고 머물러서는 안된다. ‘배움은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아, 나아가지 못하면 후퇴하게 된다(學如逆水行舟, 不進則退).’ 평창 올림픽 이상의 도전정신을 잃지 않아야 발전을 이뤄낼 수 있다.
– 정몽원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후퇴하게 된다. 부진즉퇴(不進則退)”
한라 창업자 운곡(雲谷) 정인영 명예회장의 말씀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쇼크로 한국경제가 가장 어려울 때 한라 회장에 취임한 정몽원 회장은 ‘재계의 부도옹(不倒翁)’으로 불렸던 선친 운곡 회장의 저돌적 경영을 닮아 오늘날 한라를 부흥시키는데 성공했다. 2008년에는 만도 회장으로 자동차부품 산업의 한 획을 그었고 2013년부터 대한아이스하키협회 회장으로 국내 스포츠 발전에 기여해오고 있다.
IMF 외환위기 탓으로 회장 취임 1년 만에 그룹이 해체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정몽원 회장은 맨땅에서 헤엄치듯이 한라건설을 기반으로 그룹 재건을 도모했고, 만도를 다시 사들이는 것을 디딤돌로 재계 순위 40위권의 한라를 그룹을 다시 일으켰다. 2019년 5월 기준 한라는 자산총액 7조7천억원으로 계속해서 재계 순위 49위에 올라 있다. 주요 계열사 중 매출액이 가장 높은 회사는 (주)만도로, 만도는 매출액 5조6천억원을 기록하며 한라 매출의 60% 이상을 차지했다. (2018년 12월 기준)
그렇다면 만도를 비롯한 한라의 재생과 발전을 이끈 정몽원 회장의 리더십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 본업과 핵심역량에 집중하는 ‘본업충실화’ 경영이다. 1980년 설립된 만도는 IMF(국제통화기금)위기 여파로 한때 그룹에서 분리되어 더 이상 한라그룹의 계열사가 아니었지만, 정몽원 회장을 중심으로 임직원들이 대동단결하여 그룹 재건에 나서 2008년 만도를 되찾았다.
둘째, 대를 이어온 프런티어 정신이다. 정 회장의 선친인 운곡 회장은 한국 중공업 발전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사업보국(事業報國)에 몰두하고 평생을 프런티어 정신으로 살아왔으며 학계와 업계에 도전과 기업가정신을 전파시킨 인물이다. 정몽원 회장도 선친과 마찬가지로 도전과 기업가정신, 프런티어 정신을 강조하며 늘 새로워지고 늘 혁신적인 제품개발과 발전을 독려하고 있다.
셋째, 항상 묵묵히 후원자를 자임하며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는 헬퍼(helper), 즉 조력자의 역할이다. 한국의 아이스하키 팀은 ‘2017 IIHF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사상 최초로 준우승을 하여 월드챔피언십 출전권을 획득했는데, 바로 이 승전보(勝戰譜)에는 소리소문 없이 2013년부터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수장을 맡은 뒤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정몽원 회장의 역할이 지대했다. 정몽원 회장은 한국 아이스하키 발전사에 한 획을 그은 이러한 모든 성과들에 대해, 감독과 선수들에게 돌리며 자신은 오로지 헬퍼의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한국 아이스하키팀의 실패에서 승리에 이르는 모든 과정은 한라그룹의 부활과도 닮은 모습이다. 한라의 성공과 한국 아이스하키의 성공은 바로 정몽원 회장의 끊임없는 도전과 기업가정신의 산물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경제계에서는 정몽원 회장을 가리켜 ‘외유내강(外柔內剛)’의 CEO로 평하고 있다. 겉으로는 한없이 부드러운 CEO이지만, 일단 업무에서만은 강한 카리스마(charisma) 경영자라고 한다.
정몽원 회장 한라건설 사장 한라그룹 부회장회장 대한아이스하키협회 회장 한라 회장
참고자료 김동기 박사 저 ‘기업가정신(企業家精神)’, 월간현대경영 발간, 2019
현대경영 구루 ⑫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 편
‘더 큰’ 효성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은 한국의 경제개발시대에 최초의 ‘기술 경영자’, ‘지식 경영자’로 유명한 원로경영자이다. 조 명예회장은 일찍이 와세다대에서 공학 학사와 일리노이공대 대학원에서 화학공학 석사를 딴 이공계 출신 최고경영자다. 그가 전경련 회장으로 있을 때에는 각종 세미나나 조찬회에서 조 명예회장의 심오한 지식과 함께 외국어로 좌중을 휘어잡는 멋진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만우 조홍제 효성 창업주의 장남으로 효성 발전의 중흥조(中興祖) 역할을 했고, 전경련 발전에도 중흥조로 크게 기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나(송기철 박사)는 그의 선친인 조홍제 회장이나 장인인 송인상 한국능률협회 회장 겸 효성 고문을 전경련이나 한국능률협회 조찬회 등에서 자주 만났다. 경남 함안의 대지주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제31대32대 전경련 회장(2007∼11)을 지냈고 한일경제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한일 간의 민간 경제교류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조 명예회장은 명문 경기중학교를 다니다가 경기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일본 히비야고를 거쳐 와세다대학에 진학했고 그 후 미국 일리노이공대에서 화학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엔지니어 출신 최고경영자다.
그 후 1966년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던 그는 선친인 조홍제 회장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여 회사경영에 본격 참여했다. 당시 효성의 전신인 동양나이론 울산공장 건설을 직접 지휘했다.
1970년대 들어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부응해 한영중공업을 인수, 효성중공업으로 발전시켜 중전기기와 산업기계를 국산화했다. 80년대에는 화섬에서 쌓아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석유화학 분야에 도전하고, 중대형 컴퓨터를 비롯한 금융자동화기기 등 하드웨어 사업 및 소프트웨어 개발사업에도 적극 참여, 오늘의 ICT(정보통신)분야에 남들보다 앞서 진출했다.
오늘날 섬유원사를 비롯, 스판덱스, 타이어코드, 차량용 소재, 송배전 설비, ATM, 모터, 펌프, 포장용 필름 등 거의 전방위에 걸친 소재산업에서 국제경쟁력을 확보한 효성의 이같은 발전에는 그의 기업가정신과 기술자 경영능력에 기인한 것으로 평하고 싶다. 그래서 효성 중흥조라는 평을 받는 것이 아닐까.
2017년에는 건강상 등의 이유로 회장 직에서 물러났지만 그동안 그가 쌓아온 효성의 기업가정신과 경영노하우는 고스란히 현 조현준 효성 회장 등 후손들에게 전수하면서 ‘더 큰’ 효성으로 성장하도록 후선에서 지원하고 있다. 조 명예회장은 시대정신이기도 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도 적극 부응해, 효성 협력업체들의 신제품 판로개척 및 품질향상, 경영혁신 등을 지원, 견고하면서도 확고한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있다.
조석래 회장의 뒤를 이은 조현준 현 회장은, 제1대 창업주인 조홍제 회장과 2대 조석래 회장의 기업가정신과 경영이념을 계승하는 것은 물론 이를 바탕으로 3대 최고경영자로서 4차 산업혁명의 시대정신을 익히 선도하는 ‘세계 최고의 효성’으로 키워나간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2016년 효성 50년(1966년 효성)을 거쳐, 2066년 ‘더 큰’ 효성 100년을 향해, 회사명인 효성(曉星: 샛별)처럼 더욱 빛내기를 바란다. 효성(曉星)이란 새벽에 동쪽하늘에 빛나는 금성(金星)과 샛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조석래 명예회장 동양나이론 사장 효성물산 사장 효성그룹 회장 3132대 전경련 회장 효성 대표이사
참고자료 송기철 박사 월간현대경영 2008년 10월호 기고
현대경영 구루 ⑬ 최오길 인팩(INFAC) 회장 편
무 한 정 밀
(오른쪽) 최오길 인팩 회장과 최웅선 사장
‘작은 것이 아름답다’
‘Small is Beautiful’ – 슈마허(E. F. Schumacher)
삼성전자, 현대자동차만 초우량기업일까. 영국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E. F. Schumacher)가 이론으로 입증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모델은 (주)인팩(INFAC)을 말하는 것만 같다. 최오길 인팩 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 및 경영대학원(MBA)을 나와 잠시 은행원 생활을 하다가 자동차부품 회사를 인수, 세계적인 자동차부품회사인 인팩을 탄생시켰다.
최 회장은 대학생 때 공인회계사 수석합격을 하고 세무사와 경영진단사 자격증까지 취득한 학구파였다. 졸업 후에도 국책은행인 산업은행 및 대신증권 상무이사를 거쳐, 10년간 동신제지공업 대표이사로 근무했다. 1991년 최 회장은 삼영케불(자동차부품회사)을 인수하면서 CEO로 취임했다. 취임 당시 인팩의 매출액은 68억원, 종업원 100명의 중소기업이었으나, 2020년 인팩은 매출 3천842억원(IFRS 연결) 및 본사와 전 세계에 3천여 명의 종업원을 거느리는 자동차부품 그룹으로 성장했다.
이같은 공로로 인팩은 2018년 중소벤처기업부 주관 ‘금탑산업훈장’을 받았고, 2019년 ‘한국자동차산업 혁신대상’, 그리고 2020년 ‘중견기업인의 날’엔 최웅선 인팩 대표이사가 국무총리표창을 받았다.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인팩의 성장의 역사를 보면 “미래의 자동차부품 대표기업으로 거듭 난다”는 기술우위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최 회장은 어떻게 인팩을 초일류기업으로 키웠을까?
첫째, 다각화전략이다. 최 회장이 인수한 삼영케불은 초창기에는 자동차용 컨트롤 케이블만을 만드는 단품(單品)생산회사였는데, 이를 제품 다각화전략으로 전환했고 이런 전략이 오늘의 혁신성장의 출발점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둘째, 인재중심 경영이다. ‘기업은 곧 사람’이라는 경영철학을 내세워 인재를 발굴하고 적재적소에 앉혀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게 했다.
셋째, 품질이다. ‘품질은 회사의 생명’이라는 모토로 ‘ZD(zero-defect product)’, 즉 무결점 생산에 전력투구해왔다.
넷째, 세계화다. 좁은 국내시장만으론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중국인도미국베트남멕시코 등에 7개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다섯째,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다. 최 회장은 내적으로는 임직원 자녀에 대한 장학금지급에서 우수사원장기근속사원 특별포상, 모범사원공로사원에 대한 해외연수를 통하여 직원들의 복지 향상에 힘쓰며 외적으로는 국내 및 해외진출지역의 학생 및 학교에 장학금을 지원하고 각종 사회봉사활동을 통하여 지역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세계 자동차산업의 변화와 관련, 최 회장은 “양적 성장에만 치중하지 않고 기술과 품질향상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정면 돌파해나가겠다”면서 “인팩 통합기술연구소를 바탕으로 최고의 기술, 최고의 품질로, 인팩 만의 ‘무한정밀(INFINITE ACCURACY)’ 즉 인팩 만의 ‘인피니트 어큐러시’로 전 세계 고객을 만족시키겠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한편 지난 4월 15일 청와대 세종실에서 열린 ‘확대경제장관회의’에서, 중소벤처기업 대표로 참석한 최웅선 인팩 사장은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이 전기차로 자연스럽게 전환하기 위해선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업계에 대한 정부의 전폭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자동차부품업계를 ‘무한정밀’로 선도하는 인팩의 ‘무한성장’을 기원한다.
최오길 회장 한국산업은행 근무 대신증권 상무이사 동신제지공업 대표이사 인팩 대표이사 회장
참고자료 김동기 박사 월간현대경영 2012년 10월호 기고
현대경영 구루 ⑭ 허창수 GS 명예회장 전경련 회장 편
GS Founder
‘훤칠한 키, 준수한 용모, 말수가 적은 화술, 신중한 행보….’
허창수 GS 파운더(Founder: GS 명예회장)는 재계에서 영국신사와도 같은 ‘젠틀맨’으로 정평이 나 있다. 허창수 회장의 선친은 고 남촌(南村) 허준구 LG건설 명예회장(1923-2002)이다. 고 허준구 명예회장은 구인회 LG그룹 창업회장과 함께 LG그룹(럭키금성그룹)을 창업했고, 그의 장남인 허창수 회장 역시 2004년 7월 1일 LG그룹에서 독립, GS그룹을 창업하여 초대회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허창수 회장은 GS의 총수로 취임한 후 GS를 재계 7위의 자리로 끌어올린 유능한 소유경영자로 인정받고 있다. 2005년 창업 당시 자산총액 18조7천억원으로 재계 순위 12였던 GS는, 2007년 8위에 올랐고 그 후 2016년엔 자산총액 60조3천억원으로 삼성, 현대차, LG, SK, 롯데, 포스코에 이어 재계 순위 7위 그룹으로 부상했다. 해외시장에도 적극 나서 글로벌 매출액도 30.9%에서 54.2%로 증가했다. 이러한 계량적 수치들은 허 회장이 유능한 CEO임을 만천하에 입증시킨 자료라고 본다.
경영학자로서 나는 허창수 회장이 어떠한 리더십과 경영능력으로 불과 10여년 만에 이런 성과를 거두었는가를 분석해 보았다.
첫째, 허창수 회장의 ‘섬김의 리더십’을 들 수 있다. 그는 잘나도 잘난 척 하지 않고, 이겨도 이긴 척 하지 않고, 알아도 아는 척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스스로 낮추는 ‘섬김의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의 소유자로 보인다. 그는 서번트 리더십의 4대 구성요소인 ①실력(competence) ②인격(personal integrity & character)③헌신(commitment)④겸손(humility) 등을 두루 갖춘 리더십의 소유자이다.
둘째, 금수저(부잣집 장남)로 태어났으면서도 조금도 부자티를 내지 않고 항상 소탈하고 검소한 생활태도를 유지해오고 있다. 그의 공사(公私) 간의 존경받는 모습이 두루 아름답다.
셋째, 허 회장은 ‘현장중시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사무실에 앉아서 부하들로부터 보고만 받는 CEO가 아니라 생산현장과 작업현장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일선에서 일하는 임직원들을 격려하고 애로사항을 들으며 문제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써 신뢰감을 드높이고 있다.
넷째, 일찍부터 세계화(globalization)를 강조해온 허 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세인트루이스대(St. Louis University)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 LG상사의 홍콩지사와 도쿄 지사 등에서 글로벌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영어·일본어 등에 능통하고 국제 비즈니스 감각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섯째, 허 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에 적극적이다. 2006년에는 선친의 아호(南村)를 딴 ‘남촌재단’을 설립하여 저소득 소외계층을 위한 교육과 의료지원 및 장학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다. (허창수 회장의 CSR은오늘날 GS의 ESG로 확대발전되고 있다.)
허 회장은 이러한 공로 등으로 2011년부터 전경련 회장으로 선출되어 계속 연임하고 있다. (허 회장은 2021년 여섯 번째 전경련 회장에 추대됐다)
GS를 7대 기업그룹으로 다져놓은 기반 위에서, 전경련 회장을 10년 이상 계속 맡으면서 한국경제 발전에 필요한 거시 및 미시경제 정책을 민간부문에서 뒷받침하고 있는 그의 활동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변화 속에는 항상 위기와 기회가 공존한다는 멋진 투자철학을 갖고 있다.
허창수 회장 LG건설 회장 GS 회장 제33~37대 전경련 회장 GS 명예회장 제38대 전경련 회장 GS건설 회장
참고자료 송기철 박사 월간현대경영 2006년 5월호 기고│김동기 박사 월간현대경영 2011년 7월호 기고
현대경영 구루 ⑮ 홍완기 HJC 회장 편
헬멧왕의 세계정복기
‘헬멧의 달인’ 홍완기 회장은 1971년 오토바이 운전자용 가죽의류를 생산하는 홍진기업을 설립했다. 그러다가 오토바이 운전자들이 겨울에는 얼굴이 시려서 오토바이를 타기 어렵다는 사실에 착안, 보온과 통풍기능이 있는 마스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후 오토바이 운전자의 머리와 얼굴을 보호해주는 헬멧 개발에 착수하여, 오늘날 세계 제일의 오토바이 헬멧 제조업체인 홍진HJC로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2012년 모터그랑프리 월드챔피언 호르헤 로렌조(Jorge Lorenzo)는 왜 세계의 수많은 헬멧 중에서도 유독 우리나라의 홍진HJC 헬멧을 선택한 것일까.
첫째, 무엇보다도 먼저 끊임없이 연구하고 발명하며 항상 남들과는 다른 새로움을 추구해온 발명가적인 아이디어를 들 수 있다. 그는 군 시절에도 즉석 떡국을 개발해 납품하기도 했고, 1997년 제네바 발명품대회에서는 ‘조립식 고가도로’로 금상을 수상하는 등 언제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는 천재적 기질을 갖고 있다. 최근에는 그는 친환경 황토보드를 개발하는 등 꾸준히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있다.
둘째, 세계일등이 되기 위한 철저한 품질관리와 과감한 연구개발(R&D) 투자를 들 수 있다. 2002년 기술연구소를 설립, 대규모의 예산을 투입하여 첨단제품 개발에 필요한 각종 설비와 장비를 구입하고 신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세계 어느 나라의 제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헬멧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셋째, 세계화전략의 성공이다. 이제 HJC 헬멧은 미국과 유럽에서 가장 잘 팔리는 오토바이 헬멧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전 미국 지역에서 HJC 헬멧은 판매량 1위를 차지하고 있고, 유럽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고가 헬멧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성공했다. 홍 회장은 최고급 고가 헬멧은 한국공장에서, 중저가 헬멧은 베트남공장에서 각각 생산, 구매자의 소득수준과 지불능력에 맞추어 생산·판매한 결과 마침내 세계 60여 국에 수출하는데 성공했다.
넷째, 한국의 홍진HJC가 이처럼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헬멧 메이커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홍완기 회장의 리더십이라고 생각된다. 홍 회장의 리더십은 엄부자모(嚴父慈母)와도 같은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적으론 매우 엄격하게 신상필벌(信賞必罰)로 다스리지만 사적으로는 자비롭고 인정 많은 어머니와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어 50년간 회사를 운영하면서 세계제일의 오토바이 헬멧 제조회사로 키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최근 홍 회장을 만나 글로벌 경기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선 헬멧 하나에만 의존하는 단품경영(單品經營)의 위험을 지적하자 서슴지 않고 대안을 내놓았다. 홍진창조라는 별도회사를 만들어 친환경 자재인 백토를 가공, 친환경 백토 보드를 개발했는데 새집증후군은 물론 아토피 등 건축물의 유해물질로부터 보호하고 예방하는 효과가 크다고 한다. 그는 기업가인 동시에 천재적인 발명가다.
2021년 홍진HJC(에이치제이씨)는 글로벌 브랜드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회사명을 HJC로 바꾸고 새롭게 발돋움하고 있다. 1971년 홍진기업으로 시작해서 2021년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는 HJC는 이번 사명 변경을 통해 새로운 50년을 만들어 가기 위한 초석을 다짐과 동시에 글로벌 브랜드의 가치를 강화하는 기회로 삼겠다고 밝혔다.
홍완기 회장 홍진기업 사장 홍진크라운 대표이사 회장 HJC 회장 자랑스런 한양인상(2020)
참고자료 김동기 박사 월간현대경영 2012년 8월호 기고
* 자세한 내용은 월간현대경영에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2021.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