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의 흰 막은 빛을 반사시킬 수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우주가 폭발할 것이다"
멕시코 영화제 - 루이스 부뉴엘 특별전 (대구 동 성 아 트 홀)
이상한 정열
영화 화면에서의 동그랗게 뜬 눈은 관객을 그대로 응시하고 있다.
노골적으로 여인을 쳐다보는 시선이 관객들을 혹은 그 중의 나를 향할 때 불편함을 느낀다.
멀티 전용관에서와는 달리 딱딱한 의자위에서 다시 한 번 몸을 뒤척이게 만드는 간질간질한 저림과
그에 우러나오는 여러 가지 모호한 감정의 고리 속에 갇혀 속이 답답했다.
자꾸만 목이 타 옆에 있던 남자친구에게 물을 부탁했고
물을 마신 후에도 갈증을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혹은 점심을 짜게 먹어서 인가?)
이번 해 봄, 대구 자취방으로 이사 와 트렁크 몇 개를 채우고도 넘쳐나던 짐을 풀었고
여름이 시작될 무렵 대학생활의 설레임도 풀어놓은 후 대구 어딘가에 있을 예술 영화관을 찾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그렇게 찾은 단 하나의 영화관이었던 동성아트홀이 대구 어딘가에 콕 박혀 있겠구나했다.
그치만 나서도 영화관을 찾는 모험을 하지 않았던 것은
격 주말 마다 가는 서울에 가면 언제든지 인디영화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고
딱히 모르는 길을 안 그래도 지독한 길치인 내가, 안 그래도 복잡한 대구 길을 헤매가면서 찾아가면서 까지
열렬히 보고 싶은 영화가 상영하고 있지 않았지 때문인지 모른다.
동성아트홀을 찾아 좋은 영화 보러 가 봐야지 가 봐야지 하는 내 중얼거림은
어느새 비적비적 더운 날의 열기가 가을이 오는 것 마냥 식어만 갔다.
교수님께서 나눠주신 팜플렛을 받자말자 수업 막바지의 몽롱함에 빠져있던 내 눈도
영화 속의 그처럼 흥분되어 다시 반짝거렸다.
예술 영화를 한두번씩 보고오는 내 서울 여정의 ‘숨은 목적’을 대구에게서도 이루게 해줄 좋은 구실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연찮게도 도강을 들어온 남자친구의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이 영화 보러 너 나랑 같이 가는거야!”
남자친구의 순진한 두 눈이 당황 속에 흔들리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멕시코 영화제를 모두 섭력하겠다는 결심이 너무 원대했던가,
영화가 끝날 때 쯤인 일요일에나 밍기적 영화관을 찾으러 나선 우리는 나이 지긋한 길거리 행인을 붙잡고 영화관의 행방을 물었다.
”잘모르겠는데요” 라는 대답만 남기고 사라지는 어리숙한 두 중년 부부의 어깨너머를 힐끔 바라보니
낡은 간판이 달랑 걸려있는게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동성아트홀>
올라가는 길에 칼국수 집이 있다고 이런 데 숨어있으닌깐 맛집이 아니냐하는 과정은 대충 생략하고
영화관의 대략 적인 인상은 참 오래되었구나 였다.
그치만 빈티지가 유행하는 요즘이 아니었던가. ‘나름 멋있는데’ “오오....”하면서 좁은 계단을 올랐다.
서울의 현대적이고 깔끔한 시설을 갖춘 인디영화관과는 달리 후즐근 혹은 중후한 멋이 풍기는 곳이었지만
의외의 컴퓨터부대 시설은 ‘나 그런대로 현대적이에요‘를 말했고
벽에 붙혀 놓은 영화 팜플렛은 언젠가 나 보고말거라는 내 영화 욕심을 부추겼다.
물 한 병을 사들고 들어간 영화관 내의 조명이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꺼지고 영화가 시작하였다.
“나 잘 것 같아” 라고 속삭이던 남자친구의 말에 속으론 동조함과 함께 El이라는 영화 제목 약자로 추정되는 타이틀이 뜨고
영화는 교회 안에서 성직자가 소년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카메라는 발로 시선을 옮겨갔다.
흑백이라 그런지 더욱 매끄러워 보이는 발등이 하나씩 비춰져나가면서 여자의 발로 향하는 남자의 눈길과
대조되는 남자와 여자의 얼굴의 담담한 표정 그리고 서로 주고받는 시선이 오고갔다.
발 몇 개를 유심히 살피다 여자의 발에서 멈추는 시선은 그가 발 페티쉬가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페티쉬는 인격체가 아닌 물건이나 특정 신체부위 등에서 성적 만족감을 얻기를 바라는 성향이다.
남자가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의 필수적인 요소도 이 발 페티쉬를 만족시키는 여자의 매끄럽고 아담한 발이다.
검은 구두를 신고 가지런히 놓여있는 여자의 발을 보고 남자는 자신의 환상을 충족시키지만
신혼 첫날 음산한 밤길을 맹렬히 달리는 기차 속에서 남자는 전 약혼자와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냐고 윽박지르며
여자에 대한 뒤틀어진 편견을 그녀에게 강요한다.
자신의 환상속의 여자의 발만이 그가 영원히 믿고 숭배할 수 있는 사랑과 집착의 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렸을 때의 부모의 무관심이 페티쉬의 주요한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주목 할 만한데
이 남자의 어린 시절의 기억엔 다른 남자를 사랑했던 어머니가 있었을지 모르고
그에 따라 자신의 아내의 불신감도 이 어머니에 대한 분노로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나의 가설이긴 하지만 실제로도 부모님으로부터 비롯된 왜곡된 남성상 혹은 여성상은
훗날 자신의 상황에서도 답습하기 쉽다는 것은 부정할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 즉 프란체스코는 주위사람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겉으로는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커다란 저택과 집사와 하녀를 거느린 사회적 명사이자 독실한 신자이며
그의 고해신부에게조차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라 평가받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 탑 위에서의 남편의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과 그녀에 대한 광적인 살인충동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글로리아가 풀어놓는 남편의 비정상적인 구속과 의심 그리고 이어지는 산발적인 폭력 속에서 그는 악인으로 묘사될 뿐이다. 죽음의 공포를 수단으로 물증없는 외도를 추궁하며 아내를 위협하기 위해 총을 들이대고 공포탄을 쏘는
그의 모습은 섬뜩하기 까지 했다.
하지만 더욱 더 나를 겁나게 하고 위축해갔던 것은 남편이 아내에게 퍼붓는 악질적인 고통과 상처가 아닌
글로리아의 말을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목격한 글로리아는 남편의 변호사와 농도 짙게 춤을 추고 정원으로 산책 간 경박한 아내일진 모르겠지만
그러한 아내에 대한 남편의 비인간적인 처벌행위는 묵인되서는 안될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용인되었다.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고백을 했다면 그것은 진실이라는 글로리아의 엄마의 말이나
고백성사를 통해 그의 인간성을 다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고해신부의 착각은
글로리아를 그 소외와 무관심의 공포 속에 고립시켰다.
그 악순환의 고리에 꼼짝없이 걸려 그의 악마 성을 알고도 도망가지 못하는 그녀의 지나친 헌신과 아둔함이 답답하였다.
그 동시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과
그의 병적인 집착을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짓된 희망으로 찬 동정심과
‘그는 그래도 나를 사랑한다’ 는 그녀의 집착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에 대해 주위사람에게 고발하고 분노하는 동시에 그를 결코 떠나지 못하는 그녀 또한
그의 폭력과 집착 속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비정상적인 사고와 감정을 가진 병적인 사람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자신과 유사한 모습을 보고 그것에 대해 동질감을 느낄 때에 서로에 대한 친밀감을 느낀다고 한다.
프란체스코가 다른 사람을 학대하며 자신의 인생을 저주하였다면
글로리아는 자신의 피해를 그대로 받아드림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남의 손에 쥐어주어 불행을 유도한지도 모른다.
가해자로서의 그의 집착과 피해자로서의 그녀의 집착은 사실 너무나 닮아있던 것이 아닐까?
이러한 집착을 고리를 끊는 것을 바로 그녀의 결단력이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남 으로써 그녀는 새로운 삶의 기회를 잡는다.
그에 반해 그는 채워지지 않는 환상에 이끌려 그녀의 흔적들만을 쫓게 되고 만난의 장소였던 교회에서
마침내 신경증적으로 발작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비웃고 있다는 환각과 환상을
사실 그가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에 시달리고 있다는 증거이며 그가 자기 파괴적인 양상을 절실히 드러내는 장면이다.
사실 정숙하게 미사와 자기 자신의 기도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의 내면을 무시하고
자신에 대한 망상으로 상황들을 발전시켜 해석하는 그는 사실 우리들의 모습에 대한 고찰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라면 조금씩 그렇지도 않은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제 멋대로 생각한다.
나 또한 길거리를 지나가다 스쳐 지나가자 말자 떠들썩하게 웃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뭔가 흠 잡힐만한 내 모습을 한 번씩 점검하게 된다.
그것에 대해 드라마틱하고 확대된 모습이 그가 본 환상의 일부분이 아닐까한다.
물론 그가 도달한 병적인 상태로 까지 이르는 사람들은 흔치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의 경계는 사실 모호한 걸 지도 모른다.
자신이 정상의 범주에 속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자체가 모든게 불정확하게 혼재되어 있는 세상에선 무리가 아닐까 한다.
프란체스코가 환각에서 자신을 비웃는 신부를 향해 달려들며 인간에 대한 무차별적인 살인충동을
처음으로 모두의 앞에서 드러내는 순간은 그리 놀랍지만은 않았다.
수도원에서 모든 속세에서 멀어져 영혼의 안식을 찾는다는 그의 모습은
자신의 부정함에 침식한 환자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글로리아와 라울과 그 아이의 방문을 몰래 지켜보며 그 아이에 대해 묻고 자신은 모든 것을 잊고 용서하였다며
비틀거리며 길을 접어드는 모습은 섬뜩했다. 마치 또다른 복수라는 열정에 불탄 이의 뒷 모습과 같았다.
하지만 그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남에 대한 믿음의 결여와 자기 자신으로 침식해 들어가 사회를 타인을 깊이 불신하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 속의 한 부분이다.
우린 남에게 보여 지는 모습이 중요하다 여기고
자기 속의 뭉개져 들어가는 일그러지고 상처 입은 감정들을 즉 이상한 열정을 직시하지 않고 있는 건 아닐까?
비록 프란체스코의 마지막 행방은 우리의 상상력에 달려있겠지만
그가 마지막까지 보여준 그의 두 눈 속의 이상한 정열은 우리 자신에게 주는 경각심에 대한 호소인지도 모른다.
거울을 보고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억누르고 숨기려한 나머지 곪아가는 당신의 상처와 욕망은 무엇인가.
본의아니게 글이 길게 늘어졌네요;_;
죄송해요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