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들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없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1989)
[작품해설]
이 시는 1989년 짧은 생을 마감한 시인의 비극적 죽음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절절한 슬픔과 절망이 담겨 있는 이별시이다. 유년 · 소년 시절의 ‘가난’과 청년 시절의 ‘이별’이라는 개인적 상처를 바탕으로 한 기형도의 시 세계는 죽음과 절망, 불안과 허무 그리고 불행이 이미지가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적인 시인 특유의 개성적 문체와 결함됨으로써 ‘그로케스크 리어리즘’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 같은 평가는 그의 시가 타인들과의 소통이 불가능한 폐쇄적 공간 속에서 마치 암종(癌腫)처럼 자라나는 죽음의 기이한 이미지들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데 근거한다.
이 시에서 ‘빈 집’은 절망과 폐쇄의 공간이다. 무엇에 대한 사랑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곳은 시인이 사랑을 잃고 칩거하는 우울하고 어두운 공간이다. 그것이 이성에 대한 사랑이든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이든 간에 ‘빈 집’에 갇히는 것은 결코 즐거운 경험일 수 없다. 그런데 시인은 지금 사랑을 잃고, 제 스스로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그 곳에 들어가 문을 잠가 버린다. 그리고는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기 위해 떠 올렸던 무수한 것들, 즉 ‘짧았던 밤’ · ‘겨울 안개’ · ‘촛불’ · ‘흰 종이’ · ‘눈물’ · ‘열망’까지도도 모두 버린채 은둔자가 되어 우울하게 웅크리고 앉는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빈 집’은 시인이 자신을 가두기 위해 마련한 감옥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빈 집’에 갇힌 것은 시인이 아니라, ‘가없은 그의 사랑’이다. 좁고 어두운 그 곳에 갇혀 있던 그는 사랑에 대한 시를 씀으로써 「엄마 걱정」이나 「식목제」의 경우처럼 ‘가난’의 공간을 추억 속에 가둬 놓았듯, 이번에는 그가 갇혀 있던 ‘빈 집’의 좁은 방에 사랑을 가둬 놓는다. 그러므로 그 사랑은 그의 눈물을 빚어내는 사랑이 아니라, 그리움으로 돌아보는 사랑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이미 그 집으로부터 나와 있는 상황이다. 아니 그가 그 집에서 나오는 순간, 그 집은 비로소 ‘빈 집’이 된 것이다. 그 결과 ‘빈 집’ 속에 갇혀 버린 것은 ‘짧았던 밤’ ·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 · ‘아무도 것도 모르던 촛불’ ·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 · ‘내 것이 아닌 열망’ 등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 ‘빈 집’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누가 살아도 그 집은 그가 들어가지 않는 한, 언제나 ‘빈 집’일 뿐이다.
이렇게 기형도는 개인적 상처에다 보편적 의미를 부여하여 ‘가난’과 ‘이별’의 체험을 의미 있는 미학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우리 시대의 가장 소중한 시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작가소개]
기형도(奇亨度)
1960년 경기도 연펼 출생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등단
중앙일보사 기자
1989년 사망
시집 : 『입속의 검은 잎』(유고시집, 1989), 『기형도전집』(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