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소제목을 '십일조 시대는 지났다'로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이 아닌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에게는 십일조 시대가 지났다느니 아직 계속되고 있다느니 하는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와 같이 유대인이 아닌 소위 이방인들에게는 할례 시대가 지났다느니 하는 말을 할 필요조차 없듯이 십일조도 그러하다.
초대 교회에서도 할례나 십일조가 문제되었던 사람들은 유대인으로 있다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이스라엘의 백성으로서 당연히 할례를 받고 십일조를 내야만 하였다.
그것은 이제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기보다 국민으로서의 의무였기 때문이다.
할례는 일종의 출생 신고와 같은 것이었으며 십일조는 종교세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죄를 속하는 성전 제사 행위는 할 필요가 없었고 또 하지 않았다. 성전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무효화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거부해야만 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은 스데반과 야고보를 비롯하여 순교당하는 자들이 속출하였고 유대 당국의 핍박을 받아 흩어져야만 하였다.
A.D. 70년에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지 않았다면 성전 제사를 거부하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핍박을 받고 순교를 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가 되어 각지에서 예수를 전하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아직 유대교의 잔재가 남아 있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믿게 하면서도
"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유대인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발상인지도 모른다. 갈라디아서를 비롯한 바울 서신 곳곳에 그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15: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모세 율법과 비유대계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정립하는 회의가 예루살렘에서 열렸을 때, 특히 바리새인으로 있다가 예수를 믿은 유대인들이 비유대계 그리스도인(이방인)들도 할례를 받도록 하고 모세 율법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도행전 15:5)
사도행전 16: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쌔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줄 다 앎이러라
그 회의에서 많은 변론과 논쟁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 많은 변론과 논쟁 중에 십일조에 관한 이야기들도 분명히 오고갔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누구인가. 철저한 십일조주의자들이 아닌가. 그런 바리새인으로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 십일조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또한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도록까지 권유하고 있는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이 십일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겠는가.
많은 논란이 있은 연후에 드디어 베드로가 일어나 입을 열었다.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비유대계 그리스도인)의 목에 두려느냐. (사도행전 15:10)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들'의 목록 중에 십일조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모든 논의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회의를 주관하는 의장으로서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사도행전 15:20)
예루살렘 회의와 관련하여 탈무드에 나오는 내용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탈무드 시대의 유대인은 비유대 민족과도 곧잘 어울려서 함께 일을 하고 생활을 같이했다. 유대인에게는 천사가 지키라고 일러준 613가지 계율이 있었다. 그러나 유대교는 비유대인을 굳이 유대화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선교사를 보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상호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비유대인에게 그 중에서 꼭 지켜야 할 다음과 같은 계율 일곱 가지만을 주었다.
① 산 짐승을 잡아 그 자리에서 날고기로 먹지 말라
② 남을 욕하지 말라
③ 도둑질을 하지 말라
④ 법을 어기지 말라
⑤ 살인하지 말라
⑥ 근친상간하지 말라
⑦ 불륜을 저지르지 말라
(《탈무드》, p. 113, 마빈 토케이어, 우상호 옮김, 두풍)
탈무드에서 비유대 민족에게 준 일곱 가지 계율과,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한 비유대계 그리스도인을 위한 네 가지 권면 사항이 비슷한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렇게 탈무드에서조차 비유대 민족을 율법과 계율에 묶어두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초대 교회 예루살렘 회의에서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할례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십일조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어떤지 몰라도
"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원래부터 할례니 십일조니 하는 모세 율법의 규정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
그들은 모세 율법을 지키다가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아니다. 모세 율법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예수를 믿은 사람들에게
다시 모세 율법의 규정들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유대교인으로 만들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 회의 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던 것이다.
우리가 저희(비유대계 그리스도인)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사도행전 15:11)
지금 한국 교회들이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십일조(그것도 전통적인 십일조가 아닌 변질된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의 할례 강요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에 넘어가고 있는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외친 적이 있다. 이 바울의 외침은 십일조와 관련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갈라디아서 5:1-6)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는 말씀은
'십일조나 무십일조나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는 구절로 고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쯤되면 십일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십일조와 할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반박할 것이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 지키는 십일조는 유대인들이 율법적으로 지키던 그것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자율적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도 할례에 대하여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우리가 할례를 주장하는 것은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물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는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주장한 자들도 있긴 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몸의 일부를 조금 자르라는 것인데, 그것도 못하겠다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그리스도에 대한 배은망덕이 아니냐.'
하지만 바울의 입장은 단호하다. 율법과 유대교의 잔재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조금도 끼여들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런 잔재들이 결국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을 흐리게 하고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교회 형편도 그러하다. 십일조 문제로 인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고민들을 하고 있고, 십자가 복음의 은혜로 주어진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고 있다.
요한복음 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였다. 이제 예수를 믿은 우리는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여호와 하나님과 계약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친자의 관계로 들어선 것이다.
여기에 관한 말씀으로는 갈라디아서 4:1-7보다 더 나은 말씀이 없을 것이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서 4:1-7)
십일조를 내면 축복을 해주는 그런 계약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 나의 것이요 나의 것이 아버지의 것인 놀라운 친자 관계로 들어섰다는 말이다.
계약 관계에 있을 때는 계약 상대방의 수입이 얼마고 그 수입의 십일조를 나에게 바치나 안 바치나 따지고 그러겠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로 말미암아 친자 관계로 들어선 마당에는 그런 차원을 뛰어넘게 된다.
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자식이 얼마나 벌어오나 일일이 따지고 그 수입의 10분 1이 얼마나 되는지 전자 계산기를 들고 꼼꼼이 계산하고 있겠는가.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전자 계산기를 들고 우리의 십일조를 계산하시면서 십일조를 바치나 안 바치나 눈을 부릅뜨고 계시겠는가.
절대 그럴 리가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또한 로마서 8:21에 보면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가 얼마나 놀라운 자유인지 '영광의 자유'라고 표현하였다.
한국 교회가 그 동안 십일조의 멍에를 신자들에게 씌움으로써 얼마나 하나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를 훼손해왔는가.
처음에는 좋은 의미로 출발했던 십일조라 하더라도 이제 그것이 교회 운영을 위한 편리한 헌금의 방편 정도로 전락하고 율법화되고 있다면 유대교의 잔재를 없애는 의미에서도 십일조라는 용어를 교회에서 사라지게 해야 할 것이다.
얼마든지 다른 이름으로 대체할 수도 있는 십일조를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십일조가 어떻게 쓰여져야 한다는 규정들은 시효가 지난 옛 언약으로 여기고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는 규정들만 아직도 시효가 지나지 않은 것처럼 내세우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십일조를 내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십일조가 십일조 정신에 따라 쓰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유대교의 십일조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에 해당하는 우리하고는 원래부터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속히 궤도 수정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도 아니요 유대교도 아닌 이상한 방향으로 흐러가면서, '에클레시아(교회 또는 회당)'가 아니라 사이비 '히에론(성전)'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지금도 유대교인들은 모세 율법에 따라 철저히 십일조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십일조를 바칠 성전이 무너졌기 때문에 십일조를 아예 공동체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한다. 유대교인들은 십일조를 바칠 곳이 없게 되는 바람에 오히려 십일조를 십일조 정신에 맞게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셈이다.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회당 정도에 불과한 각 지역의 개교회(個敎會)들이 도리어 성전 노릇을 하며 십일조를 모아 십일조 정신과는 상관없이 사용하는 것을 보고 유대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첫댓글삯군들은 십일조가 많이 모이면 좋아합니다.. 십일조 떼먹으면 믿음에 큰 오류가 생기는 걸로 세뇌시키지요. 구약의십일조가 제사장들을 위한거였다면 예수님이후의 자녀들은 모두가 거룩한 대제사장임으로 십일조의 개념이나 정신은 신약의 연보로 전환되어짐이 합당한 결과겠지요.. 십일조는 더이상 목사들을 위해
첫댓글 삯군들은 십일조가 많이 모이면 좋아합니다.. 십일조 떼먹으면 믿음에 큰 오류가 생기는 걸로 세뇌시키지요. 구약의십일조가 제사장들을 위한거였다면 예수님이후의 자녀들은 모두가 거룩한 대제사장임으로 십일조의 개념이나 정신은 신약의 연보로 전환되어짐이 합당한 결과겠지요.. 십일조는 더이상 목사들을 위해
하나님이 남겨놓으신 은혜는 아닌거지요. 여전히 율법에 매여 십일조에 매여 자유치 못함은 삯군들의 거짓가르침으로 인함이요, 그 안에서 굳이 나오고자 하지 않음이지요.. 형제님 말씀에 유익함을 얻었습니다.
십일조는 신앙고백이요 은혜받으면 하는것이지 강요한다해서 한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감동감화 주시기에 주님께 드립니다 구원의 크신은헤에 감사함으로 드릴때에 경제축복 함께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