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2:18~3:10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지면에 있는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사람의 식물이 되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지으신 그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했습니다. (창 1:26-31)
그러면서 2장 16-17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 뱀이 가장 간교했는데, 하와는 이 뱀의 꾀임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고 나중에는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한 아담과 그 아내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간다”는 잠언의 말씀이 맞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면 그 마음이 멀어집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아담이 죄를 범한 후에 하나님을 피하려 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죄인을 찾아오셨습니다. “내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라고 한 것이 아니라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은혜의 음성이었습니다. 아담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죄인이 먼저 자기 하나님을 찾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사람이 먼저 자기 하나님을 찾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을 찾으셔야만 했습니다.
양이 제 길을 잃었습니다. 길 잃은 양은 목자가 찾지 않고는 자기 우리에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죄는 인간이 범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범죄할 수는 있으나 죄를 지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갔음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기를 만드신 분을 멀리 피하고 그 분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려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죄를 범하면 얼마나 어리석게 되는가를 말씀하십니다. 본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혜로웠지만 뱀의 흔적이 인간의 성품 속을 한번 통과한 후 인간은 철저하게 어리석어지고 말았습니다. 벌거벗은 것을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려 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나무 뒤에 숨어 하나님을 피하겠다고 했으니 얼마나 바보스럽습니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는 사실을 범죄한 인간은 모릅니다. 죄를 범하는 인간은 하나님이 보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그럽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추궁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사람의 안목을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친히 아담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짧은 한 마디 속에는 여러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1. 무딘 감각을 깨우치는 질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우리의 양심을 마비시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화인 맞은 양심’이란 말이 나옵니다. 죄는 고통 없이 양심을 죽이는 독약입니다. 인간이 죄로 인해서 결국은 죽습니다. 겨울에 얼어죽는 것처럼 잠자는 가운데 죄로 인해 죽습니다. 죽기까지 잠을 잡니다. 인간에게 임한 은혜 중 최초의 역사는 잠자는 영혼을 깨워서 눈을 뜨고 자기가 당하고 있는 위험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말씀은 “지금 네 자신을 보아라. 너는 지금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비참한 존재가 된 것을 발견하느냐? 너는 하나님에게 잃어버림을 당했고, 행복도 잃어버렸고, 평화스러운 마음도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양심이 죄로 인하여 마비된 상태에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도와 주시옵소서. 내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그래서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2. 죄를 깨닫게 하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범한 죄를 자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나는 너를 내 형상대로 만들었다. 나는 너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내가 만든 모든 것을 네게 주어 다스리게 했다. 공중의 새, 바다의 고기, 이 동산의 모든 좋은 것을 다 네게 주었다. 밤에는 달이 너를 상치 못하게 했으며, 낮에는 해가 너를 해하지 못하게 했다. 나는 너를 위해 바람을 잠잠케 했으며 네가 배불리 먹고 살찌도록 나무는 과실로 열리게 했고 만물이 네가 만족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네게 부탁한 것은 조그마한 일 한 가지뿐. 내 자신을 위해 보유해 둔 나무에 접근하지 말라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네가 어디 있느냐?”
뱀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했습니다. 아주 영광스럽게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습니까? 죄는 우리에게 “내가 너에게 쾌락을 주겠노라”고 말합니다. 사실 순간적으로 쾌락을 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쾌락 뒤에 따라 온 고통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범한 죄를 깨닫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죄를 범하고도 죄를 범한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자기는 죄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나단의 지적을 받고 그 자리에서 꼬꾸라지고 통회 자복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축복이 된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잃어버린 심령을 슬퍼하는 음성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너는 나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더니 이젠 나를 피해 달아났구나. 전에는 네가 행복하더니 지금은 불행하게 되었구나. 너는 전에는 영광스럽고 복스러운 나의 형상을 지녔었는데 지금 그 형상이 어떻게 되었느냐? 나의 형상이 네 안에서 이그러지고 너는 이제 네 자신을 흙으로 만들어 다만 감각적이며 마귀적인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구나. 오, 불쌍한 아담이여.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두고 슬퍼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방탕한 길로 나아갔습니다. 얼마 후에 만나니 꼴이 말이 아닙니다. 부모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너, 어떻게 이렇게 됐니?” 밖에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아직 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죄인된 우리를 보시고 계십니다. 여기 자비의 눈길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달려갔습니다. 여기 자비의 발길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포옹합니다. 여기 자비의 팔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입을 맞추십니다. 여기 자비의 입술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누더기 옷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자비의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새 옷을 입힙니다. 여기 자비의 행위가 있습니다. 놀라운 자비입니다. 이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어떻게 환영을 하시는지 안다면 우리는 더 이상 멀리 떠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찬송가 321장)
1.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부르시네.
사랑의 햇빛을 왜 버리고 점점 더 멀리 가나.
지금 오라 지금 오라 자비한 주께로 지금 곧 나아오라.
2. 고달파 지친 자 쉬라시네 쉬라시네 쉬라시네
무거운 짐진 자 다 나오라 쉬게 해 주시리라.
3. 주께서 지금도 기다리네 기다리네 기다리네.
죄 짐을 가지고 다 나오라 어서 주 앞에 오라.
4. 주님의 소리를 들어보라 들어보라 들어보라.
그 이름 믿는 자 복 받으리 어서 곧 일어나라.
4. 사람을 찾으시는 음성입니다.
“내가 너를 찾으러 왔노라. 네가 어디 있든지 상관할 것이 없이 나는 너를 찾아야겠다. 내 사랑의 눈길이 너를 발견할 때까지 계속 찾겠다. 내 사랑의 손길이 네게 미치기까지 나는 너를 쫓겠다. 내가 너를 내게 데리고 와서 너와 내가 화해하기까지 나는 너를 계속 붙들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찾고야 맙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너를 찾으러 왔다. 무엇을 지불하고서라도 너를 찾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하나님, 나는 회개할 수도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니까 내가 너를 찾으러 왔어. 이젠 내가 너에게 회개와 사죄를 주기 위해 높은 보좌에 올라갔노라.” “그러나 하나님, 나는 하나님을 만족스럽게 믿을 수가 없어요.” “아니다. 나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는다. 내가 너에게 믿음을 주러 왔어.” “그러나 하나님, 나는 내가 기도드려도 합당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하며 네 소원을 이루려 왔어.”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도 내가 얼마나 악한 사람인가를 모르실 겁니다.” “무슨 말을? 나도 네가 그런 사람인 것을 다 알고 있어. 내가 네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은 것은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하려 한 것 뿐이야. 나는 너를 너무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하나님, 나는 죄인의 괴수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나만큼 그런 악한 죄를 지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아니다. 나는 바로 그런 너를 구원하러 왔어.” “그러나 하나님, 저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이봐, 나는 이스라엘의 버림받은 사람을 구원하러 왔어.” “하나님, 나는 소망이 없을 정도로 죄만 지었는데요.” “그랬었지. 그러나 나는 소망 없는 죄인에게 소망을 주러 왔어.” “아닙니다. 하나님, 나는 멸망을 받아야 마땅할 놈입니다.” “그럼, 그러나 나는 율법을 완성하고 그것을 영화롭게 하여 네가 받을 벌을 내가 대신 받으러 왔어.”
여러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귀한 말씀만 주시기 위해서도 아니요, 놀라운 이적을 행하기 위해서도 아니요, 귀한 삶의 본만 보여 주시기 위해도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로 말미암아 막힌 담을 헐고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화목의 제물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창세기 3장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했는데 여기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므로 범죄한 인간이 피흘림이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대신해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시고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잡은 짐승의 숫자를 우리는 셀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히브리서 7장27절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더러운 죄, 아무리 흉악한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에 불타 우리 때문에 우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안타깝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대답만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