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술자리를 같이했던 어느 분이
인터넷 종합검색에 자신의 이름을 치면
엄청난 분량의 자료가 나와있다는 소릴 듣고
어젯밤엔 그 말이 생각나 호기심에
그분의 이름을 넣고 검색해보니
과연 그 분량이 대단했다
그럼 난 여지껏 이름 석 자도 없이 살아왔다는 것일까
내 이름도 한번 검색 해볼까
나올 리야 만무하지만
동명이인이라도 나오겠지 하고 검색 해보니
하하하~ 나오긴 나오네
안 나오는 것보다야 났겠지만
엥, 예전에 감투 쓴 게 나오네
인터넷이란 게 재미는 있는 것이구먼
그렇다면 내가 존경하는
나의 작은 누나는 나올까
검색 해보려는 순간 누나의 힘들었을
지난 과거가 필름처럼 펼쳐졌다
나보다 다섯 살 위인 누나
중학교 때부터 매년 연말이면
두툼한 일기장을 나에게 선물했던 누나
가사가 기울다 보니 글재주가 특출했던 누나는
여기저기 글을 응모하여 그 당선 금으로
내 용돈을 대 주었던 누나
그 누나
다행히 괜찮은 집안으로 출가를 하게 되었는데
몇 해 전엔 힘들다는 소릴 들었다
원래 돈버는 것하곤 거리가 먼 매형이
몇 번의 사업으로 다 말아먹고
돈도 되지 않는 작품사진에 매달려
죽이 되는지 밥이 되는지 모르며
바다를 넘나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당선금 사냥에
뛰어들어 두 애들의 대학 학자금을 마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떤 식이냐 물으니
시 소설 수필 시나리오 수기 등 특별히
장르 가리지 않고 여러 개의 가명으로
응모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땐 웃지 못할 일도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다
일 이 삼등을 독차지 하는 경우도 있고
시와 소설 시나리오 등이 함께 당선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집 근처에서 마주치게 되어
어쩐 일이냐 물으니
벼룩시장이란 곳에
당선금 백만 원 받으러 가는 길이라 했다
모 방송국에서 전화가 오길 우연히 역대
당선자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다보니
같은 번호가 수없이 나와 알게 됐다며
응모 좀 자제해달라고
정중히 부탁하더라는 것이다
갈수록 응모할 곳도 마땅치 않다는 소릴 듣고
왜 그리 마음이 아팠던지
그 누나
이젠 애들 둘 다 대학을 졸업하여
아들놈은 회계사 시험에 합격했고
딸애는 교사 발령을 받은 상태인데
다음달에 전문직 종사자와 혼례를 치른다는 것이다
본인의 행적 또한 좀처럼 밝히길 꺼리는
누나이기에 검색에 들어가 봤자 나오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검색 해보니
하하하~~~~~~
나보고는 사이버 활동하지 말라고
만날 때마다 엄하게 꾸짓던 분이
제1회 사이버 문학상(국민카드) 시 부문
제2회 사이버 문학상 수필 부문에 이름이 나와 있다니
아마 여기에도 여러 이름으로
응모하여 기백만원 챙겼을지도 모르나
이제 아들 딸 다 키워 놨으니
순수 작품 활동을 하려는 사람을
위해서나 가정 살림이 어려워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물러나
앉아 있길 바라며
누나 이름으로 된 시와 수필만
퍼 와봤다 현재 시와 수필 소설 부문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kbs 단막극을 맡고 있는 상태라서
이름은 밝히지 않는 게 도리일 것 같아
글만 소개한다
제1회 사이버 문학상 중에서
"천마도" (시)
박물관 깊숙히 갇혀있는 천마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날지도 못하고 굳어버릴 것만 같았던 누군가의 날개가 생각난다 그 사람은 마음이 유리같아서 바닥까지 환히 보였는데 살짝 눈만 흘겨도 쨍그랑 소리를 낼 것같아 늘 시선을 조심해야했는데 어느날 가만히 눈여겨 보았더니 고귀하고 기품있는 그 날개가 눈에 띠는 것이었다. 거친 바람에 찢길까 겁을 내며 제 눈과 제 귀를 한사코 막으며 날개를 접고 또 접는 것이었다
천년의
침묵을 깨고 박차를 가하라
백화수피 올을 뽑아
푸른 혈맥 새겨넣고
종횡으로 천공을 누비며
시공을 넘어온 빛이여
결 고운 갈기 휘날리며
선조의 넋을 입고 승천하라
어두움을 헤쳐 면벽을 일깨우라.
둥근 어깨 더듬으면
욕망의 푸른 돌기
날아라 창문을 열고 날아라
제 귀와 제 눈과 제 날개를 스스로 퇴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달은 것이었을까
날마다 한 개의 세포와 한 개의 마디를 열기 위해 주술을 걸었다 제 몸에 아픔의 씨앗을 심었다. 매번 겁을 먹고 돌아서던 그 문안에 세상에서 가장 오만한 것이 살고있다고 믿었는데 마음 약한 것이 살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 귀띔해 주었다. 맘 약한 것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한 방울 두 방울 피를 흘리며 날개를 펴고 있는 것이다. 희망이 아픔의 핵이었다는걸 알았기 때문이다
제2회 사이버 문학살 중에서
"석수어"(수필)
아랫동서가 냉동칸을 다시 굴비로 채워 놓고 갔다. 고맙다라는 말보다 우
리 냉장고가 이 무슨 호강이냐 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온다. 꺼내 먹기 용이하
게 두 마리씩 포장되어있는 거며 참굴비답게 노란빛을 띠고있는 것이 굽기도
전에 맛에 대한 신뢰를 느끼게 한다.
산란을 위해 동지나 해역에서부터 추자도와 흑산도 해역을 거쳐 서해안으로
회유 하는 참조기는 곡우 사리 경 칠산 앞 바다를 지날 때면 황금빛 윤기가
돌고 살이 오르며 알이 가장 충실하다고 한다. 이 때 잡은 참조기를 가공 건
조한 것이 영광굴비며 굴비 중 그 맛이 으뜸이라는 장황한 나의 설명을 성년
이 된 딸아이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영광이건 추자도건 그냥 작은 엄마표 굴
비가 최고라고 말한다. 그말은 조기가 굴비가 되기까지 아무리 좋은 여건에
있었다해도 작은 엄마의 안목과 손이 아니면 그 맛은 믿을게 못된다는 뜻이
며 고마움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라는 걸 안다.
식구들은 도시락 찬으로 구운 굴비를 가장 좋아한다. `아끼지 말고 도시락에
도 넣어주고 언니도 한 마리씩 통으로 구워 드세요.` 하고 동서는 아끼다 내
입으로는 하나도 들어가지 못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통으로라는 말을 강조하
지만 우리까지 챙기자면 동서 입으로 들어갈 것이 있기나 할까? 아끼느라 한
끼용이라는 두 마리를 선뜻 굽지 못하면서도 누가 뭐해서 밥을 먹느냐고 걱정
하면 나는 우리집 냉동 칸을 생각하고는 턱없이 뿌둣해지는게 한편 미안하기
도 하다.
수입원이 신통치 않은 우리집이 반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때 동서는 우리
집 냉동 칸이 언제쯤 바닥날까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는 생활비를 뚝 떼
어 맛좋은 굴비를 사서 자기네는 시늉만 남기고 우리집 냉동칸을 채울 것이
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씀씀이에 대한 고마움이 더해진다.
한식당에서 아무도 손대지 않는 새끼굴비가 아까워 넵킨에 둘둘 말아 내가
핸드빽 속에 넣어온 이후로 동서는 기울어 가는 우리집 가계에 기를 돋을
수 있는 것이 굴비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정약전이 그의 저서 <자산어보>
에서 조기는 약성이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강하거나 약하지 않으며, 약간 단
맛이 있고 전혀 독이 없어서 위에도 유익하며, 복창 (뱃속의 탈이 생겨 배가
답답하고 팽팽하게 부어오르는 병)과 폭리(설사가 심하게 생기는병)를 다스리
고, 식체(음식물이 체한증상)와 기체(기가 약해서 생기는 신경성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고 적어놓았듯이.
도시락을 싸고 남은 굴비의 잔해를 수습하는데 어머니가 생각난다.
우리 어렸을 적 어머니는 조기를 사다가 항아리에 소금간을 해놓고 할머니
와 아버지의 겸상에만 구워 올리곤 했다. 어머니는 통통한 굴비를 자배기에
담고 풋고추, 실고추, 파를 송송 썰어 얹은 다음 밥이 한소끔 끓어오르면 밥
솥에 넣어 다시 뜸을 들였다. 가마솥 뚜껑을 열고 뭉근하게 쪄진 굴비 자배기
를 꺼낼 때면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굴비에 풋고추 익는 냄새가 어우러져서 코
를 자극했다. 그렇게 쪄낸 굴비에 손을 댈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우리
집에서 할머니와 아버지말고는 없었다. 어머니는 상에서 물린 굴비의 꼬리와
머리쪽에 붙어있는 살을 발라 자식들 입에 넣어 주었는데 새 새끼처럼 입을
벌렸던 어린것들은 목으로 넘어갈 것이 없다는 데에 불만을 품고 툴툴거렸
다. 그러면 당신은 굴비 살점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것처럼
" 야야, 어두일미라더니만 요것이 영양가 있는 것은 다 대가리에 저장허고
있었는갑다. 얼매나 고소허고 맛있는지 한번 빨어 먹어봐라." 하시면서 비린
맛이 다 우러나고 뼈가 하얗게 부스러질 때까지 뱉을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그걸 못마땅하게 생각하신 아버지는 "늬 엄마 제사상에는 굴비 대가리만 놓으
면 되겄다." 라고 어깃장을 놓곤 하셨다.
어머니가 굴비머리를 손에 들고 입에 넣어 보라고 했을 때 나는 한사코 고개
를 저으면서 의문을 품기도 했다. 어머니는 정말 굴비 머리가 맛있는 걸까?
하고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어머니는 내 취직을 부탁하려고 나를 데리
고 군산 이모 할머니 댁에 간 일이 있었다. 할머니의 사촌동생인 이모할머니
는 당신 아들이 비행장에 다니며 벌어들이는 돈으로 식구들이 의식주 걱정없
이 호강하며 산다는 얘기를 오실 때마다 하셨는데 아닌게 아니라 이모할머니
의 입성이나 할머니에게 건네는 선물들을 보면 농사나 지으며 사는 우리 집과
는 다를 것이 분명하긴 했다. 게다가 양옥집 수돗가에선 수도물이 펑펑 나오
고 방마다 전깃불이 대낮같이 들어온다는 말도 했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이
모할머니가 부러운 나머지 언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시네가 애비 등골
을 뺀다며 딸들이 상급학교 가는 걸 한사코 반대하더니 내가 졸업을 하자마
자 이모할머니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붉은 녹물 때문에 안동네에서 물
을 길어다가 불라우스를 빨고 전깃불을 아끼느라 두 방 거리 걸어놓은 삼 십
촉 전구 밑에서 책을 보아야 했던 나 또한 수돗물로 하얗게 빤 블라우스를 입
고 대낮같이 밝힐 수 있는 이모할머니 댁에서 비행장에 다닐 수 있다면...하
는 희망을 품었다.
" 갸가 비행장서 높은 자리에 있담서. 거그 아니라도 이만큼 배웠응게 갈데
사 많겄지만 그리도 갸가 데리고 있으먼 아는가? 혹시 좋은 신랑감이 생길
지."
할머니는 그동안 이모할머니의 입담으로 봐서 그깟 취직쯤 쉬울 줄 아셨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깟것`이라고 장담을 해야 옳을 이모할머니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취직이란게 시키고 ?다고 아무 때나 시킬 수 있간? 일단은 자리가 나야
헐 것이고, 자리가 난다고 허드라도 층층시하에 있는 갸 혼자 힘으로는 안될
것인디..."
그렇게 뜻뜻 미지근한 말씀을 남기고 군산으로 가신 이모할머니로부터 이렇
다 저렇다 연락이 오지 않았다. 한철을 그냥 보내게 되자 할머니는 관절염으
로 거동이 불편한 당신을 대신해서 나를 데리고 군산에 다녀오라고 장마 끝
에 우북히 돋아난 잡초를 단도리 하려는 어머니를 채근했다.
군산이 가까워오자 비릿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이모할머니 댁은 군산시내
에 있었다. 같은 모양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주소에 적힌 할머니 집
은 막다른 골목의 근사한 양옥이었다.
"어여 요비링(벨)을 눌러봐."
나는 대문에 부착되어있는 까맣고 동그란 벨을 눌렀다. 그러자 누구세요 하
는 새된 목소리가 흘러 나왔고 미처 누구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빠꼼히 문이
열리면서 언니 또래의 처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여그가 범상규씨집 맞지요. 비양장(비행장)댕기는" 범상규는 비행장에 다닌
다는 이모할머니의 아들 이름이었다. 그 처녀는 잠깐 우리모녀의 위아래를 훑
어보더니 "요것이 그집 요비링인디..." 하며 낮잠을 깨운 훼방꾼 취급을 했
다. 처녀가 손가락으로 가르킨 벨은 대문에 붙지도 못하고 전선에 매달려 대
롱거리고 있었다. 이모할머니가 집 모퉁이에서 나오셨다. 아까 문 열어준 사
람이 누구냐고 묻자 이모할머니는 "으응, 주인집 식모." 하고 대답하셨다. 그
러니까 이모할머니는 방 두 칸 짜리 전셋집에서 사셨던 것이다. 아들 내외가
방 하나를 쓰고 할머니는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손자들과 함께 구석진
방을 쓰고 계셨다.
이모할머니의 며느리는 상당히 멋쟁이였지만 말수가 적은 때문인지 차가워
보였다. 남의 집 모서리를 빌려 사는 것이 마치 며느리 잘못이기라도 한 것처
럼 할머니는 밥을 챙기느라고 달그락거리는 부엌쪽을 향해 "쟈가 씀씀이가
헤퍼. 자네처럼 주모(규모)가 있음사..." 하며 혀까지 끌끌 거리셨다. 거처
할 곳부터 마땅찮다는 뜻으로 새겨들은 어머니와 내가 비행장에 취직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꾼 밥처럼 고봉으로 담은 밥 한 그릇씩을
다 비웠다는 사실이 나중에 생각해도 참으로 신기했다.
그날의 밥도둑이 바로 굴비였다.
항구도시라 생선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어서였을까? 파와 고추를 송송 썰
어 얹고 찐 굴비가 푸짐했다. 그 상에 올려진 굴비에 대한 권한은 전적으로,
손님인 엄마와 나에게 있었으므로 살진 굴비 살을 마음놓고 헤집어 먹기 시작
했다. 그런데 밥을 먹다가 문득 이상한 정경을 보게 되었다. 어머니가 일미라
며 당신이 그렇게 신봉하던 어두를 그날은 하나도 훼손하지 않았으며 행여 어
두일미라는 말을 믿고 내가 엉뚱한 짓을 할까 걱정되었던지 아예 당신 손으
로 살을 발라 내 밥그릇에 올려놓기까지 하셨다.
내 기억으로 어머니가 굴비의 살점을 마음놓고 떼어 드신 것은 그때가 최초
였고 마지막이었지 싶다. 애비 등골 뺄 년들이란 소리를 들으면서 교육을 시
킨 딸들 시집도 보내보지 못하고 너무도 아까운 나이에 뇌암으로 세상을 뜨
신 어머니. 어머니의 병명이 뇌암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다같이 어머니의 희
생적인 삶이 머리에 종양을 키운 거라고 탄식했다.
임금님 수랏상에나 올렸다는 굴비를 할머니와 아버지의 겸상에 빠뜨리지 않
고 올리면서 어머니는 어두일미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아무리 일미일지언정 어
두에서 나올게 뭐가 있었을까. 어머니처럼 굴비대가리를 빨아본다. 아예 두개
골까지 꼭꼭 씹는다. 와드득 씹히는 게 있는데 생선뼈라고 하기에는 이빨에
느껴지는 강도가 세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바라보니 영락없이 굵은 소금알갱
이 만한 차돌이다. 전날 남긴 머리도 헤집어 보았다. 역시 두개골에 한 개씩
돌을 품고 있다.
뱃속도 아닌 두개골에서 돌이 나오다니.
너무도 신기해서 굴비와 조기라는 어휘로 사전을 찾아보았다. 가슴복판으로
서늘한 기운이 지나가는 게 느껴진다. 석수어? 몸의 기운을 북돋우는 생선이
라 조기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그것이 두개골에 한 개씩의 돌을 품고 있어서
일명 석수어라고도 불리운단다. 머리에 돌을 품고 있으면서도 누군가를 이롭
게 하는 성향만 지니고 있었다니...
딸이 `작은 엄마표 굴비`라고 하듯이 나도 `동서표 굴비`라고 발음을 해 본
다. 석수어라는 이름에 걸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어른들 말씀이 밥 수저에 복
이 든다고 했는데 우리가족의 밥수저에 동서는 소복소복 복을 담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굴레, 음미해 볼만한 단어길래 글을 열어 보았지요, 감명 깊게 잘 보고 갑니다. 석수어 이글은 언젠가 감명깊게 읽었던 글이지요, 다시 봐도 역시 깊은 정을 주는 글입니다. 님의 누님이셨군요. 그래 더욱 반갑습니다. 좋은 글 다시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 굴레, 음미해 볼만한 단어길래 글을 열어 보았지요, 감명 깊게 잘 보고 갑니다. 석수어 이글은 언젠가 감명깊게 읽었던 글이지요, 다시 봐도 역시 깊은 정을 주는 글입니다. 님의 누님이셨군요. 그래 더욱 반갑습니다. 좋은 글 다시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장지기님, 우연히 어젯밤 누나의 글을 읽고 어머님에 대한 죄책감에 밤새 힘들었지요. 누나 또한 어렸을 적 저에게 쉼없이 째찍질을 가하던 분이였지요. 위로의 말씀 감사합니다
저는 글을 보는 순간에 님의 집안이 먼저 떠오를까요? ㅎㅎㅎ 부럽습니다. ㅎㅎ ^^*
하하하~~~ 맞아요. 석수어를 읽으면 대충 알 수 있지요 누나 셋 여동생 하나 그중 둘째 누나와 여동생이 시인이고 글 좀 쓴다 하지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