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호를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광끼의 화가! 가난과 고뇌와 좌절의 반복으로 살았던 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호를 열정적인 사람이라 표현하지만 나는 그것을 열정적이란 말로 표현하기엔
너무도 많이 부족한 느낌입니다
고호는 잠에서 눈을 뜨는 순간부터 그리고 또 그리고 쉼 없이 그리기에 몰두 하였습니다.
한 시대를 앞선 천재화가 고호의 머릿속에는 그릴 것들로 꽉 차 있어 캠퍼스에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외골수라 여러 가지의 생각을 가질 수 없었던 고호! 빈센트 반 고호(Vincent van Gogh, 1853-1890)는
17세에 암스테르담 대학 신학부를 졸업하지만 너무 충동적인 성격으로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지는 못하고
큰 화랑(畵廊)의 점원으로 일하면서 그림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화가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런던 지점에 근무 시 하숙집 딸과의 실연으로 깊은 상처를 받게 되어 그것이 평생 그늘이 되어 따라다니며
자신과 세계에 대한 지나친 연민(憐憫)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는 다시 런던과 암스테르담 등지를 전전하며
1877년 5월에 끝내 목사가 될 것을 결심합니다. 그 자신의 말에는 그것은 “교회에의 열렬한 사랑,
그리고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1878년 겨울에 전도사로 벨기에의 보리나쥬라는 탄광지에 부임하여 헌신적이고 열광적인 봉사를 하게 됩니다.
거기서 그자신은 광부들처럼 누더기 옷을 걸치고 그들과 함께 판자 집 마룻바닥에서 자고 환자들을 손수 보살피면서
그들의 비참과 고통에 동참했습니다. 그는 전도사로서 의무와 성의에 최선을 다했지만,
너무나 열띤 그의 헌신에 전도사 위원회와 탄광 업소의 반감과 비난을 샀고, 결국 광부들의 혐오감마저 불러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지나친 희생정신은 사람들을 당혹하게 했고, 도리어 그들을 불안하게 했습니다.
광부들은 마침내 그를 조소하기 시작했고 어린애들은 그를 무서워했습니다. 결국 그는 거의 추방되다시피
보리나쥬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 후 좌절감과 실의에 싸인 비참한 방랑생활은 무엇인가를 뼈저리게 사랑하고
그것에 스스로를 떠맡겨야만 하는 인간들이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신을 향한 것이든 인간을 향한 것이든 너무나 진지하게, 너무나 격하게 사랑했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하는 숙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비참한 실의(失意)의 연속 속에서 자신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우리들은 자기의 그림으로밖에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예술 표현의 비밀입니다.
자신의 내면이 터져 나오는 창문의 모습이 그림이든, 음악이든, 글이든 스스로도 이해하고 준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편지를 쓰면서 이 비밀을 터득해 나아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는 것, 쓴다는 것이
진실한 자신의 표현일 때 그 안에 자신의 길이 있음을 알게 되어 거의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1872년 8월 이래 파리에서 화상(畵商)을 하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서신 안에는 온갖 색채가 펼쳐져 있습니다.
차이나블루의 하늘, 빨간 낙일(落日)에 불꽃처럼 오렌지색으로 빛나는 나무들, 황금빛으로 넘실대는 보리밭.......,
그리고 팔리지 않아 생계에 보탬이 되지 않는 그림을 보내며 생활비를 조르는 이야기까지........
그는 거의 900여 통에 가까운 편지를 썼고 그편지는 유명합니다만 이 편지를 읽는 방법도 사람마다 다양했습니다
고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10년간은 그림에 몰두 했고 동생 테오는 형을 위해서 계속적인 물질에
지원과 많은 격려를 해주었으나 그가 남긴 2000점 정도의 작품중 사는 동안에 딱 한 점의 그림이 팔렸습니다.
남보다 앞선 시대를 살아온 그의 그림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일생은 가난과 정신질환으로 힘들었고 시련과 실패의 연속이였습니다.
1889년 6월, 그는 어두운 밤에 모자위에 촛불을 밝히고
아주 빠른 붓터치로 밤하늘을 그려 나갔지요.
하늘에 심취해서 찰나에 움직이는 느낌들을 그린
“별이 빛나는 밤에(The starry night)”는
고흐가 이세상을 떠나기 13개월전에
생에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있을 때 그렸다는데
그 그림에는 푸른색과 보라색의 밤하늘에 나선형으로 휙 날아 드는 듯한 노란색의 별들이 소용돌이를 이루고 검은 색의 커다란 측백나무도 우뚝 서서 같이 요동을 칩니다. 온 동네와 산들도 꿈틀거리며..이작품을 보면
고호의 어둡고 미칠 듯한 멈출 수 없는 슬픔과 좌절과 끌어오르는 욕망의 광끼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는 밤하늘에 대해서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밤은 낮보다 더 풍부한 색깔을 지니고 있는 것 같구나 더 강렬한 보라색과 푸른색들로 밤은 물들어 있는 거야.’
1890년 7월 그는 얼마 전 그린 “까마귀가 나르는 밀밭“으로 달려가서 권총으로 가슴에 방아쇄를 당기며
.“슬픔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La tristesse durera toujours. (Sadness shall last forever)”라는 유언을 남기고
이틀 후 3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하직 합니다 . 그렇군요 “인생의 고통은 살아 있는 그 자체다.”라고 외친 고호는 영원한 꿈나라로 갔습니다
이제는 외로움과 상처와 가난이 아닌 자유스러운 곳으로 훨훨 날아 마음껏 표현하고 싶었던 그림을 캔퍼스에 가득 그리며,
자연과 사람향한 그의 애정을 온통 눈부신 빛깔들로 채워 따스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는 우주에서 가장 큰 별이 되어
세상을 바라다 보며 행복한 웃음 웃고 있을 것입니다 빈센트 반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에(The starry night)”은
인간이 살아서 가닿을 수 없는, 먼 꿈과 소망의 곳 이였습니다 뭐라고 형용하기 힘들지만 그림을 보는 순간 숨이 탁 막히고,
촌스럽게 눈물까지 흘렀습니다 자연에서 잡아내는 강렬한 색감하며,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붓터치는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의 반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듭니다
고호는 남프랑스 아를에서 강렬한 색채를 뿜어내는 멋진 그림들을 많이 그렸는데,아를에 대해서 편지에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 이곳의 색채는 정말 훌륭하다. 신록의 계절이 되면 북국에서는 흔치 않은 풍부하고 차분한 녹색이 된단다. ...
그리고 풍경은 초록빛, 황금빛, 복숭아빛 또는 청동, 적동 등으로 갖가지 뉘앙스를 지닌 노란색 톤이 된다.
다시 말해서 레몬 옐로에서 시작해 황토색까지를 말한다.또 파란색은 가장 깊은 물 속의 로얄 블루에서
물망초 빛 파란색, 코발트 특히 투명한 청색, 푸른 청색, 보랏빛 청색 등이 된다. ..."
역시, 화가의 눈썰미는 대단히 예리하구나 여겨집니다
말년에 가서 그의 회화는 견고하여 내적인 힘을 지닌 직정적(直情的)인 성격을 띠게 됩니다.
고호의 편지 서간문 후반에 나오는 동료 화가 에밀 베르나아르에게 보내는 편지는 이러한 Vision의 발전 모습이 나타나 교양 소설을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고호의 일생은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에서
“모든 인간의 일생은 자기에 도달하는 길, 자기실현의 길이다”라는 말을 상기시킵니다.
현대미술사의 표현주의에 큰 영향을 미친 인상파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광기와 열정으로 살았던 생을 들여다보면 남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자유인 이였고 시인이며 신비주의자
또한 사상가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어떤 화가도 고호 이상으로 열정적인 관심을 일으켜 주는 화가는 없겠지요.
언젠가, 고호의 흔적을 따라 남프랑스로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강렬한 태양빛을 느껴보고 싶어서......--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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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무국장님 위대한 예술가는 하나같이 수명이 짧다는것과 고생을 많이 했다는것과,독학으로 공부했다는 것입니다
가슴 찡한 글입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