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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7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13,44-52
요한 14,7-14
모든 신앙인은 “나를 본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로 나아가는 여정에 있다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 봉성체를 다니면 정말 예수님을 맞으시는 분들의 얼굴이 천차만별입니다.
대부분은 천사와 같은 얼굴로 사제를 맞이합니다.
참으로 기억에 남는 한 할머니가 계셨는데 얼굴이 말 그대로 천사였습니다.
봉성체가 끝나면 이불 밑에서 몇만원이 돈 봉투를 꺼내서 꼭 저에게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 연세에 어떻게 그렇게 얼굴이 고우신지 저도 그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분을 그렇게 평했습니다.
그런데 한 요양병원에서 어떤 분에게 성체를 영해 주려고 한 적이 있는데 그분은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얼굴이 마치 마귀와 같았습니다.
심지어 치아도 육식동물처럼 뾰족해져 있었고 눈은 흰자가 많이 보였으며 입에서는 끊임없이 욕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몸은 사람들에 의해 침대에 묶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온전한 의식이 없다고 판단하여 성체를 영해 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기를 의식도 있는 사람이고 봉성체를 기다렸다고 하기에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예식을 진행하고 성체를 영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성체를 뱉어버렸고 침이 묻어 녹아내리는 성체를 제가 영해야 했습니다.
그런 저를 향해서 계속 끊임없이 욕설을 해 댔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과는 나이가 들수록 그렇게 외모까지도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라고 되물으십니다.
유튜브에 지금 올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삼위일체는 한 분 안으로
다른 분이 성령으로 들어오셔서 하나가 되는 친교의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오신 분이 그 받아들인 이의 주인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받아들인 이는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자신 안의 보이지 않는 주인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과 행동이 바뀝니다.
결국, 외모까지도 바뀔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안에 계신 분의 능력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세례 때 인간들에게 삼위일체를 계시하시기 위해 성령으로 아버지를 당신 안에 모시고 그 이후부터 아버지의 뜻을 전하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제 당신 뜻대로 살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사셔서 아버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자동차 운전자의 성격을 알려면 그 차가 어떻게 달리는지 밖에서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을 보면 그분 안에 계신 아버지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당신도 한 몸을 이루는 삼위일체이니 우리가 당신을 드러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인으로 사시면 우리는 이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표징입니다.
물론 표징이나 이적도 일으키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무언가를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물 위라도 걸을 수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조금씩이라도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고 결국 나를 본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본 것이라 할 수 있게 됩니다.
너새니얼 호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을 잘 아실 것입니다.
어니스트는 그 마을의 매우 온화한 인간의 얼굴 모습을 닮은 큰 바위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얼굴을 닮은 사람이 그 마을에 나타날 것이란 예언도 믿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그런 얼굴을 닮은 사람을 찾았습니다.
자신이 그 얼굴로 변해가고 있음을 잊은 채로.
한 시인이 늙고 주름졌지만 온화하고 겸손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을 한 죽음이 임박한
어니스트를 보며 마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시오! 보시오! 어니스트 씨야말로 큰 바위 얼굴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어니스트를 쳐다보았고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가면서 분명히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용모를 지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 말했습니다.
큰 바위 얼굴은 어니스트의 주인이 되었고 그렇게 그를 변화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도 나 자신은 절대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였다고 믿을 때 누군가로부터 그분을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 가면 안에 숨겨진 참 우리 자신이 되시기 위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십니다.
모든 신앙인은 “나를 본 것이 곧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삼위일체 친교의 목적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27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복음: 요한 14,7-14
깨닫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보다 본격적인 도약을 시작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 제자로 간택하신 필립보 사도,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그가 오늘은 정말이지 전혀 엉뚱한 발언을 해서 예수님 속을 긁어놓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필립보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신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공을 들여 제자들에게 특별 과외까지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필립보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비애나 상심은 무척이나 컸던가 봅니다.
필립보를 향한 예수님 책망의 강도가 아주 큽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우리네 인생이란, 우리의 신앙 여정이란 지속적인 깨달음의 길입니다.
너무나 크신 하느님이시기에 우리 인간의 짧은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하느님, 때로 알쏭달쏭한 하느님, 인간의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하느님이시기에 납득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간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진리를 볼 수 있는 맑은 눈이 필요합니다.
깨어있기 위한 부단한 자기 단련이 필요합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깨닫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보다 본격적인 도약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참된 영적 예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평생 죽을 고생을 다했지만 죽기 일보 직전까지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그 인생처럼 불행한 인생도 다시 없을 것입니다.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인생은 참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삶을 동물적인 삶, 돌덩어리나 나무토막과도 같은 삶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획득해야 할 깨달음을 과연 어떤 깨달음입니까?
예수님께서 간단하게 그리고 명명백백하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 하느님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는 하나라는 것. 예수님은 곧 그리스도, 메시아, 더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 자체라는 것.”
더불어 우리가 획득해야 할 깨달음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하느님은 대체 어디에 계시는가?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죄와 비참으로 얼룩진 이 세상 한 가운데,
고통받는 우리 동료들 안에 현존하신다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
죽음은 또 무엇인가?
생의 끝맺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을 시작하기 위해 묶은 껍질을 벗어버리는 과정이라는 것, 마지막 날은 우리네 인생 곡선 안에서 가장 하한선을 긋는 절망의 순간이 아니라 절정의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은 똑똑하고 잘난 내가 아니라 부족하고 죄인인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나란 존재의 부족함을 아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라는 것, 고통스러운 매일의 현실이 사실은 꽃봉오리처럼 소중하다는 것을, 부족해 보이는 이웃들이 눈물겹도록 고마운 대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4주간 토요일 강론>
(2024. 4. 27. 토)(요한 14,7-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1-14).”
1)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요한 1서 4장에 있는 요한 사도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2.16ㄴㄷ).”
사랑을 주든지 받든지 간에, 사랑을 통해서,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를 “사랑은 하느님이시다.”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계신 곳에 사랑이 있고, 그곳이 어디든지 간에,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물론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지만, 우리가 생생하게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은 사랑을 줄 때와 사랑을 받을 때입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라는 요한 사도의 말에 대해서, “모세와 엘리야와 이사야가 하느님을 보았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와 이사야가 하느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난 사람들이긴 해도, 그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뵌 것은 아니고(탈출 33,18-23; 1열왕 19,11-13; 이사 6,1-8ㄷ),
하느님의 등만 보았거나, 하느님의 음성만 들었습니다.>
2) 7절의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는 “너희가 나를 알게 되면”으로 우리말 번역을 바꿔야 합니다.
이 말씀에서 ‘알다.’ 라는 말은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게 되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이(신앙인들이)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면 하느님과도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도들은 이미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었기 때문에, 하느님과도 이미 일치를 이룬 상태이고, 하느님을 이미 뵌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 사도들이 완전하게 일치를 이룬 것은 아니었고,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기 ‘시작한’ 상태였고,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완성된 일치’를 향해서 나아가는 중이었습니다.>
3)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이 완전히 일치되어 있음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이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뵙는 것은 곧 하느님을 뵙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라는 말씀은, 당신이 일으키신 기적들과 표징들을 보았다면 당신과 하느님이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있음을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믿지 못하겠거든”이라는 말씀을, 표현만 보면,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 데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지만, 예수님 말씀에 부족한 점이 있어서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의
‘믿으려는 노력’이 부족해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과 표징들을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는데, 대표적인 표징은 ‘부활’입니다.>
4)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사도들이 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더 먼 곳까지 가서 더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사도들이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를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에 승천하실 것이기 때문에,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받아서 해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라고 기도하셨는데(요한 17,15),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데려가지 않으시고 세상에 남겨두신 것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이지만, 지상에서의 신앙생활 자체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쪽 세상에서의 인생과 신앙생활을 모두 건너뛰고 하느님 나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청하는 것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라는 약속은, 당신이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심을 나타내신 가르침이기도 하고, 언제나 항상 신앙인들과 함께 하면서 신앙인들을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을 소외시키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