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은 시종일관 천주교 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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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열린세상 날짜 : 12-01-28 08:33 조회 :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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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선의 실학자로 위대한 사상가였던 다산 정약용 선생의 탄생 250주년입니다. 오늘 <문화라운지>시간에는 천주교 신자로서 다산의 생애를 짚어보고 천주교 박해시대의 다산은 왜 천주교 가치관으로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는지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교회 다산연구가인 수원교구 용인대리구장 김학렬 신부님 연결합니다.
-김 신부님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십니까.
-올해 다산의 삶과 사상이 다방면에서 재해석되고 있는데요. 천주교에서도 연구가 많이 이뤄지고 있잖습니까? 우선 다산의 사상이 탄생 250주년을 맞이해서 재조명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한 정약용은 임금으로 모시던 정조 대왕과 함께 조선 문예 부흥기를 맞이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학, 과학, 종교 등 전 분야에 걸쳐서 중국의 마테오 리치 신부님을 비롯한 선교사들이 쓴 책을 읽고 눈이 열림으로써 실사구시의 개혁과 변화를 통해 조국의 근대화를 염원하며 그 기틀을 마련한 분이 바로 다산입니다. 2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어서 현실에 대한 바른 판단과 과감한 개혁이 더욱 필요하기에 다산의 정신이 지금도 요구된다고 봅니다. 수차례 진사시에 낙방하던 1782년에 ‘나의 하소연’이란 솔지 시에서 정약용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애닳다마다. 주머니 속에 처한듯 궁벽하거니, 삼면으로 바다가 에워쌌는데 북방에는 산맥이 누르고 있어 사지삭진 언제나 펴지 못하니 욕망 염원 그 어찌 채울 수 있나. 마테오 리치 같은 성여는 만 리 밖 멀리 있거니 뉘 능히 이 어두움을 밝혀주려나”하고 읊고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어떤 계기로 천주교 신자가 되신 건가요?
▶한국 천주교의 창립주역은 바로 이벽 세례자 요한 성조입니다. 그런데 이벽 성조의 누님으로서, 또한 16세에 과거에 급제한 황사영의 부인 정명연 마리아의 어머니 되시는 분이 바로 정약용의 큰 형수가 됩니다. 따라서 이벽 성조는 정약용보다 8살 위의 사돈 형이 됩니다. 1885년에 발행된 피낭신학교 역사 교과서에 의하면 이벽 성조가 집안에 선대 할아버지들이 동지사, 서장관 등으로 중국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천주교 서적, 천학 처암 등을 읽으면서 15년 동안 공부하던 절이 바로 천진암입니다. 다산은 어릴 적부터 평생 동안 수시로 이곳 천진암을 찾아와 머물며 이벽 형에게 배웁니다. 그 시기에 석경세여선(바위사이로 난 오솔길은), 서가동시유 (내가 어릴 적에 뛰어놀던 곳인데). 따라서 다산은 이벽 성조의 천진암, 천학당에서 서양의 과학과 신앙을 일찌감치 배웠었는데 자영인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밟고 온 후 서울로 입경한 이벽 성조의 집 수표교 모임에서 세례를 받았고, 약전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함께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일부에서는 다산 정약용선생이 천주교 신자이냐, 그리고 백유를 한 것은 아니냐 하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는데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역사자료의 수집과 분석 연구에 있어서는 자료의 신빙성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역사학의 원칙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적으로 가까운 자료가 더 사실에 가깝다고 판단되고, 회고록 같은 다산 자신의 주장보다는 반대자들의 주장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봅니다. 정약용의 천주교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자기 방어적인 회고록으로써 박해에 빌미가 되는 신앙 내용에 대해 감추기에 급급하므로 박해자들의 주장이나 상소 내용이 오히려 더 진실에 가까운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기록에 다산이 1797년에 동부 승지 사직서를 제출하고 난 다음날에 동려 승지들은 ‘이 사람이 아직도 사학, 곧 천주학을 버리지 않았나이다’ 하였고, 정조대왕도 이에 대해 웃으면서 ‘네 말이 과연 옳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강진 귀향이 풀려 돌아온 10년 후에도 윤극대라는 사람은 1828년에 상소를 올려서 귀향지에서나 마지에서나 사람들을 모아 천주교를 가르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산은 시종일관 천주교 신자였지만 조상제사 문제에 관하여서는 리치 신부가 중국문화를 수용한 보유론에 따라서 제사를 끝까지 견지한 소위 보유론 신자였습니다.
-정약용 선생이 병자성사를 받았느냐, 이 문제를 부정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합니까?
▶다블류 주교는 요한 정약용이 선정한 지 10여 년 만에 김대원 신부님과 함께 입국 하였었는데 20여 년 동안 역사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결과 다산의 참회 생활과 교회활동, 종부성사와 아들 정학연의 세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을 두고 어떤 연구자가 부족한 천주교 신앙 지식을 가지고 자신의 잣대로 다산의 신앙을 판단해서 외유내유, 그러니까 외적으로도 유교, 내적으로도 유교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기 마음속에 신앙을 판단한다는 데에 있어서 주교님이나 본당 신부님보다 더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산의 종부 성사에 대한 반박글을 보면 종부성사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최후를 지켜보아야만 하는 성사로 이분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날짜계산의 잘못으로 유광제 신부님은 이미 추방되어서 다산의 종부성사 있을 수 없다고 오해하고 있지만, 실제로 유 신부님의 출발은 마카오로 떠나는 세 명의 신학행들과 함께 1836년 12월 3일 이후였습니다. 이 날짜는 정약용이 2월 22일에 운명하고 난 이후이므로 유방제 신부님의 병제성사 직전이 충분이 가능했던 사실을 이분은 곡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의 가계는 한국 천주교 뿐만 아니라 세계 가톨릭 역사에서도 보기드문 사례인데요. 다산 가문과 천주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겁니까?
▶한국 천주교의 시작은 이벽 성조의 집안과 정약용, 이승훈집안이 결혼으로 맺어짐으로써 모두 천주교 집안이 되었습니다. 이들 중 천주교 창조에 주역들인 이벽과 이승훈, 정약전과 정약용 등은 앞서 말한 보이론 신자들로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한편 조금 늦게 신앙에 합류한 정약종과 조카 사위인 황사영, 그리고 홍랑민의 아들 홍제용 등은 조상 제사문제에 있어서도 교회의 지시에 그대로 순종함으로써 제사를 폐지한 무근무외 폐륜적인 사학 집단으로 매도되어서 순교에 이르게 됩니다.
-바오로 성인의 회심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거든요. 다산정약용 선생도 한번 그런 의미 받아들였다 정도는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과연 정약용과 바오로 사도가 편협한 민족주의적 유다인의 생으로부터 보편세계로 향하여 선교의 일꾼이 되는 체험이 바로 바마수카스키의 회심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후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하느님의 발자취를 인간 이성으로 체득한 그리스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발전시킵니다. 문화적 수용이오, 적응 주였습니다. 이와 똑같이 중국의 선교사로 와서 옛 유교에 상제 하느님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문화적으로 적용한 사람이 바로 마테오 리치 신부였습니다. 전자기기 어댑터 처럼 이태리 말로는 아답다 멘토로서 동양의 문화를 수용하고 적응한 것을, 우리말로는 ‘보유론’이라고 합니다. 리치신부는 선진유학에서 일컫던 상제, 천주, 상주란 이름으로 하느님을 불렀고 조상제사와 공자배례등도 동양의 고유한 문화로서 다 수용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동양에 관하여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 결과 서양 우월적인 시각에서 동양 풍속을 반대하여 문제를 일으킨 것이 동양의 제대논쟁이었고, 그 결과로 조상제사를 미신이라고 금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천주교의 창립 선조들이 천주교신앙을 받아들일 당시에는 리치 신부의 보유론에 따라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조상제사가 천주교를 신앙한 후 한 10여년 후에 이런 문제가 불거지니까 다산과 같은 선각자들은 즉시 알아들었습니다. 이는 본질적인 교리가 아니라 언젠가 바뀔 수 있는 규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과연 그의 예견대로 제사문제가 결국 풀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다산은 끝까지 자녀들에게 조상제사를 강조했습니다.
-한국 교회사에서 천진암 강화기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제가 작년에 제가 '한국 천주교의 뿌리’로 논문을 냈습니다. 그동안 다산 정약용의 묘지명 글에 강학우, 천진암, 주어사 이벽설충야지, 장촉담경 등의 글을 놓고 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주장과 해석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한국 천주교의 창립이 천진암 강학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두 번째는 천주교 적인 강학이지만 주어사 강학이라는 교회 내 일부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세 번째로는 어느 강학이든 천주교와 관계없는 유교적인 강학이라는 일반 사학계의 주장입니다. 이 세 가지 학설 중 첫째 주장인 천진암 강의가 여러 가지로 연구 검토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이 제 논문입니다.
-다산 정약용의 믿음이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 주는 가르침은?
▶지금 서울 동호대교를 건너서 옥수동 산자락에 가면 조선시대의 국립 연구소에 해당하는 독서당, 일명 동허당 터가 있습니다. 다산은 천진암에서 이벽 성조가 15년 동안 천학을 공부하던 장소를 일컬어서 독서처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강진에서의 귀향 살이 18년을 우리 민족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독서당의 기회로 삼았고, 그리하여 500억원 이상의 저출을 할 수 있었습니다. 1925년 을축년 대 홍수 때 그의 시비가 물에 잠기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자료들이 전해졌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지만 고난과 시련의 시기가 영원의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큰 은총의 시기라는 것을 다산의 생애를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과 천주교 신앙의 유산이 많이 보존되어 있습니까?
▶가문의 몰락을 피하기 위해 숨겨 놓아야만 했던 신앙 고백의 표현들이 도처에 숨어있습니다. 후악들이 수수께끼를 풀듯 보물찾기를 하듯 밝혀내야 하는 것들입니다. 수원 화성에 방화 수리 종 서쪽 벽에 새겨진 86개의 십자가 문양이 그러하고요. 강진 귀향지를 찾아가서 다산에게 공부하였다는 이승훈의 아들 이택규와 윤주 측인 윤조명, 그리고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인장들이 있습니다. 또한 다산이 남긴 글 속에 숨겨진 내용들도 자세하게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다산이 해약 관계의 저술로서는 마가 심증정두기법상실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다산이 북경을 왕래하던 정하상 격하나 신자들과 꾸준히 만나 도움을 주고 받았다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다산과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 올해 특별히 계획한 일들이 있으신가요?
▶천진암 성지를 중심으로 다산의 시비를 건립할 계획이 있고요. 탄생일이 1762년 6월 16일인데, 이벽 성조를 비롯하여 천주교 창립자들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요일과 양력을 사용하므로 정약용의 탄생일을 양력으로 바꾸어서 8월 5일에 진행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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