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프랑스의 과학 철학자이자 정치 철학자, 이반 일리치 사상을 잇는 철학자, ‘계몽적 파국주의’ 사상가로 유명한 장 피에르 뒤피가 코로나19 팬데믹 위기의 한복판에서 써내려간 사유 일기. 팬데믹 시대의 공공 의료와 정부의 위상, 생명과 죽음에 관한 의료[생명] 윤리학, 복잡성 이론과 바이오테크놀로지 등 현대 과학이 바라보는 생명, 생명 가치에 대한 평가, 인간의 죽음과 삶, 파국과 파국에 관한 예언 등에 관한 흥미진진한 사유가 펼쳐진다. 그러나 저자의 사유는 그저 생각 놀이가 아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생명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다룰 것인가에 관한 윤리 그리고 삶과 죽음에 관한 의미론이 필요한 오늘의 시대에, 이 담론들의 기본 원칙들을 선명히 제시한다.
저자가 논의를 시작하는 지점은, 2020년 3월 이후의 새로운 경험이라기보다는 그 경험에 관한, 저자가 ‘코로나 회의론자’라고 부르는 프랑스와 유럽 내 일부 지식인들의 대응이다. 브뤼노 라투르, 조르조 아감벤, 올리비에 레, 앙드레 콩트 스퐁빌, 미카엘 푀셀 등 각국 정부가 ‘생명 보호’에 집착하며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면서까지 과도한 강제조치를 시행한다고 말하는 지식인들에 대해, 저자는 분노 어린 비판을 쏟아낸다.
🏫 저자 소개
장 피에르 뒤피
Jean-Pierre Dupuy
프랑스의 과학 철학자이자 정치 철학자. 이반 일리치 사상을 잇는 철학자, ‘계몽적 파국주의’ 이론을 제시한 재난과 파국의 사상가로도 유명하다. 캘리포니아 스탠퍼드 대학교의 언어 · 정보 연구 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프랑스어 교수였고,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2006년까지 사회 · 정치 철학, 과학기술 윤리학을 가르쳤다. 1982년엔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인지 과학과 인식론 센터를 설립했다. 2011년 로제 카이와 상prix Roger Caillois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 《파국에 대해 생각하기 How to Think About Catastrophe》, 《쓰나미의 형이상학에 관한 짧은 논문 A Short Treatise on the Metaphysics of Tsunamis》, 《경제와 미래 Economy and the Future》, 《정신의 기계화 The Mechanization of the Mind》 등이 있다.
📜 목차
서문
1. 가장 멋진 죽음
2. 코로나 회의주의
3. 이른바 ‘생명의 신성화’라는 것에 대하여
4. 앙투안 르베르숑과의 대담
5. 서기 2000년의 궤변
6. 마스크와 거짓말
7. 노골적인 선별
8. ‘생물학적 생명’: 위대함과 퇴조
9. 태풍의 눈 속에서의 죽음
10. 생명의 가치
11. 국소세계에서의 죽음
12. 코로나 회의주의, 4개월 후
13. 문제의 파국주의
추신: 도전의 함정
감사의 말
📖 책 속으로
p. 23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미국과는 다르게 지식인들 절대다수, 특히 철학자들 절대 다수가 외곬으로 문학 교육만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과학과 기술을 독毒이라고 비판할 의무가 있다고 믿고, 자신들이 반드시 필요한 해독제를 주고 있다고 믿는다. 그 관점에서 보면, 그들에게 길을 터 주었던 이들은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였다.
P. 30
복음서에는 예수의, 어쩌면 의미 없어 보이는 끔찍한 문장이 있다.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라”라는 문장이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깊이 생각해보면,
이 문장은 대단히 심오하다. 죽음은 오직 죽음 자체의 문제이고, 삶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죽음은 블랙홀과 같아 결코 빨아들인 것을 토해내는 법이 없다.
P. 59-60
아감벤은 기괴하게 들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없이, 격리로 인해 “인류와 야만을 가르는 억제선이 무너졌다”고 단언했고, (4월 중순의 일이다) “어떻게 한 국가 전체가 그저 단순한 질병 앞에서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면서 정치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무너지는 일이 가능한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공동체살이의 보전보다 ‘벌거벗은 생명’을 우선시하는 사회는 죽음보다도 끔찍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사회라고 말했다. 아감
벤이 놓치고 있지 않나 싶은 것은, 그의 고담준론이, 트럼프의 말에 감히 대들면서 시민들에게 마스크 착용을 강요하는 주지사들을 협박하기 위해 손에 무기를 들고 국회의사당 계단 앞에 서서 고함을 지르는 미국 극우파 집단들의 말과 합류한다
는 것이다.
P. 76
‘복잡성’이라는 말은, 그 말을 대중화하려는 어중이떠중이들이 그것과 혼잡성complication을 혼동해서 크게 변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모두가 복잡성 패러다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잊고 말았거나 전혀 알지도 못했다.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이라는 한 수학의 천재는 1948년에 열린 힉슨 재단 심포지엄에서 ‘복잡성’이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는 가설의 형태로 명명한다. 어떤 복잡한 존재자들이 자기들보다 더 복잡한 존재자들을 산출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존재한다.
P. 82
그는 교회가 구원을 생산하는 ‘근본적인 독점권’을 얻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의학도 건강의 생산과 관련해서 마찬가지였음을 단숨에 말할 수 있었다. 어느 쪽이든 제도가 커질수록 제도는 그것이 수행하리라고 간주되는 목적에 더 큰 장애물이 된다는 결론. 이것이 바로 역생산성contreproductivit? 개념의 기원이다.
P. 94
생명을 보호하는 행동이란 정확히, 생명을 순전히 주어진 사실로 다루고, 그것을 자기 필요를 채우기 위해 제멋대로 가공하는 재료로 환원해 버리는 생명 권력을 일리치가 고발하면서 했던 바로 그 행동이다. 일리치의 주장은 생명을 ‘우상화’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생명을 보호하자는 것이다.
P. 152
한 통계는, 일반적인 경우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확실히 반反합리적이게 되는 방식으로 의료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
여준다. 프랑스와 같은 상태에 있는 국가들의 경우, 국민 의료지출의 50~80%가 환자의 생의 마지막 해에 들어간다. 정말 문제 되는 것은 연령이 아니라, 독립 변수로 삼은 생의 마지막 해이다.
P. 155
의료 윤리학은 경제학으로부터 수용한 합리성 때문에 부패해버렸지만, 도덕 철학의 다른 원천으로 돌아설 수는 있을 것이다. 20세기 후반, 공리주의는 전통적인 경쟁 상대인 칸트 의무론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핵심적인 저작은 2002년에 사망한 미국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의 《정의론 Theory of Justice》이다.
P. 162
2012년 10월에 에반스 박사가 처했던 수습 불능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허리케인 샌디는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했을까? 그녀는 리스트를 작성하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을 이끈 것은 즉흥성과 능수능란함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였다. 임시 발전기를 등에 지고 13층을 걸어서 올라가는 자원봉사자를 소집하는 일부터 전기 호흡기를 수동 호흡기로 대체하는 일까지 그녀가 해냈다는 점을 굳이 깊이 살펴볼 것도 없다. 이런 식으로 에반스는 침상마다 2명의 자원봉
사자를 붙여놓아야 했다. 결국 이 이야기의 교훈은 50명의 환자 가운데 몇 명이 생존했는가가 아니라, 환자들 모두 자기가 정성껏 치료받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P. 232
빙하가 녹으면서 발원하여 산 속 수백 개 급류로 불어난 유년기를 거쳐, 레만L?man 호수의 지하를 횡단하고, 지나가는 길에 사람들과 자연이 빚어낸 장애물들인 댐과 저수儲水와 노닐다가, 지중해에 합류하면서 두 팔 벌린 삼각주 모양으로
펼쳐지며 쏟아져 나올 때까지, 론Rh?ne 강은 ‘유체역학’이라는 학문의 프리즘으로 본다면 한쪽에서 저쪽까지 동일한 법칙을 따른다. 그 강의 ‘현상학’은, 즉,
때로 소용돌이 모양으로, 간혹은 보이지 않은 채로, 종종 차분히 흐르는 장강長江으로 우리 눈에 보이는 강의 모습은 아주 딴판으로 바뀌지만, 이를 하나의 복잡계로 인식한다면 그 강은 하나이고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