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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0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루카 16,1-8
돈을 쓴다고 다 친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루카 복음 16장은 인간이 재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15장에서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고 떠난 탕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유산을 가지고 나가서 그것을 탕진하였습니다.
그때 그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재물이 사라지자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청지기가 많은 친구를 사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왜 같은 돈을 써도 누구에게는 친구가 생기고 누구에게는 생기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친구를 사귀는 도구는 ‘불의한 재물’이지 나의 재물이 아닙니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재물이 나의 것이라고 느끼면 그것으로는 친구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쓴 돈을 반드시 회수하려 합니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보다는 부담스러운 마음을 줍니다.
따라서 주면 보답은 받을 수 있으나 관계가 형성되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그 사람 것이 아니니 갚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게 베풀어야 친구가 생깁니다.
오늘 청지기가 그렇게 재물을 써서 친구를 사귄 사람입니다.
누군가 쓴 「왠지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다」란 글을 소개해 드립니다.
왜 우리는 남에게 잘해주면서도 친구가 생기지 않을까요?
이 글에 그런 고민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싫지는 않은데 더 가까워지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다.
이야기해 보면 재미있고 공유하는 느낌도 많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다 좋은데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커피 같은, 아이스크림 같은 그런 사람이 있다.
멀어지면 걱정이 되고 오래 말 안 하면 이대로 침묵이 굳어질까 두려운 사람이 있다.
함께 오래 이야기 나누는 좋은 사람, 부담 없이 이야기해도 되는 사람, 그래서 여기서 그냥 말하고 싶은데 슬슬 다가와 앉거나 더 친절해지려 하거나
있어야 할 경계선 같은 걸 무시하려 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
사실 알맞지 않으면 저도 힘겨울 텐데, 저도 다 생각이 있을 텐데 이쯤이 그래도 좋다는 걸 저도 알 텐데 슬그머니 자꾸 가까워지는, 나도 모르게 가까워져서 놀라서 뒤로 발을 빼게 되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러는 걸까.
그가 생각하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다른 걸까.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서로 오해에서 이만큼 다가선 걸까. 아니, 그런 건 아니다.
잘못 생각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 그 또한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는 것을.
그 또한 가끔 침묵하고 서먹하고, 쑥스럽기도 한 것을.
사람 사이란 벽돌처럼 가운데에 쌓아 올리는 경계가 아닌 것을, 물 흐르듯 흐르기도 하는 것을,
그래서 가끔 내가 넘어가고 저가 넘어와 서로 미안하기도 한 것을.
그래서 더 걱정돼서 물러나, 그 부담스러움을 다시 일깨우는 것을.
아니, 솔직히, 친절해지고 싶지만 그걸 호감으로 느낄까 봐 두려운 사람이 있다.
호감이 아니란 건 아니지만, 호감 이상으로 느낄까 봐 두려운 사람이 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아니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저대로 나대로 잘 있으면서 쿨하게 그래 쿠울하게 부담 없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조금만 더 잘해주면 내가 잘해준 것보다 더 잘해줘서 위험한 사람이 있다.
알맞은 마음을 재는 내 마음이 고장 난 걸까.
알맞은 마음 이상으로 늘 퍼주려 하는 그 마음이 고장 난 걸까.
늘 한결같이 친절하고 고맙고 따뜻하고, 그래서 불편한 좀 오래갔으면 좋을, 친구가 되고 싶은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다.
누군가에게 나도 이런 사람일까.”
왜 우리는 잘해주면서도 누군가에게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그 사람 속에 자신이 준 것에 대한 보답을 받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것이니까 손해를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약삭빠른 종에게 이것저것 탕감을 받는 이들의 마음엔 부담이 없습니다.
‘어차피 자기 것 주는 것도 아닌데 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고맙기도 한 것입니다.
비록 갚아야 할 의무는 없지만 고마워서 내가 할 수 있을 만큼의 보답만 하면 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친구 사입니다.
우리는 그런 편안한 사람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친구가 생깁니다.
유튜브 채널 ‘애니멀봐’에 「할머니 장례식에서 눈물 흘리던 백구가 2년 동안 한 일」이란 짧은 동영상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노환으로 돌아가시자 나이가 많고 몸도 성하지 않은 백구는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할머니와 함께 걷던 떡집과 절 등을 순례합니다.
보통 젊은 주인이었으면 개에게 밥을 주거나 보살펴 줄 때도 무언가 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부담 없는 사랑을 베푸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랑을 받았어도 할머니의 사랑이 더 순수하고 깨끗하여 할머니를 더 생각하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
‘어차피 나도 받은 건데 뭐’라고 생각하며 재물을 쓴다면 그 재물을 받는 이들은 그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이만큼이나 해 주는데’라고 생각한다면 상대는 부담을 느낄 것입니다.
고마움을 느끼게 할 것인지, 부담을 느끼게 할 것인지는 주는 사람의 자세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친구가 생기고 안 생기고가 결정되고, 하느님 나라에서 나를 맞아들일 사람이 생길 것인가, 아닌가가 결정됩니다.
부담이 아니라 감사가 나오게 재물을 사용해야 친구가 생깁니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과 거저 주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사랑스럽겠습니까?
예수님은 감사가 나오게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십니다.
그 이유는 그것을 당신 것으로 여기지 않고 다 아버지께 받은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는 모든 것, 그것들은 항상 본래 나의 것이 아닌 ‘불의한 재물’이어야만 합니다.
세상에 나의 것은 없습니다.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줄 때는 친구가 생길 수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10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루카 16,1-8
지상에서의 성공도 중요합니다만!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가르침은 특별하게 예외적이며, 지극히 은유적이므로 깊이 묵상하고, 잘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불의한 집사는 막대한 금액의 공금을 횡령한 것뿐 아니라 공문서위조까지 했으니 현행법상 적어도 징역 5년은 구형받아야 할 범죄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십니다.
정의와 진실을 촉구하시며, 올바른 길을 강조하시는 예수님께서 이런 가르침을 주시다니 어찌된 일일까요?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 집중해야 할 대목은 바로 이 구절입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이 세상 사람들 한번 보십시오.
세상에서의 성취와 성공을 위해 얼마나 머리를 쥐어 짜내고 죽기 살기로 노력하는지 모릅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이 성공의 가장 중요한 척도라고 여기는 부의 축적과 증식을 위한 그들의 노력을 상상을 초월합니다.
자신이 투자한 종목의 주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분 단위로 확인합니다.
좋은 매물이 나왔다면 언제, 어디라도 달려갑니다.
자신이 펼치고 있는 사업체 고객의 만족을 위해 그야말로 자세를 완전 낮추고 허리를 굽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측면을 예의주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성공, 영원한 목표인 영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획득을 위해 자신이 지닌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부으라는 초대입니다.
한 형제가 틈만 나면 ‘어떻게 하면 고기를 원 없이 많이 잡을까?’ 갖은 고민을 하고, 이런 저런 장비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제가 그랬습니다.
“그런 노력의 10분의 1만 영혼 구원에 투자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말을 하고 나니, 저역시 갑자기 부끄러워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상에서의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전략을 짜고, 수정하고, 시뮬레이션 작업을 합니다.
시행해보고 부족한 부분은 어떻게 해서든 보완하고, 수립한 계획이 성공하기까지 갖은 노력을 무한 반복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물론 지상에서의 성공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영원한 성공을 얻기 위해 얼마나 투자하고 있고, 고민하고 있으며,
전력투구하고 있습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강론>
(2023. 11. 10. 금)(루카 16,1-8)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약은 집사의 비유>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루카 16,1ㄴ-2)”
여기서 ‘집사’는 주인이 맡긴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은, 재산 관리를 잘못해서 주인에게 손해를 입혔다는 뜻인데, 주인의 재산을 ‘횡령’한 일도 있을 것입니다.
‘말을 듣고’ 라는 말과 ‘소문이 들리는데’ 라는 말만 보면 주인이 ‘소문’만 듣고서 집사를 해고했다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아마도 누군가가 주인에게 집사의 비리와 부정을 알렸을 것이고, 그래서 주인은 정확한 상황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인이 집사를 해고한 것은 막연한 소문을 근거로 한 일이 아니라, 직접 확인한 사실을 근거로 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집사 일을 청산하라는 주인의 말은, 가지고 있는 장부를 정리해서 제출하라는 뜻입니다.
집사를 해고하는 것은 확정된 일이지만, 그를 곧바로 쫓아낸 것은 아니고, 정리할 시간을 준 것입니다.
이것은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하느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목숨을 곧바로 되찾아 가신 것이 아니라, ‘오늘 밤에’ 되찾아 갈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몇 시간의 여유를 주신 것입니다.
‘약은 집사의 비유’에서 주인이 집사에게 장부를 정리할 시간을 준 것도, 잘못한 일을 바로잡을 시간을 준 것입니다.
잘못한 일을 바로잡으면 해고가 취소될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그 부자가 회개한다고 해서 그의 목숨을 되찾아 가겠다는 하느님의 말씀이 취소되지 않는 것처럼, 집사를 해고한 일도 취소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집사가 주인에게 앙심을 품고, 잘못한 일을 바로잡기를 거부한다면?
그러면 해고로 그치지 않고 감옥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기신 재산과 같습니다.
‘나’는(우리는) 주님이신 하느님께서 맡기신 인생이라는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하느님께서 장부를 정리해서 제출하라고 명령하시면,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인류 전체의 일로 생각하면, 그 시점은 ‘최후의 심판 날’이고, 각 개인의 경우에는,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는 임종 때입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을 보면 갑자기 임종을 맞이해서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장부를 정리할 시간은, 즉 회개하고 잘못을 바로잡을 시간은 ‘지금’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3-6.8).”
이 상황을 겉으로만 보면, 잘못한 일을 바로잡기는커녕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데, 집사가 자기 잘못을 정말로 바로잡으려는 의도로 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자’에 관한 율법이 신명기에 있습니다.
“너희는 동족에게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돈에 대한 이자든 곡식에 대한 이자든, 그 밖에 이자가 나올 수 있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다.
이방인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도 되지만,
너희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신명 23,20-21ㄱ).”
빚진 사람들 입장에서는 ‘주인에게’ 빚을 진 것이지만,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꾸어주고 다시 그 빚을 받아내는 일은 모두 집사가 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집사는 주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이자를 받았을 것이고, 그것을 자기가 차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해고 통보를 받자, 받은 이자를 돌려주고 사람들의 인심을 사려고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의 진짜 목적은 해고된 다음에 먹고살 길을 찾는 것이지만, 그래도 어떻든 잘못한 일을 바로잡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빚진 사람들은 이자를 내지 않게 되어서 좋아했을 것이고, 주인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을 것이고, 집사는 먹고살 길을 찾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왜 집사를 칭찬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집사를 칭찬할 주인은 없습니다.
잘했으니까 칭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속 사람들은 어떤 위기가 다가오면 자기들 나름대로 신속하고 영리하게 대처한다.
그런데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너희는 종말이 다가오는데도 대비하는 모습이 왜 이렇게 굼뜨냐?”
우리가 인생을 마치고 하느님 앞으로 가는 일은,
해고당하는 일이 아니라 임무 완수를 보고 드리는 일입니다.
그때가 되었을 때,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