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고구려 · 당나라 전쟁: 안시성 전투고구려인들의 결사저항(645년)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2. 2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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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고구려 · 당나라 전쟁: 안시성 전투
고구려인들의 결사저항(645년)
요약 645년,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정변과 신라의 구원요청을 구실로 삼아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안시성을 공략할 무렵, 고구려에 항복을 권유했으나 고구려군은 성주를 중심으로 결사적인 저항을 벌였다. 결국 당 태종은 고구려의 전술과 저항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정, 3만의 병력으로 고구려 정복을 자신하다
당나라군을 물리치고 있는 연개소문 장군
"고구려가 여러 차례 신라를 침범하므로 짐이 사신을 보내 타일렀으나 듣지를 않는다. 이제 군을 출동하여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는데, 그대의 의향은 어떠한가?"
"신이 알고 있는 바로는 고구려의 정권을 쥐고 있는 연개소문이 병법에 통달했다고 자부하고 있으며, 중국이 멀리 고구려를 정벌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여 폐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신에게 3만 명의 병력만 주시면 연개소문을 사로잡아 바치겠습니다."
"3만의 적은 병력으로 머나먼 고구려를 무슨 전법으로 정벌할 계획인가?"
"신은 정공법(正攻法)을 쓰겠습니다."
이상은 중국병서의 고전인 무경칠서(武經七書) 가운데 한 권인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의 첫머리에 나오는 기록이다.
당 태종, 고구려 침공 전 이정과 군사지식을 나누다
《이위공문대》는 당나라 태종 이세민과 당대의 전략가였던 위국공 이정(李靖)이 병법에 관해 문답한 명문명답의 내용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첫머리에서 알 수 있듯 태종은 신라의 요청을 받고 고구려를 침공하기 전에 병학에 정통한 이정과 함께 해박한 군사지식을 서로 나누고자 했다.
당 태종, 훌륭한 정치를 펼쳤으나 고구려 정벌에는 실패하다
태종은 당나라를 건국한 고조 이연의 둘째아들로서 수나라가 기울고 있는 틈을 노려 아버지와 함께 당나라를 세우고, 각처에 할거한 군벌들을 타도하여 용맹을 떨쳤다. 그는 병략과 무예에 능할 뿐만 아니라 황제 재위 23년 동안 훌륭한 정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645년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안시성 싸움에서 실패하고 철군했다.
당 태종과 이정, 고구려의 수준을 과소평가하다
결국 이야기는 태종이 병법에 정통한 이정과 함께 숙의하여 고구려를 침공했건만 실패했다는 것으로 요약되는데, 그렇다면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태종과 이정이 고구려군 수준을 매우 낮게 보고 불과 3만 명 수준으로 평범한 작전을 실시하여 정복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음을 알 수 있다. 30년 전 엄청난 병력으로 수나라가 실패한 바 있는 침공을 그토록 낙관한 데는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당 태종은 수 양제의 혼란한 군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잘 통제된 군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연개소문이 백성의 원망을 받고 있어 고구려군의 사기가 극도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정
병법서 이위공문대의 저자인 위국공 이정.
당나라의 판단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마치 고구려인들이 중국의 침공을 환영이라도 할 것처럼 본 것은 그야말로 큰 판단착오였다.
연개소문, 왕을 시해하고 군권과 정권을 장악하다
본래 고구려는 당나라와 우호관계를 원하면서도 방비태세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당 태종이 투르크 족을 정복할 때, 영류왕은 요동 일대에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자신은 최고의 관직인 막리지가 되어 군권과 정권을 다 장악했다.
연개소문
연개소문 영정(상상동)
당 태종, 소수의 정예부대를 편성하여 고구려 원정에 나서다
고구려에 대한 복수의 기회를 노리던 태종은 연개소문의 정변과 신라의 구원요청을 적절한 구실로 삼아 드디어 645년 봄 원정길에 나섰다.
1차 고구려-당 전쟁 지도
645년 1차 고구려-당 전쟁 지도.
태종은 수 양제와 마찬가지로 평양성 점령을 최종목표로, 육군은 요동반도를 통과하고 수군은 바다를 건너는 수륙 양면작전 전개를 계획했다. 그러나 양제가 범한 과오를 분석하고 대병력보다는 소수의 정예부대 위주로 육군 6만, 수군 4만 등 총 10만 명의 원정군을 편성했다. 사실 이 정도도 이정이 장담한 3만 명을 훨씬 초과한 규모였지만, 태종은 후방의 안정을 고려하여 원정군 규모를 축소하고 그 대신 자신의 용병술, 정예부대의 능력, 그리고 특별히 준비한 공성장비 등에 자신을 걸었다.
당나라 육군과 수군, 파죽의 공격으로 안시성까지 다다르다
4월 1일 당나라 육군은 요하를 건너 현도성 · 신성 · 건안성 · 개모성 등을 차례로 함락하고 수군도 바다를 건너 비사성(오늘날 여순)을 습격했다. 그리고 요동성을 포차와 충차(밀어붙이는 충격으로 성을 무너뜨리는 장비)로 밤낮을 쉬지 않고 12일간 공격, 수만 명이 성을 기어오르기를 반복한 끝에 함락시켰다. 이어서 백암성도 굴복시켰으나, 이 같은 파죽의 공격은 안시성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안시성, 지원군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결사적 저항을 벌이다
6월 안시성을 공략할 무렵 고구려는 고연수 · 고혜진 두 장수가 후방에서부터 15만의 구원부대를 이끌고 왔지만 야지에서 격파되고 말았다.
태종은 항복한 고연수를 안시성 아래로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성내 고구려군은 성주를 중심으로 굳게 단합하고 결사적 저항을 벌였다.
보급로에 위협을 받을까 염려되어 안시성을 지나치지 못하다
국경선 지역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한 태종은 안시성을 남겨둔 채 그 남쪽에 있는 건안성을 공격할까도 생각했다. 병법에 이른바 "공격하지 않아야 할 성이 있다"는 말에 해당되는 곳이 바로 안시성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시성을 뒤에 두고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보급로에 위협을 받을까 두려워 공격하지 못했다. 또한 항복한 고연수와 고혜진이 천리장성을 그쯤 두고 차라리 오골성을 점령하면 일석이조를 거두리라고 제의한 바 있었는데, 그 제의도 같은 이유로 택하지 않았다.
고구려, 적군이 성을 넘기 위해 만든 토산을 오히려 점령하다
당 태종은 안시성 동남쪽에 높은 토산(土山, 성을 넘어가기 위한 방법으로 성 높이 이상 쌓은 산)을 쌓기 시작하고, 공성장비로 매일 6~7회씩 공격을 퍼부었다. 고구려군은 적의 토산 건설에 대해 성벽을 더 높이 쌓고 파괴된 성벽을 보수하면서 적의 성내 진입을 막는 한편, 야간에는 특공대를 편성하여 적을 기습했다.
당태종
수나라에 이어 고구려를 재침공한 당태종.
당나라군은 60여 일 만에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토산을 완성했다. 그러나 최종공격을 준비하는 순간에 토산 일부가 무너지며 성벽을 덮친 사고가 발생하자 이 기회를 이용, 고구려군은 도리어 토산을 점령하고 그것을 수비진지로 만들어버렸다.
당 태종, 실패를 인정하고 철군하다
이런 상황에서 안시성과 건안성을 남겨둔 채 최종목표인 평양성 공격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더구나 요동지방에서는 이미 찬바람이 부는데도 동계작전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였으니, 결국 당 태종은 실패를 인정하고 9월 중순 철군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고구려, 청야입보 전술과 결사적 저항으로 당나라의 침략을 이겨내다
당 태종이 훌륭한 전략가로서 수 양제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거의 그대로 답습한 결과에 이르고 만 것은 고구려의 청야입보 전술과 고구려인의 결사적인 저항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인접한 성들이 도미노처럼 차례로 무너지는 판에 안시성을 끝까지 사수한 성주의 용기와 공로는 당나라의 계획을 무력화시킨 결정적 요인이었다. 성주의 이름은 우리나라 정사에는 기록이 없으나, 야사를 통해 양만춘으로 전해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 · 당나라 전쟁: 안시성 전투 - 고구려인들의 결사저항(645년)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 7. 16., 정토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