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책 성경(聖經)이란 말은, 종교에서 신앙의 최고 법전이 되는 책을 이르는 말이며 기독교의 성서, 불교의 팔만 대장경, 유교의 사서오경, 이슬람교의 코란등이 그런책이다. 다른 말로는 성전(聖典) 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통일적이고 체계적인 성문(成文) 규범이 '거룩한 책' 성경인 것이다. 이때 거룩하다는 의미의 성(聖)자를 그 앞에 붙이는것은 그 책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종이와 글로된 그 책의 내용-말씀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내용을 담고있는 그릇으로서의 '책' 은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서지학적 (書誌學的) 연구의 대상이 된다. 사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성경만큼 온갖 비판을 견디어온 책도 흔하지 않으며 서지학적 입장에서의 학문적 탐구도 근자에 이르러 여러가지 발전된 과학적 방법을 이용, 더 깊이있는 연구가 계속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성경을 영어로는 Bible 이라고 한다. Bible 의 어원은 그리스어 Biblos 로서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에서 자생하는 파피루스 -papyrus 라는 키가 큰 갈대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영어의 paper 도 여기에서 왔다. 파피루스 줄기를 쪼개어 돗자리처럼 서로 엮은 후 이를 압착하면 당분이 배어나와 흡사 종이처럼 된다. 이를 말린 후 그 위에 글자와 그림을 그리게되며 고대문서의 필사본 대부분이 이 파피 루스에 기록되었다. 성경사본, 특히 그리스어 사본 대부분이 파피루스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Biblos-Biblia-Bible 로 발전한 것이다. 그 앞에 Holy 라는 단어가 붙는것은 역시 내용의 거룩함을 의미하고 있다. 1460년 구텐베르그(1399-1468) 에 의해 42행 성서인 '카트리콘' 이 인쇄, 발행되기까지 성경은 대단히 희귀한 책 이었다. 한권 한권이 사람의 손에 의해 필사되었기 때문이며 이 어렵고도 힘든 일은 대부분 수도원 안에서 수도사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 신약성경을 파피루스가 아닌 양피지(羊皮紙)로 필사할 경우 거의 400마리의 양이 필요 했음으로 왕이나 돈이많은 귀족, 부자가 아니면 성경을 소유 한다는것은 불가능했다. 구텐베르그의 인쇄기 발명은 문화사에서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하나의 역사적 획을 긋는 큰 사건이었다. 개신교의 성경을 기준할때, 성경은 구약39권과 신약27권, 합계 66권으로 구성되어있다. (신,구교 공동번역의 경우 구약에 외경(外經) 9권이 포함돼 있다.) 구약성경 대부분은 히브리어로 쓰여졌으며 일부 아람어가 사용되었다. 이에비해 신약은 1세기, 드넓은 로마제국 영토의 공용어였던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 되었다. 코이네는 고급언어이거나 학문적인 언어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시장에서 쓰는 통속어였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복음이 빠르게 전파된데는 그 언어가 가지는 대중성에 힘입은 바도 크다고 볼수있다.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된 성서는 1400여년 이라는 장구한 기간에 걸쳐 기록되었으며 시대,배경,직업,교육수준이 서로다른 30여명의 저자들에 의해 쓰여졌다. 놀라운것은 이렇게 장구한 시일에 쓰여져 내려온 책들이 정경이 되기까지는 또 오랜 시간 첨예한 논쟁과 대립의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이다. 구약이 정경이 된것은 AD 100년 '얌니야 교회회의' 에서 였으며, 신약이 정경으로 받아들여 진것은 AD 397년 '카르타고교회회의' 에서 였다.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은, 최고 AD 4세기의 필사본을 기준하고 있으며 그 필사본도 수천개의 조각들로 남아있다. 그 이전의 필사본은 모두 소실되었으며 '원본-원문' 은 전혀 전해진것이 없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4세기 이전의 필사본이 발견되고 그 내용이 지금의 성경과 다르다면 당연히 수정돼야 한다. 성경이라는 책이 가지는 취약점이 바로 그것이며 성경역시 서지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우리모두 이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도올 김용옥은 이런 주장을 한다. '예수의 말씀과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언어를 계속 초월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성서는 인간의 언어로 구성되어있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를 통해 끊임없이 언어를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셩경과 해후할수 있다. 그리스도는 역사적으로 축적된 교회의 도그마(교리) 속에서는 발견될수가 없다. 오로지 인간의 경험과 그 경험의 심연에서 나오는 질문속에서 직접 해후될수 밖에 없다.' 정곡을 찌르는 주장이라고 할수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1절까지 '일백독, 이백독' 하는 분들이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성경 66권을 공책에 옮겨쓰는 작업을 몇번이고 되풀이 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을 나쁘다고 할수는 없다. 그것도 성경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법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방법들은 자칫 공적주의(功積主義)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성경은 물리적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성경을 글자-문자로만 읽는 것은 더 위험할 수 있다. 그 기록들 자체가 과학이전 시대를 살았던 옛사람들의 생각과 언어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지금의 생활을 기준으로 성경을 읽을 때 부딪히는 가장 큰 난관이 바로 그 역사적인 시간차이다. 도올의 '언어의 극복' 이 바로 그 지적이다. 성경은 끝까지 '뜻으로 읽는 책' 이다. 책 자체는 인간이 만든 종이에 인간의 서로 다른 언어로 기록 되었지만 그 말씀의 의미- 내용은 거룩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聖經, Holy Bible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제 이 거룩한 책, 성경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기독교 신앙의 '절대적인 기준' 이 이 책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그만큼 중요하다. 엄격히 말한다면, 지금 한국개신교 신자들 대부분은 '귀동냥' 으로 예수를 믿고있다. (카톨릭의 경우도 큰 차이는 없다.) 성경안에서, 특히 공관복음을 통해 예수와 부딪히고, 넘어지고, 깨진 경험보다는 주일 설교등, 간접적이고 간헐적인 '귀동냥 에 의지하고 있기때문이다. 신앙, 예배와 같은 믿음의 본질적인것 보다는 교회의 조직, 예배가 아닌 모임, 각종행사. 경품까지 등장하는 이벤트에 중독되어 그게 신앙생활인양 착가하고 있는 경우들도 같은 범주에 속하는 문재들이다. 방대한 성경을 올바르게 읽기위해서는 좋은 의미의 요령이 필요하다. 한가지 사례로서, 공관복음의 경우, 가장 먼저 쓰여진 '마가복음' 을 주의깊게 읽어야 한다. 십자가사건 이후, 거의 한세대반이 지나서야 기록된 이 책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수이야기의 '오리지날' 이다. 거기에는 온갖 수식으로 가득찬 '신비한 탄생' 도, 무리하게 인용되는 예수의 족보도 없다. 마태와 누가에 나타나는 이런 부분들은 훨씬후에 교회의 어떤 필요에 의해 첨가된 것임을 알수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역시 구전과 전승과정에서의 첨삭(添削)에서 예외적인 것은 아니지만, 예수를, 인간예수에 대해, 그가 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 되었는지를 소상하게 기록 하고 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우리가 나사렛 청년을 만날수 있는 값진 통로가 되는 것이다. 다음에 중요한 책이 바울의 서신인 '갈라이다서' 라고 할수있다. '작은 로마서' 라고도 불리는 이 책은 가장 기본이 되는 기독교신앙의 초기 신학적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마가복음보다 앞서 쓰여진, 신약에서의 첫번째 책이기도 하다. 새로 부임하는 총독 베스도는 바울의 긴 증언을 들은 후, '바울아, 네 지식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했다.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 바울은 왜 예수가 그리스도인지를 강도높게 설파하고 있다. 바울의 글들이 설득력을 가지는것은 그가 예수와 조우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독교를 시작하고, 세계의 종교가 되게 한 것은 바울사도였다. 이와같이 마가복음과 갈라디아서는 대단히 중요한 기록이며 다른 책들에 우선해서 집중적으로 읽어야 하는 책들이다. 디도장군이 지휘하는 로마제10군단이 예루살렘을 점령, 파괴한 것이 주후70년이다. 그 직전, 주로 로마에 살고있는 유대인들에게 쓰여진 것으로 생각되는 책이 히브리서다. 이 책은 그 분위기부터가 아주 다르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 이르는 격정적인 시기가 지나가고, 예수와 그 가르침에 대해 보다 신중해진, 깊이 생각하는 '해석' 의 시대가 낳은 산물이기도 하다. 특히 구약과의 관계설정에서 더 그렇다. 대표적인 부분이 11장 1절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개역.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공동) 시기적으로 신앙에 대한 이런 정리가 나올 때가 되었던 것이다. 성경 안에는 전통적으로 교회가 기피하는 부분도 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이 그 대표적인 한가지 예로서 '그리스도께서는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 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적 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개역.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읍니다.-공동) 예수의 부활기사들과 상치되는 이 부분을 베드로가 썼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시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사람의 이름으로 글을 쓰던 시대이기도 하다. 그때 기준으로 볼때 가룟유다를 제외한 제자 모두는 문맹이었다고 보는게 옳다. 이 본문을 근거로 '사도신경' 원문에는 '음부에 내려가시고' 가 있게 된 것이고 한국 개신교는 이를 삭제, 사용하고 있다. 예수는, 그 어떤 경우에도 간접적인 방법으로는 만나지지 않는 분이다. 그래서 귀동냥신앙이 위험한 것이다. 성경을 읽고, 소화하고, 내면화 하지않는 신앙이 광신, 이단으로 가는게 그 때문이다. 법정(法頂)은, 경전을 소리내어 읽으라고 권한다. 그저 눈 으로만 스치지 말고 소리내어 읽을 때 그 울림에 신비한 기운이 스며 있어 그 경전을 말씀한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자기가 읽고, 자기가 듣고, 이해하고, 깨닫고 자기 것으로 할때 그 말씀들은 죽은 종이와 글자에서 살아나 '살아있는 말씀' 이 되는 것이다. 예수와 직접 해후하는 길이 그 안에 있다. 결코 다른 길은 없다. 성경은 그렇게 위대한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