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충 훑어 보니 어느 정도 역사다운 역사를 배우게 되는 것 같네요.
중간에 보시면 임진전쟁과 병자전쟁이라고 쓰여 있는 것에 눈이 갑니다.
사실 그게 적절한 표현이죠.
고등학교 동아시아사(천재교육)
안병우, 김형종, 이근우, 신성곤, 함동주, 김정인, 박중현, 정연, 황지숙
<목차 소개>
동아시아사 교과서 페이지 : p287
집필진 : 안병우(현 한신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김형종(현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 이근우(현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신성곤(현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함동주(현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정인(현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박중현(현 양재교등학교 교사), 정연(현 영락고등학교 교사), 황지숙(현 신림고등학교 교사)
Ⅰ. 동아시아 역사의 시작
1. 동아시아와 동아시아사 학습(p12)
가. 동아시아의 지역 범주
나. 동아시아의 자연환경
다. 동아시아사 학습의 의의
2. 선사 문화의 전개(p20)
가. 동아시아 역사의 시작
나. 동아시아의 신석기 문화
다. 청동기 문화의 발전
3. 농경 사회와 목축 사회(p28)
가. 기후 환경과 생업
나. 농경과 농경 사회
다. 목축과 목축 사회
4. 국가의 성립과 발전(p36)
가. 황허 강 중류 지역에서의 국가 성립
나. 중원의 통일과 여러 나라의 성립
다. 국가 체제 정비와 상호 교섭
Ⅱ. 인구 이동과 문화의 교류
1. 인구 이동과 교류의 증대(p50)
가. 인구 이동의 전개
나. 이주 정권에서 지역 국가로
다. 문물의 전파와 상호 교류의 증대
2. 불교의 전파와 토착화(p60)
가. 대승 불교의 성립과 발전
나. 불교의 동아시아 전파와 토착화
다. 불교와 동아시아 사회
3. 율령 체계의 수용(p70)
가. 율령과 유교
나. 수당의 율령 체계
다. 율령 체계의 전파와 지역적 특징
4. 국제 관계와 외교 활동(p78)
가. 조공과 책봉이라는 외교 형식
나. 다원적 외교의 전개
다. 당 대의 동아시아
Ⅲ. 생산력의 발전과 지배층의 교체
1. 북방 민족의 성장(p90)
가. 북방 민족의 성장과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다원화
나. 몽골 제국의 성립과 발전
다. 교역망의 통합과 다양성의 확대
2. 농업의 발전과 소농 경영(p100)
가. 농업 생산력의 발전
나. 소농 경영의 전개
다.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
3. 새로운 지배층의 등장(p108)
가. 문신과 무인
나. 과거제의 시행과 문인 관료층의 형성
다. 무인의 성장과 무사 정권의 수립
4. 성리학의 성립과 확산(p120)
가. 성리학의 성립과 발전
나. 성리학의 확산
다. 정치 이념에서 사회 규범으로의 확산
Ⅳ. 국제 질서의 변화와 독자적 전통의 형성
1. 17세기 전후의 동아시아 전쟁(p132)
가. 16세기 동아시아의 정세
나. 임진 전쟁과 병자 전쟁
다. 전쟁의 피해, 전쟁을 통한 교류
2. 교역망의 발달과 은 유통(p142)
가. 동아시아 교역망의 발달
나. 유럽의 진출과 교역망의 확대
다. 무역의 발달과 은 유통의 활성화
3. 인구 증가와 도시화(p152)
가. 급격한 인구 증가
나. 상업과 도시의 발달
다. 서민 문화의 발달
4. 전통 사회의 완성(p164)
가. 청 대의 중국 사회
나. 후기의 조선 사회
다. 에도 시대의 일본 사회
라. 17~19세기의 베트남 사회
Ⅴ. 국민 국가의 수립
1. 개항과 국민 국가 수립 노력(p176)
가. 서양 세력의 등장과 동아시아의 개항
나. 근대적 개혁의 추진
다. 국민 국가의 수립과 발전
2. 제국주의 침략과 피해(p188)
가. 제국주의 침략 전쟁의 전개
나.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지배
다. 세계 대전과 일본의 아시아 침략
라. 침략 전쟁에 따른 피해
3. 민족주의와 민족 운동(p198)
가. 19세기 후반의 민족 운동
나. 민족주의 사상의 확산
다.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한 민족 운동
4. 평화를 향한 노력(p208)
가. 반전, 반제 사상의 형성
나. 항일을 위한 국제 연대
5. 서구 문물의 수용과 사회 변화(p214)
가. 자강과 침략의 논리, 사회 진화론
나. 신문과 근대 학교의 등장
다. 양력의 채택과 철도의 건설
라. 도시의 형성
마. 여성의 권리 신장과 여성 교육
Ⅵ. 오늘날의 동아시아
1. 전후 처리와 국교 회복(p228)
가.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 처리 구상
나. 동아시아의 전후 처리
다. 동아시아 각국의 국교 수립
2. 냉전과 전쟁(p234)
가. 국공 내전
나. 6.25 전쟁
다. 베트남 전쟁
3. 경제 성장과 역내 교역 활성화(p242)
가. 일본, 한국의 고도성장과 동아시아형 발전 모델
나. 사회주의권의 개방고 경제 발전
다. 역내 교역과 동아시아 경제권 형성
4. 민주화와 사회 변화(p250)
가. 민주주의 정치의 발전
나. 사회주의 체제의 변화
다. 한국, 일본, 중국의 사회 변화
5. 동아시아의 갈등과 화해(p256)
가. 영토를 둘러싼 대립
나. 역사 문제로 인한 갈등
다. 화해를 위한 노력
<동아시아사 교과서 특징>
1. 세계사 파트에서는 서양사와 동양사가 같이 나왔지만, 동아시아사 파트는 과목 이름 그대로 동아시아사 역사만 나옵니다. 그래서 세계사에 나오는 동양사보다 내용이 엄청 깊게 파들어갑니다. 세계사에 나오지 않았던 송첸캄포라든지 남비엣 왕국, 세계사를 학습한 학생들이 처음으로 접하는 인물이라든지 왕국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p39 내용 발췌
소주제 : 중원의 통일과 여러 나라의 성립
(중략)...
광둥에서 북부 베트남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기원전 3세기 말에 어우락 왕국이 일어나 이 지역 최초의 국가였던 반랑국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어우락 왕국도 곧 찌에우 다가 세운 남비엣에게 멸망하였다. 남비엣은 농경과 해상 무역을 통해 성장하여 한과 대결하였다.
유라시아 대륙 북부의 유목 지대에서는 기원전 3세기 말에 흉노가 성장하였다. 흉노는 묵특 선우 때 만리장성 이북의 초원 지대를 통합하여 유목 세계의 패자가 되었으며, 한을 압박하여서 고조 유방을 굴복시켰다.
일본 열도에서는 기원 전후에 정치체가 출현하였다. 이들은 3세기경에 이르러... 히미코 여왕이 다스리던 야마타이국이 가장 강성하였다.
p32 내용 발췌
소주제 : 목축과 목축 사회
연간 강수량이 250~500mm 정도로 매우 적고 기온이 낮아 농작물이 자라기 어려운 곳에서는 주로 목축을 하였다. 목축이라고 해도 가축의 종류나 사육 방식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뉜다. 한곳에 머무르면서 가축을 방목하는 경우에는 정착 생활을 하게 되므로 농경을 일부 병행하게 된다. 반면에 겨울 숙영지와 여름 숙영지를 정기적으로 오가며 가축을 기르는 유목도 있다. 유목민은 말, 양, 소, 낙타 등을 주로 길렀고 수렵으로 생계를 보조하였다. 주로 매를 이용하거나 활을 써서 새, 토끼, 여우, 사슴 등을 잡아 식량으로 삼고, 가죽과 모피는 농경민과 교역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쉽게 조립과 분해를 할 수 있는 이동식 가옥에서 거주하였다.
가축은 목축민의 생활에 필수적인 존재였다. 가축에서 얻는 고기와 젖, 치즈, 요구르트등의 유제품은 식량으로, 가죽이나 털은 옷, 모자, 신발, 담요, 노끈, 천막 등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가축의 배설물은 작물을 기르는 비료로 쓰기도 하고 불을 피우는 땔감으로도 사용하였다. 또, 가축의 뼈와 뿔은 야금술이 발달하기 전깢는 각종 물건을 만드는 중요한 재료였다.
목축민들은 교배, 거세, 품종 선택 등의 방법으로 가축을 좀 더 사육 목적에 적합하도록 만들고, 물를 쉽게 통제할 수 있었다. 거세한 수컷 말은 다른 수컷들과 싸우지 않고 거세하지 않은 말을 잘 따라다녔다.
낙타와 소 등은 물건을 운반하는 데 편리하게 이용되었으며, 말은 사람의 이동고 전투 수단으로도 중요시되었다. 특히, 유목 기마 집단의 전투력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서 위력을 떨쳤다. 그들의 전투력은 기원전 5세기경에는 안장이, 늦어도 2세기경에는 등자가 발명되어 말 위에서 안정적으로 활을 쏠 수 있게 되면서 더욱 맹위를 떨쳤다. 농경민에 대한 유목민의 전투력 우위는 화포가 발명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반면에 말을 타는 데 익숙하지 않은 농경민은 말이 끄는 수레를 도입함으로써 전투력을 향상하였다.
유목 사회에서는 추장과 부족장들의 권한이 강하였다. 이들끼리 목초지를 두고 다투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반면에 이들을 통제할 군주권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군주권의 계승도 세습보다는 부족장들의 추대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유목민은 흉노였다. 진한 대에 흉노는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최초의 유목 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흉노도 농경을 한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그 외에서 선비, 튀르크, 위구르, 거란, 몽골 등의 많은 유목 민족이 동아시아 역사에서 활약하였다.
p52 내용 발췌
소주제 : 이주 정권에서 지역 국가로
대규모의 인구 이동으로 각 지역에서는 토착 정권과 이주 정권, 이주 정권과 이주 정권 사이에 빈번한 전쟁과 정복 및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이주 국가들은 초기에 유목민과 농경민, 토착민과 이주민의 문화적 차이로 갈등을 겪어야 했다. 이에 각국은 점차 마찰을 줄일 수 있는 동화 혹은 융합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중국에서는 북위를 비롯한 북조가 적극적인 한화 정책을 통해 호한 융합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북조는 6세기 말에 이르러 남조를 누르고 수당과 같은 통일 제국을 세울 수 있었다. 수당은 과거 한족이 거주하던 영역뿐만 아니라 그 외의 민족이 거주하던 영역까지도 자신의 지배 아래 두려 하였고, 수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함으로써 그 의도를 드러냈다.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7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팽팽하게 맞섰다. 삼국은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는 한편, 안으로는 집권자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밖으로는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면서 동아시아 세계의 정세 변화에 대비하였다.
티베트 고원에서는 7세기부터 토번이 라싸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송첸캄포 왕 때에는 실크로드와 쓰촨 방면을 공략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당을 압박하였다.
조정에서 대화할 때 호어(선비어)를 사용하지 마라. 만약 어기는 자가 있다면 관직을 파할 것이다"
- "위서" 고조본기 -
북위 효문제의 칙령 : 효문제는 북위의 7대 황제로 위의 사료에 보이는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한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선비족 옷의 착용과 선비족 동성 사이의 혼인을 금지하였고, 선비족의 성을 한족의 성으로 바꾸었으며, 관제와 예악 형벌 제도도 남조처럼 바꾸었다.
<탐구 자료 소개>
Ⅱ. 인구 이동과 문화 교류
1. 인구 이동과 교류의 증대(p59 - 주제 탐구)
기원 전후~7, 8세기경 집단적 인구 이동의 실태를 사례로 확인하고, 그것이 동아시아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알아보자.
자료 1) 집단적 인구 이동의 여러 사례
[1] (동)진의 원제가 양쯔 강을 건너오고 나서... (동)진을 세운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 이때 백성이 난리를 만나 이 지역으로 흘러들어 왔고, 유민 대부분이 권세 있는 집에 의지하여 식객이 되었다. "남제서"
[2] 보장왕이 천남산을 보내 수령 98인을 거느리고 백기를 들고 (당의)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하였는데, ... 고종이 (고구려) 38,300호를 강남, 회남, 산남, 경서 등의 빈 땅으로 옮겼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3] (413년) 7월 해근 등이 월근배니 부락을 발라산의 서쪽에서 격파하고 말 5만 필, 소 20만 마리를 혹득하고, 2만여 호를 대녕으로 옮기게 하였다. ... 농기구를 지급하고, 사람 수에 따라 농토를 나누어 주었다. - "위서" 태종본기 -
[4] (206년) 조조는 유성에서 (오환의 추장) 답돈의 머리를 베었다. ...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항복하였고, 유주와 병주에서 염유가 통솔하던 오환 1만여 락(부락)을 모두 중원으로 옮겼다. ... 이때부터 3군의 오환은 천하에서 유명한 기병이 되었다. - "삼국지" 위지 오환전 -
[5] (서진의) 걸복치반이 문무 관리와 백성 2만여 호를 거느리고, 이들을 (새로운 수도인) 포한으로 옮기게 하였다. ... 8월에 걸복치반은 (포한에서) 스스로 대장군... 사면령을 내리고 영강으로 개원하였다. "자치통감"
자료 2) 전연의 고구려 침략
3세기 말부터 선비족의 모용부가 성장하여 자주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규모였던 것이 342년에 있었던 모용황의 침략이었다.
(342년) 전연의 모용황이 큰 무리로써 이어 오니 우리 병력이 크게 패하였다. 좌장사 한수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가 승기를 타고 드디어 환도로 들어왔다. 왕(고국원왕)이 혼자 말을 타고 달아나 단웅곡으로 들어갔다. ...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싣고, 창고 안에 있던 여러 대의 보물을 약탈하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 버리고 돌아갔다. ... 343년, 왕이 그의 동생을 (전)연에 보내 신하를 칭하며 조회하고, 진기한 물건 천여 점을 바쳤다. 이에 연왕 모용황이 그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보내고 그 어머니는 남겨 두어 인질로 삼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자료 3) 북위 황실의 혈통 변화
(그림 자료)
자료 4) 풍속의 변화
(그림 자료)
<p112 내용 발췌>
Ⅲ. 생산력의 발전과 지배층의 교체
3. 새로운 지배층의 등장
소주제 : 무인의 성장과 무사 정권의 수립
(중략)...
전형적인 무인 정권은 일본에서 성립되었다. 일본에서는 12세기 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에 막부를 세우고 정이대장군의 직함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무사가 정권을 장악하였다(1192). 가마쿠라 막부 체제는 전국의 무사 계급을 주종 관계로 조직한 정치 형태였는데, 이때 성립된 무사 정권의 기본 구조와 막부와 조정의 관계는 19세기까지 이어졌다. (후략)...
<p188 내용 발췌>
Ⅴ. 국민 국가의 수립
2. 제국주의 침략과 피해
소주제 : 제국주의 침략 전쟁의 전개
(중략)...
동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은 19세기 말에 일본이 등장하면서 커다란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은 양속 관계를 맺고 있던 류큐를 강제로 자국의 영토로 만들었다. 북방으로는 러시아와 대립하면서 홋카이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시켰다. 그 결과 오랫동안 독특한 문화를 유지하였던 원주민인 아이누 족은 독자성을 상실해 갔다. (후략)...
<p168 내용 발췌>
Ⅳ. 국제 질서의 변화와 독자적 전통의 형성
4. 전통 사회의 완성
소주제 : 17~19세기의 베트남 사회
레 러이가 세운 레 왕조(1428~1788)는 과거제와 중앙 집궈적 관료제를 통해 황제가 전국을 지배하는 유교적 사회 체제를 만들고자 하였다. 또, 균전제를 통해 농민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지방 행정촌인 사(社)를 만들어 관리하게 하는 등 농업 생산력을 크게 증진하였다. 오랫동안 경쟁자였던 남쪽의 참파를 무너뜨려 영토를 늘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이후 막씨가 정권을 찬탈하고 이후 찐씨와 응우옌씨가 남북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시기가 2세기 이상 지속되면서 끊임없는 전쟁과 혼란, 농민의 저항이 이어졌다. 찐씨 치하의 북부에서는 촌락의 자율화가 더욱 진전되는 한편, 유교 문화의 확산도 계속되어 경전을 배워 과거를 준비하는 교육이 널리 보급되었다. 유학자 계층도 어느 정도 형성되었다. 중부의 응우옌씨는 남쪽의 캄보디아 영역 일부까지 장악하여 메콩 강 델타 지역을 베트남의 영역으로 삼았다. 이곳에는 명청 교체기에 상당수의 중국인이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18세기 중반 이후 사회 위기와 빈번한 농민 반란 소게서 떠이 썬 왕조(1788~1802)가 열렸으나, 곧바로 응우옌 왕조(1802~1945)로 대체되었다. 응우옌 왕조는 처음으로 오늘날과 비슷한 베트남의 영토를 확보하였으며, 중앙 집권적인 관료제를 통해 유교 사회를 만드는 정책을 추진하여 전통적인 베트남 사회의 모습을 완성하였다. 하지만 응우옌 왕조는 건국할 때 도움을 받은 프랑스의 침략으로 19세기 중엽부터 점차 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p132 내용 발췌>
(중략)...
명은 초기에 장성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정통제가 몽골 세력의 침입에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나갔다가 전군이 궤멸하고 황제 자신도 포로가 되는 엄청난 굴욕을 맛보게 되자, 북방에 요새와 방어벽을 세우고 수비병을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후략)...
첫댓글 제발 좀 한국사 입문 전공같은거 좀 제대로 보고 자료가 첨삭되었으면.. 또 되도안한 전방후원묘가 일본보다 기원이 앞선게 한국하고 중국에서 발견된지가 오랜데 전방후원묘 근거로 전라도에 일본 세력이 강해니 뭐니 하는 고고학적으로 되도 안한 견해로 밝혀진거 또 어줍잖게 교과서에 싣거나 그런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이 책의 가야 파트만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글쎄요. 그런식의 두루뭉술한 비판이면 그 말 그대로 님한테 돌려줘도 님이 해명할 꺼리는 없어 보이네요. 님이 어떤 책을 언급 하든 님이 말씀하신 논리 그대로 제가 똑같이 읊으면 그만이니까요. 어떤 부분이 왜 자의적이고 민족주의 적인지 예를 하나쯤은 말씀해 주셔야지요. 제가 읽기엔 오히려 1권의 구석기 신석기 파트는 국내 연구 성과는 배제하고 해외 연구 성과만 상당수 그대로 가져와서 쓴 티가 나서 민족주의하고는 거리가 먼데 말이죠. 오히려 김정배 씨는 민족주의하고는 전혀 반대의 위치에 있다고 욕을 듣는 사람입니다.김정배가 민족주의자였다면 재야사학에서 그렇게 까지 않겠죠.
졸업 면접 인턴 채용 취업 결혼 님은 제가 새로 쓴 글 한 번 읽어 보세요.
보면서 어이가 없습니다ㅋㅋ한국인들한테 민폐를 끼치는 '반도족'은 어디를 가나 하나씩 기어나오네요.(주어없음)
그럼 서양사도 따로있나요??
서양사는 아닌데 어짜피 세계사가 거의 서양사 위주라서.. 세계사 그거 이름만 바꿔도 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