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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에게 4
어느 날
내 겨드랑이 틈에 둥지를 내린 네게
내가 토해내는 영원이란 환상에
너는 마취되고
아는 마취된 네 향기에 중독되었지
오요요 오요요
새싹의 노래를 부르면
환상이 형상으로 완성되는 걸까
더 견고한 환상의 둥지를 짓는 걸까
바람, 바람에게 묻고 싶다.
중국여행 2.
-도문강에서
암 환자의 머리를 옮겨놓은 북녘 산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 수령 만세!'
낙관처럼 찍혀 있다
핏기없는 산의 이야기를 힘없이
물속에 흘려보내는 도문강 변, 달맞이꽃은
노란 그녀의 몸을 강물에 휑궈내고 있었다
어쩌면 토해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보는 이에게 강요하는 수묵화에 찍힌 낙관처럼
강물처럼 구불구불 지나온 길을
토해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가슴속에서 오래 산다는 것은 무얼까
어느새 바람은 우리를 북한접경에 옮겨놓았다
허름한 상점들에 내걸린 금강산 수묵화에선
풍화에 다듬어진 돌부처의 말없는 미소가
계곡으로 흘러내려가고 있다
사람들 속에 뿌려진 내 명함과 같이.
꽃에게 3.
네 진한 향기를 위해
수 劫을 미친 듯 달려와
속살에 한 번의 키스를 하고
씨방속에서 익사하고 마는 저 한 줄기 태양 빛
그 빛을 잉태한 한 마리 밧딧불이가 되어
이제 노을이
노릇노릇 묻어나는 너의 꽃잎
그 위로 날아들고 싶다
욕심일까 그럼?
꽃에게 2
우리
형체 없는 바람으로 만나
시간의 모래밭에
서로의 빛깔과 향기의 형상을
지워지지 않는 화석으로 빚어내다
끝내 그 화석마저 모래가 되고
바람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돌아오는 길
홀씨를 모두 떨어낸 민들레 마른 줄기
무섭게 번식하고 있었다.
꽃의 장례식
-김선일 죽음과 이라크 파병에 앞서
계절을 마감하는 꽃은 노래로 축복할 일이지만
미친 바람소리에
지워지는 꽃은 심장에 묻을 일이다
맥박이 뛸 때마다 꽃 영가의 맑고 슬픈 울음을
오늘, 오늘 즈려 볼 일이다.
반세기 전, 피를 나눈
우정의 목걸이에 걸려
끝내 가랑이를 벌리고 누운 우리들의 자화상.
사막의 거울을 통해서 보아라
꽃밭의 체면이란 허울도
비옥한 토양을 위한 자양분도
가슴에 가슴이 없는 꽃들이 토해내는
미친 바람소리이다.
제대로, 꽃의 질량을 달아 보았는가
억겁을 달려온 우주 별빛들이 버무려진
빛과 향기의 거대함, 어떻게 측량할 수 있는가
꽃이 지는 것은
다시 버무려질 기약없는 별빛으로의 환원이다
그래서 神과 축복의 물감으로 슬픔을 지우고 있다.
이제 미친바람 소리에 의해
모가지가 싹둑 잘린 너의 꽃송이.
가슴 복판에 그려보아라.
꽃 모가지에서 뚝뚝 떨어지는 꽃물, 네 심장으로 받아보아라
미친 바람소리를 토해낼 수 있는가?
연꽃 차를 끓이면서
연꽃잎을 달인다
짐짓 훔치지 마라
바람을 소리로 빚어내는
풍경의 몸짓과
비로자나불의 미소에 담긴 법음을.
촘촘한 모시 천으로 걸러내 보라
재차 걸러낸 후에 마셔보라
올챙이 오줌냄새가 혀끝에서 깔끄럽다
샤리 속에 얼핏 감춘
발가한 부처의 성기에서 흘러나온 정액이 향기롭다
연꽃이 뿌리를 내린
오타수(汚濁水) 갯벌 냄새가 풋풋하다
이제 네 눈에 겨우
분홍 연꽃이 필지 모른다
저녁 밥상, 연근조림에서
숭숭 뚫린 구멍이 조금 씹힐지 모른다.
-샤리:인도의 옷.
한복이나 양복처럼 꿰매어진 것이 아니라
긴 천을 둘러서 몸을 가리는 형식이다.
조계산
순천, 조계산을 오르다
연어이고 싶다
바람의 옛 발자국을 거슬러 올라
세월 갈피마다
진달래 꽃잎으로 수놓은 빨찌산
그 붉은 영상들, 현미경에 올려놓고 싶다
분명
바람의 등살에
산이 되어버린 배고픈 갈잎들의 울음 찌꺼기.
만져질 것이다.
그 소박한 울음들
부엽토로 재생되어, 오늘의 산을 만들고
영원한 산맥으로 이어가는 입자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등을 마주한 절벽의 메아리보다
풀잎들이 체온을 서로 비비는 소리일 것이다.
오늘 팽성마을 미군부대
정문 조계산의 싹이 파릇파릇 돋고 있었다.
-조계산: 순천에 있는 해발 800m의 산이다.
백아산,조계산,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빨찌산의 거점지로 유명하다.
칡
한 줌의 빛이
저토록 아름다운 축복일까
엎드리고, 아슬 아슬 매달린 채
빛을 향해
하늘로 하늘로 달려가는 그녀들
바람결에 춤추는 푸른 손들이
살아있음의 대 환희를 말하나 보다
뿌리에 토실하게 잉태된 그녀들의 둥근 방을 보면서
단순히 보라색 꽃잎에서 담궈지는
연가(戀歌)의 방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오늘 아침 등걸을 오르고 있는
야들야들한 순에서
똑똑 떨어지는 수액(水液)을 발견했다
아침, 아침을 길어 올리는 그녀들의 유선(乳腺)이었다
그 유선(乳腺)에는 희망 샘물이 넘실거릴 것이다.
저 등걸은 희망이 가뭄 져 있는 걸까
푸스스 부서지는 줄기에는
흙과 화로로 향하는 이정표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빛의 뿌리
네 눈이 달과 태양의 집이래
살짝 감아볼래
장미와 나무들이 검은 옷에 쌓여있고
눈동자에 갇힌 어둠이 육중한 무게로
널 눌러오는 것 같지?
꽉 감아보렴
사르륵 사르륵 별들이 피어나지
장미도 무지개 일곱 색깔로 피어나고
실눈을 떠 볼래
개나리 꽃잎에 입 맞추는 보름달이 보이지
이파리마다 푸른 물감을 바르고 있는 태양도 보이고
완전히 뜨면 태양과 보름달의 둥지인 사랑 빛이 보일 걸.
이제 다시 감아보렴
우주를 유영(遊泳)하는 사물들의 고리가 보이지
그게 뭘까?
진 달 래
청솔가지를
끌어당겨 알몸을 가리고 있는 그녀
분홍빛 꽃잎 사이
송송한 음모에는 태양의 입술자국이 묻어 있었다
어둔 지하에 흩어진 꽃불 알갱이들
손톱이 닳도록 길어 올리는 것, 꽃이라 한다
자식을 길러낸 어머니의 굵은 손마디가 꽃받침이라 한다
어머니 주름살 위에 그을려진 미소가 꽃의 향기라 한다
피고, 열매 맺고, 대지로 되돌리는
내 안에 가둔 꽃의 어머니를 청솔가지 아래 묻어야 한다
이제 진달래 꽃잎 속 암술을 헤쳐보아야 한다
태양의 붉은 입술이 열어놓은 씨방마다
해일로 솟구치는 파도가 보일지 모른다
봄바람에 땀을 씻는 꽃의 미소가 향기로 스쳐갈 지 모른다
그제서야 진달래의 분홍향기를 제대로 볼 수 있을지.
동그라미
저 보름달처럼 둥근
동그라미는 가슴 뚜껑을 벗어야 할거야
매끈한 선을 위해 항상 같은 힘, 같은 속도로 천천히 그리렴
동그라미는 시작점과 끝점이 서로의 선속으로 묻혀야
굴렁쇠처럼 잘 구를 수 있는 것 알지
행여 울퉁불퉁한 이 빠진 부분은 안에서 밖으로 펴야 할거야
밖에서부터 펴려고 한다면 네모 얼굴이 될 것 같구나
보름달의 어머니가 컴컴한 그믐인 것처럼
동그라미의 가슴은 텅 빈 공간이란 것 볼 수 있니
네 동그라미를 굴려보렴
처음과 끝의 점,
밀고 끌어주는 탄성으로 잘 굴러가는 것 같지
이제 네게 사랑이란 숙제를 내고 싶구나.
첫댓글 영우친구가 보내준 시집두권을 어제 받았습니다..여러시인들의 시가 있지만 바위소리 친구의 시들을 보지못한 친구들을 위해 옮겨봅니다...
저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이영우씨...
좋네요~~ 하나 하나의 글들이...비 오는 겨울밤에 잘 봤습니다.........실님아~수고했네요...
공사니임~~ 얼굴 잊어버리겠어요~~ 건강하시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