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에 정조에 대한 학계와 대중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정조와 그 시대에 대한 인식이 커다란 변화를 겪었는데, 이런 변화가 역편향의 흐름을 보이고 있어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김백철 계명대 교수가 지적했다. 정조의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 올바르게 서술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정조 사후 19세기 조선의 쇠퇴와 멸망이 정조의 개혁이 완수되지 못한 탓이라고 보는 것은 억지스러운 견해라는 게 김 교수의 관점이다.
1980년대까지 정조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그리 높지 않았고, 방송 사극 같은 대중매체가 그려낸 정조의 모습도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에 괴로워하는 유약한 왕세손, 나약한 임금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변화는 1990년대 초에 찾아왔다. 이 시기에 정조를 조명하는 문학작품과 다큐멘터리가 쏟아지면서 개혁 군주, 탕평 군주, 나아가 ‘유교적 계몽절대군주’라는 정조 상이 마련됐다.
이런 변화와 함께 학계의 관심도 폭증했다.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국립 서울대 안의 규장각 설립이다. 정조 시대의 자료가 공개되고 대규모로 간행됨으로써 학계의 연구 기반이 마련됐는데, 이것이 대중의 관심과 결합해 정조 연구의 폭발적 증가를 가져오고 ‘정조 신드롬’을 낳았다.
1990년대에 문민정부의 등장 이후 낡은 체제를 청산하는 ‘개혁’이라는 시대적 과제가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는데, 이런 시대 변화가 ‘개혁 군주’라는 상을 정조에게서 찾아내는 계기가 됐다. 더구나 1990년대에 민주화와 산업화 성공으로 우리 안에 생겨난 자신감이 식민사학을 걷어내고 조선시대를 바르게 볼 눈을 열어주었다.
식민사학은 일본의 군사적 침략이 조선 멸망의 핵심 원인이었다는 사실은 감추고, 조선의 붕괴의 원인이 조선 내부에만 있었던 것처럼 오도했다. 끝없는 당파싸움과 주자학에 매몰된 공리공담이 조선 패망의 원인이었다는 식민사학의 역사 왜곡을 극복하자, 붕당정치와 주자학 담론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이 정립됐고 18세기 정조시대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시야가 열렸다.
정조에 대한 관심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그런 관심 속에 정조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개혁이 완수되지 못하고 긴 침체기를 거쳐 조선이 패망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는 담론이 형성됐다. 정조 사후 100년도 더 지난 뒤에 일어난 사건의 원인을 정조의 이른 죽음에서 찾는 것인데, 이런 관점은 정조의 개혁을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것이라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조선 문물제도의 융성기를 이끈 성종이 25년 치세를 누리고 39살에 세상을 떠난 것과 비교하면, 같은 25년의 치세 후 49살에 세상을 떠난 정조를 ‘너무 일찍 죽은 비운의 왕’이라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김 교수는 정조의 정책이 상당 부분 순조로 이어졌고, 실학자 정약용의 제안도 고종 시대에 현실정책으로 채택되는 등
정조의 개혁 미완성이 조선 패망의 원인이 됐다는 담론은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조 사후 영남 ‘남인’ 중심으로 지역차별론이 형성됐는데, 이런 인식은 영남 남인 사이에 정조의 죽음을 역사적 좌절로 느끼는 정서를 증폭시켰다. 그러나 정조가 탕평책을 강력하게 실시해 남인의 등용에 각별히 신경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정조 사후에 영남인 전체가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영남인 과거급제자는 한성을 제외하면 전국 1위를 기록했고, 18세기에 탕평정책으로 오히려 그 비중이 낮아졌다가 19세기에 다시 올라가 고종대에는 영남인 과거급제자가 조선 500년 중 가장 높았다.
이런 사정은 극심한 지역차별을 당했다는 평안도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평안도는 영남에 이어 과거급제자를 두 번째로 많이 배출한 곳이었다. 영남차별론은 정조대의 소수 정파 남인 우대가 사라진 것이 후대의 기억전쟁에서 영남 차별로 오인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