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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살아냈던 힘은
이혜숙
purelhs@hanmail.net
엄마의 비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하긴 그 비밀이란 게 늘 그랬듯 보자기 매듭을 느슨하게 풀어놓는다든지 상자 뚜껑을 슬쩍 덮어놓는 식이다. 내가 발견하고 내용물을 궁금해 하도록, 고의든 우연이든 여기저기 단서를 남겨놓기 일쑤였다.
비밀 공개는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한 벌밖에 없던 엄마의 외출복이 늘어나고 점점 화려해지기 시작해서 물어봤다.
“엄마 옷은 왜 하나 같이 꽃무늬 아니면 반짝이야?”
엄마는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누가 들을세라 말했다.
“거기 가면 여자들이 얼마나 잘 차려입고 오는지 알아? 반짝이 아니면 입은 티도 안 난다, 얘.”
엄마가 불면증과 우울증을 앓고 있을 때 동네 친구가 데리고 간 곳이 사설 무도회장이란다. 그동안 내게 털어놓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듯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거기도 다 사람 사는 데더라. 춤바람에 빠지면 살림은 뒷전이고 미쳐서 오는 줄 알았더니,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줌마들도 있고, 자식 번듯하게 키운 아저씨들도 있어.”
무엇보다 달게 잔다는 말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5년 동안 엄마가 편히 자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잘됐네. 즐겁게 놀고 와서 잘 주무신다니.”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엄마의 공범이 되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나는 엄마의 갈대밭이었다. 속 터놓고 말할 친구가 없어서였을까. 내가 말귀를 알아들을 즈음부터 엄마는 당신 이야기를 내게 했다. 아버지와 선보던 날, 힘들었던 시집살이, 서울로 취직하러 온 이야기… 어린 시절부터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싹이 날 정도였다. 특히 아버지와 상의도 없이 혼자 감행한 서울 상경 기는 언제 들어도 무용담이었다. 결혼한 여자라는 걸 숨기려고 비로드로 통치마를 해 입고 파마부터 했다는 것이다. 신혼 초에 가출한 새댁을 찾아 나선 신랑은 그 덕에 서울에 뿌리를 내렸다. 1960년이었다. 서울만이 살길이라고 무작정 상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지만, 아내가 앞장선 경우는 흔치 않았을 터. 엄마가 진취적인 여성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엄마 때문에 일곱 살부터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는 아이가 되어 버렸다.
“너도 아버지가 지난밤 안 들어온 거 알지? 아침에 옷 갈아입으러 오면 엄마가 집을 나갔다고 해.”
내가 태어나기 전에 했다던 가출을 다시 하겠다는 것인가. 겁이 덜컥 났다.
“엄마, 정말 나갈 거야? 우리 다 버리고?”
엄마는 내 손을 잡고 토닥이며, 그러나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진짜 나가는 거 아니니까 울지 말고 잘 들어. 엄만 다락에 숨어 있을 거야. 하지만 아버지에겐 일어나 보니까 엄마가 없어졌다고 해야 해. 동생들한테도 절대 말하지 말고. 니가 잘 해야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는 거야, 알았지?”
진짜가 아니란 말에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엄마 말대로 아침에 들어온 아버지는 동생들이 엄마가 없어졌다고 울고불고하는 바람에 달래느라 지각을 하셨다.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배달시켜준 짜장면을 먹었다. 동생들은 엄마가 집을 나갔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희희낙락이었다. 그러나 나는 자꾸 다락으로 눈이 가서 짜장면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몇 번의 거짓말에 연기까지 늘어가면서 나는 아버지의 외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열 살 무렵에 엄마를 이해하고 지켜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엄마의 비밀을 공유하는 갈대밭이 된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아버지와 해로하지 못했다. 부부싸움도 젊어 한때일 뿐, 등 기대고 살 줄 알았던 시간은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마흔다섯에 아버지를 보낸 엄마는 몇 해 동안 눈물 마를 새 없이 애통해했다. 엄마가 그리워하는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듣고 보았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든 아내와 상의하고 하자는 대로 하는 남편, 몸이 약한 아내를 염려하는 남편, 월급뿐 아니라 비상금까지 털어주는 자상한 남편… 세상없는 애처가로 변해 있었다. 뜻밖이었다. 그러나 엄마의 회상을 들어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좋았던 기억만 편집하고 나머지는 다 폐기한 것이니 말이다. 엄마가 편집한 아버지는 엄마의 남편일 뿐, 어느 한구석에도 내 아버지인 부분이 없었다.
나는 그런 엄마가 섭섭했다. 엄마 편만 들다가 정작 아버지하곤 말 한마디 다정하게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아버지를 미워한 날이 더 많았다. 기어코 나는 엄마가 폐기한 기억을 되살려주었다.
“엄마, 다 잊었어? 아버지가 얼마나 속 썩였는지?”
말해놓고 나니 공연히 엄마의 환상을 깨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내가 상처를 헤집고 말았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다 지난 일이야. 니 아버지 오십도 못 채우고 갔다. 그동안 마누라, 자식 건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니? 아침에 양복 입고 나가니까 편히 일한 줄 알았어? 너희에게 작업복 입은 모습 안 보이려고 그랬던 거야. 평생 일만 하다 간 사람인데, 바람 좀 피운 게 무슨 대수라고. 아니, 그나마 잠깐 그럴 때라도 있었다고 생각하면 내가 좀 덜 미안해.”
허공을 향한 엄마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기억은 쉽게 편집하고 폐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엄마는 속 썩이는 남편이라도 곁에 있기만 하면 좋겠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엄마 편이라고 자처했던 나는 엄마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엄마의 외로움과 좌절을 이해하기에는 자식들은 어렸고, 저마다 바빴다. 그때 손을 내민 동네 친구가 있어서 엄마는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엄마의 얼굴에서 생기가 돌고 웃음이 피어났다. 엄마는 일을 다니는 틈틈이 ‘거기’도 다녀와야 해서 바빠졌다. 자식 넷 뒷바라지도 만만치 않았지만,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가 춤의 세계에 들어섰다는 것이 좀체 믿어지지 않았다. 잔치에서도 노래 한곡 부를 줄 모르는 엄마가 춤을? 그 미스터리를 추적해 보니 어느 날 갑자기 변한 게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노래는 못 불러도 노래방에 따라가는 것을 좋아했고, 자식들이 모여 맥주 파티라도 할 때면 밤늦도록 안주를 만들어주곤 했다. 술도 못 마시면서 곁에서 시중드는 것으로도 즐거워하는 엄마야말로 신명이 우리보다 한 수 위가 아닐까.
엄마가 눌러두었던 흥을 꺼낸 것이 쉰 살이 넘어서인데, 나는 그때 결혼을 앞둔 스물여덟 살이었다. 엄마를 두고 갈 걱정도 무색하게, 사교댄스에 발을 들인 엄마는 음악만 나오면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통제가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카세트를 틀어놓고 신나게 스텝을 밟다가 식구 중 누가 들어오면 시치미를 떼고 싱크대 앞에 서는 엄마를 보면서 웃음을 참곤 했다.
그러나 결혼 날짜를 잡고 혼수 준비를 하면서 결국 엄마와 부딪치고 말았다. 남대문 시장에 갔을 때였다. 엄마는 무얼 봐도 건성이었다. 이불 가게에서 옆을 보니 엄마가 보이질 않았다. 시장 구석의 스피커 앞에 서 있는 엄마. 그냥 서 있는 게 아니었다. 트로트 가락에 맞춰 스텝을 밟고 있었다.
“엄마아!”
그제야 화들짝 놀라 달려와서는 보지도 않고 지갑부터 열었다. 다른 가게에서도 마찬가지, 나는 고르고 엄마는 달려와서 계산만 하는 동작의 반복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밤새는 줄 모른다더니 내가 꼭 그 짝이다, 그치?”
엄마는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지만 나는 굳은 표정을 풀 수 없었다.
출산이 임박한 딸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엄마는 여전히 그쪽 세계에만 골몰해 있었다. 누워있는 딸 곁에서 표정이 뜬구름 잡듯 멍했다. 머릿속에서 계속 트로트 가락이 재생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스텝 밟고, 한 바퀴….’
춤 동작을 까먹을까 봐 시도 때도 없이 복기하고 있는 엄마, 내게 무신경한 것이 또 화를 돋웠다.
“아, 그렇게 춤추고 싶으면 가 버리라고. 나 혼자 낳을 거야.”
말은 그렇게 했어도 엄마가 진짜 갈까 봐 옷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바로 진통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엄마도 마치 멀리 갔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내 손을 잡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날 일이 미안했던지 엄마의 산후 구완은 극진했다. 처음 맞이한 외손녀에 대한 사랑 또한 더할 나위가 없었다.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집 안엔 트로트 대신 모차르트가 흘렀다. 아기를 위한 음악이라는 걸 아는지, 엄마의 발은 모차르트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미역국을 끓여놓고 일을 나갈 때마다 엄마는 미안해했다. 유학 간 남동생부터 대학생, 고등학생까지 동생들이 다 학생이어서 일을 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를 가사 도우미로 부른 사람들은 하루 치 일당을 뽑을 생각에 일감을 많이 내놓았다. 커튼을 빨고 청소에 부엌일에. 점심을 거를 때도 허다했다. 심지어 절도범으로 몰아세우는 여자도 있었다. 그 날도 녹초가 되어 돌아온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의 여자는 다짜고짜 다리미가 없어졌다며 의심부터 했다. 엄마가 그 날은 다림질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내가 수화기를 빼앗았다.
“당신, 사람 뭐로 보고 함부로 말해? 우리 엄마, 박사 엄마 될 사람이라고! 그까짓 다리미 하나 훔쳐 올 사람으로 보여?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거야. 얻다 대고 함부로 입을 놀려, 이 미친 여편네야.”
욕설까지 하며 악을 썼지만 결국 울고 말았다. 그 여자 때문만이 아니라 내게 더 화가 났다.
그 후로 엄마는 동네 필통 공장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엄마의 반짝이는 옷들은 여전히 옷장에 박힌 채 나오지 못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대신하고 싶어서 공범자라는 것을 넌지시 상기시켰다.
“엄마, 시간 내서 놀다 오지, 그래?”
“그럴 새도 없지만 그럴 마음도 없다, 얘. 그럴 시간이면 우리 손녀 한 번 더 안아줘야지.”
할머니로 완벽 변신한 엄마가 왠지 반갑지만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난 공범자 노릇을 한 적이 없었다. 말로는 이해하는 척했지만, 눈빛으로는 못마땅해 한 것을 모를 엄마가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허허벌판에 내몰리듯 자식 넷을 떠안아 버린 엄마. 살림밖에 모르던 사람이 모욕을 참아가면서 남의 집 일을 해야 했던 날들. 힘들게 가르쳐 놓고 나면 한숨 돌릴 새 없이 결혼시키고 손주까지 봐야 하는, 벗어날 수 없는 엄마라는 굴레. 춤을 추는 두세 시간은 엄마라는 신분을 내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을 텐데, 내가 그 시간마저 빼앗아버린 건 아닐까.
엄마의 오십 대는 속절없이 흘러갔다. 하루는 엄마가 내게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한동안 꺼내지 않았던 비밀이 또 있나 싶었다.
“너만 알고 있다가 꼭 내 말대로 해줘야 한다.”
“왜 이렇게 심각해?”
“허투루 듣지 말고. 나 죽으면 네 아버지와 합장하지 말고 화장해서 뿌려 줘.”
“응? 엄마 힘들 때마다 빨리 죽어서 아버지 곁으로 가는 게 소원이라고 했잖아.”
“그건 옛날얘기지. 합장하면 너희들에게 안 좋아.”
“무슨 말이야? 어디 가서 점 봤어?”
“아니야. 내 생각이 그래. 엄마가 춤추러 다닌 거 네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려 봤을 텐데, 내가 곁으로 가 봐라, 분명 떠밀어버릴 텐데. 옛날부터 부부 사이가 나쁜 사람을 합장하면 무덤 속에서도 싸워서 자식들한테 안 좋다더라.”
“아이고, 어디서 그런 미신을….”
“미신이든 아니든, 아버지에게 미안하니까 그냥 내 말대로 화장해 줘.”
“진심도 아니면서 왜 그런 말을 해. 그리고 엄마가 미안할 게 뭐 있어? 아버지도 그래. 양심이 있으면 엄마에게 뭐라 못하지. 아버진 살아서 엄마한테 못할 노릇한 사람이야. 일찍 돌아가셔서 고생시키고. 아, 정말 무덤 속에서 싸우게 되면 엄마도 큰소리쳐. 너무 힘들었을 때 춤이라도 추었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았던 거라고.”
“얘는 내가 하는 소리를 장난으로 듣고….”
나도 장난으로 들을 소리가 아닌 줄 알지만 엄마의 생각은 너무도 애처로웠다.
“내가 따라가서 대신 따져줄 순 없고. 암튼 나는 엄마 말대로 못 해. 설령 두 분이 치고받고 싸운대도 합장시킬 거야. 죽어서도 부부싸움 할 정도면 정도 보통 정이 아니지. 어쨌든 싸움 끝은 있을 테니까 우리들이 잘 풀리면 이제 두 분 화해했나, 하면 되겠네.”
“너완 말이 안 통한다. 누구에게 이 부탁을 하면 좋으니.”
더는 고집부리지 않았지만 고개를 돌리는 엄마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옅은 웃음을 나는 보았다. 그 말을 할 때는 다시는 ‘거기’에 가지 않을 때였다. 그러곤 몇 해 동안 가지 않았던 성당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죄의식 때문에 미사에 참석하지 못했던 엄마였다.
지금 내 나이보다도 적었을 때 혼자 버텨야 했던 엄마에게 ‘댄싱 퀸’이었던 시간이 있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 몇 년이 잠깐 들었다 스러진 햇빛 한 줌이었더라도 엄마의 죄의식은 그보다 더 오래 가서 속죄하고 또 속죄하며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지금도 엄마의 기도 발은 엄청 세다. 자식 넷은 물론 손자, 손녀의 앞길을 터주었으며 늦은 나이에 시집간 이종동생이 예쁜 딸을 낳은 것도 엄마의 기도 덕분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하나님도 사한 죄를 아버지가 받아주지 못하다면 죄송한 말씀이나 아버지는 꽁생원이다. 엄마가 미리 했던 유언은 꼭 합장해달라는 다른 표현이 아닐까. 엄마가 아버지에게로 가면 아버지는 선뜻 손을 내미실 것이다. 수고한 당신, 애쓴 당신과 춤 한 번 추자고.
하긴 부부 사이의 일, 누가 알겠는가. 돌아보면 아버지도 좀 놀 줄 아는 멋쟁이셨는데 무슨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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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정의 달, 어머니 이야기가 빠질 수 없지요.
엄마의 초상은 각기 다르겠지만 연민과 그리움도 좋으나
그 중에서도 여인으로서의 엄마의 모습은 어떠신지요?
너무너무 재미난 수필이에요. 일하다가 읽다가 다시 일하다가 나와서 읽고요. 우리 아이들이 저를 위해 글을 쓴다면 몇 줄이나 쓸지 궁금해집니다. 이토록 좋은 수필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사교춤으로 고독을 잠재울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그 춤 취미가 폐가망신을 시킨 것도 아니고, 그 길로 이끌어 준 친구분이 참 좋은 일을 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