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조명
참나무처럼
전종호
너처럼 살고 싶었다
푸른 빛 맨몸을 던져
순간에 온 산을 덮고
햇빛 찰랑이는 이파리를 흔들며
무릎 아래 도란도란
새끼들을 키우며 살고 싶었다
독야청청 소나무는 아닐지라도
비탈이나 능선 아니면
아무데서나
도토리 한 알 물고
어린 꽃들과 키득거리는 다람쥐나
낮술 한 잔에 흥얼흥얼 얼큰한 콧노래
세상을 다 잃은 듯 땅 꺼지는 한숨 소리도
지켜보면서 그렇게 서서
여름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었다
사는 게 오르막만 있는 게 아니지
오르막 내리막 걷다 보면 높은 산이 되고
큰 나무는 험한 산에서 사는 법
내려가는 길은 더욱 조심하시게
투박하지만 부드러운 허리
길손에게 맡기고
그렇게 서서 가을을 맞고 싶었다
온몸을 태워 진갈색으로 타올라
가을이 지나면
한꺼번에 아래로 땅속으로 져서
작은 풀벌레들의 먹이가 되거나
살아 있는 것들의 거름이 되어
날 기억하지 마오
산속으로 걸어 들어가
겨울 눈꽃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오대산에 가면
오대산에 가면 새벽 일찍 일어나
전나무숲길을 걸을 일이다
숲에서는 절대 키와 나이는 재지 말고
숲길을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일 일이다
바람은 발이 없어서 빠르고
말이 없어도 통하지 않는 법이 없으니
바람 한 주먹 깊이 들이마실 일이다
턱 하나 없는 무장애 평탄한 길에서
숨소리를 들으며 숨결의 폭을 따라 걷고
마음이 움직이면 신발 끈을 풀어
숲의 평온을 받아들이고
맨발로 땅의 가피加被를 느껴볼 일이다
오대산에 오면 저녁 어스름이 내릴 때
선재길 여울 어딘가에 쪼그리고 앉아
차오르는 물소리의 말씀을 들을 일이다
물은 색이 없고 모양도 없으나
쉼이 없고 거침이 없으니
끌고 온 속울음을 억센 물살에 던질 일이다
세상은 깜깜하고 고요 속에 물소리 홀로 밝은데
홀연히 선재 동자 나타나 길을 보여줄 것이니
운 좋아 월정사 넘어 만월산에 달이 걸리고
달을 따라 달맞이꽃 한두 송이 피어난다면
쌓을 수 없는 것이 시간뿐이겠냐마는
지나간 기억 같은 건 모아놓지 말고
꽃의 춤을 따라 함께 환하게 웃을 일이다
꽃내음이 코를 찔러 아는 체 하거든
무명의 풀꽃들 은밀한 민원을 가슴에 새기고
오대산에서는 오로지 낮은 자세로
흐르는 물소리의 진언眞言에 무릎을 꿇고
오대천 물소리 한 바가지 떠안고 돌아올 일이다
바닥
아주 높은 산 위에 올라도
사람의 자리는 한 평 바닥이다
넋을 빼앗는 풍경이나
무심결의 구름이 아니라
등 비빌 언덕이나
몸 눕힐 요만한 바닥
높이의 극한을 바라거나
앞만 보는 직선의 낙관주의는
바닥을 바로 보지 못한다
바닥까지 떨어졌다거나
바닥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어둠의 깊디깊은 슬픔을 모른다
발 디딜 바닥 없이
하늘 아래 설 수 없고
밟히는 사람들의 바닥 없이는
땅 위에 낙원을 세울 수 없음을
캄캄한 어둠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다
강아지 떡
개떡이 아니라 강아지떡이라네 인절미 아니라 인절미 비슷한 팥소 든 찹쌀떡이라네 쌀 공출로 금주령을 내리고 찹쌀을 빼앗고 인절미조차 만들지 못하게 하자 오자미 만들어 쌀을 숨기던 일제 수탈의 시절에 팥으로 겉보기에 시커먼 떡을 강아지떡이라 하고 개새끼 아닌 부황든 내 예쁜 똥강아지들 몰래 먹여 살리던 생명의 떡이었다고 하네 일본 순사 개놈들아 엿이나 먹어라 주먹질하던 빈주먹 같이 못난 모양의 떡 며칠이면 돌아갈 줄 알았던 궁끼窮氣의 미친 육이오 전쟁 피난 시절 살아남기 위해서 이북 사람들이 만들어 팔던 생존의 떡이었다고 하네 점포도 아닌 얼기설기 엮은 포장 아래, 소똥에 개흙에 지푸라기 섞어 벽을 치고 거적때기 깔고 세운 움막 안에서 산목숨 차마 죽을 수 없어서 시린 손 호호 불며 팔던 수모의 기억 오병이어보다 갈급한 구원의 떡이었다고 하네 이제 돌아갈 길은 막혔고 먹고살 만한 남의 땅에서 먹고살 만한 사람들은 다 도시로 나가고 떡의 아픈 내력을 알게 된 도시 사람들이 몰려와 떡줄이 장사진을 이루면서 빈 점포가 다시 문을 열고 열기가 다시 살아나 죽어가던 대룡시장을 살려냈다고 하네 개새끼 주는 것이라고 왜놈들 속이고 굶주린 내 불쌍한 자식들에게 먹이던 떡이 이남에 와서 전쟁 통에 죽을 목숨을 살리고 가라앉던 섬마을을 부풀려 다시 떠오르게 한 섬마을 재생의 떡이 되었다고 하네 황해도 연백 떡이 바다를 건너와 이제 강화 교동 떡이 된 강아지떡 옆집 궁전다방 노른자 쌍화차와 함께 먹으면 더 기막힌 개떡도 아니고 메떡도 아니고 무엇이든 찰떡같이 알아듣고 살리고 살리는 멍멍멍 찰찰찰 강아지떡이라 하네
눌노리 김씨 할머니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때부턴가
농사 나간 엄마 대신 부엌에 들어가
밥을 안치고 자치고 하던 것이
부엌데기 천덕꾸러기 시작이었어라
전라도에서 휴전선 최전방 여기까지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손바닥만 한 찌질한 농사에
서릿발 같은 시부모 봉양에
강아지 새끼 같은 어린 것들 육 남매
키우고 나니 다 나가버리고
어쩌다 보니 영양가 다 빼앗긴
쭈글팽이 깻묵이 되어뿌려 빈 둥지라
어른이 되고 팔십이 넘어서도
남이 해주는 밥 한 끼 못 먹고
아직도 붙어있는 곳이 부엌이라
남편 앞세우고서 아이고 징한 목숨
살 수도 안 살 수도 없고 오늘도
기다시피 겨우 꼬부랑 허리 끌고
밥 한술 뜨려고 부엌에 나왔다네
파리 목숨
허무하게 죽는 생명을 파리 목숨이라고 부르는 것이
파리가 하찮다는 것인지 목숨이 가볍다는 뜻인지는
알 바 없으나 날마다 노동자들이 저리 쉽게 떨어져
죽고 끼어서 죽고 깔려서 죽고 찢기고 불타서 죽어도
힘 있는 놈 누구 하나 눈 한 번 꿈쩍하지 않는 것은
사람 목숨을 발바닥의 때처럼 여기는 시절 탓이니
파리가 작다고 우습게 보고 개나 소나 낮이나 밤이나
돈만 아는 애나 어른 들이나 혹시나 하고 지렁이 용
되려고 매일 매순간마다 용꿈을 꾸고 있는 까닭이다
파리가 얼굴에 붙어 성가시게 해도 귀찮아하지 말고
용처럼 귀하게 대접하고 내친김에 파리 목숨을 청룡
목숨이라고 바꿔 부르면 혹시나 일하는 사람 목숨도
귀히 여기지 않을까 대낮에 헛꿈을 꾸어보는 것이다
시인이라면
쉽게 살지 마라 뜻대로 살면 손해라느니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심지心志를 꺾고
대충대충 잔머리에 눈치 보고 살지 마라
가슴에 와닿지 않은 것을 머리로 쓰지 마라
쓰는 일은 사는 일이니 피상에 머물지 말고
쓰잘데기없이 함부로 말장난을 일삼지 마라
헛된 이름과 진정 없는 박수에 목매지 말고
칼을 갈듯 칼끝을 목표에 날카롭게 겨누듯
칼날을 벼리는 무뚝뚝한 숫돌의 견딤처럼
말과 뜻의 핵심을 골라 시의 심장을 도려내라
언제 도질지 모르는 병을 위해 매일 약을 먹는
병든 이들의 마지막 아침의 기도를 상상하라
반짝이고 빛나는 것이 번득인다 하더라도
몸소 체로 쳐 체득하지 않은 것은 모두 가짜다
여리게 날숨을 뱉고 들숨을 깊숙이 받들어야
밟혀도 살아나는 징한 목숨이 되는 것처럼
흔들리며 꼿꼿한 양심을 단련하는 시인이라면
번뇌 고갱이를 고르고 걸러 단 한 편의 시를 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