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 전문기업이 만든 식물공장, 미래산업이 될 겁니다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31호(2022.06.15))
윤철주 (AMP 64기) AMP동창회장 우리엔터프라이즈 회장
박정희 대통령이 명명한 장수램프로 유명
40대에 사장돼 계열사 세 곳 코스닥 상장
회사 식구들과 공생한다는 마음으로 경영
약품·화장품 원료 제조 식물공장에 승부수
윤철주 우리엔터프라이즈 회장이 지난 4 월 AMP동창회 신임 회장으로 선출됐다. AMP는 우리나라 최초의 최고경영자과정으로 6000여 회원 네트워크를 자랑한다. 입학 조건도 까다로워 삼수, 사수를 통해 들어간 회원들도 많다. 자부심이 강한 조직인 만큼 회장으로서의 명예와 부담이 모두 무거운 자리이다. 윤철주 회장은 평사원으로 출발해 40대에 사장이 됐으며, 지금은 최대주주다. 장수램프로 널리 알려진 우리엔터프라이즈(구 우리조명)는 50년 전통을 자랑하는 광원 전문기업이다. 우리엔터프라이즈와 계열사인 우리바이오, 우리E&L이 모두 코스닥에 상장돼 있다. 최근 사명을 우리조명에서 우리엔터프라이즈로 변경하고 첨단 업종으로 사업을 다각화하고 있다. 지난 5월 23일 안산 반월공단 내 본사 집무실에서 윤 회장을 만났을 때 왼손에 낀 투박한 반지가 눈길을 끌었다. 오래전 직원들에게서 선물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 회장은 “조폭 두목 반지처럼 보여 잘 안 끼는데, 천연물 원료 사업 등 새로운 일에 뛰어들며 각오를 다지기 위해 다시 착용하고 다닌다” 고 말했다.
-직원들이 대표에게 반지를 선물하는 경우는 드문데, 사연이 궁금합니다.
“1978년 우리사주조합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회사 주식을 보유하게 했는데, IMF가 터지고 금융개혁법이 제정되면서 자산 100 억원 이하인 직장새마을금고는 폐쇄하라는 조치가 내려졌어요. 직원들이 보유한 주식이 환금성을 잃게 돼, 그 가치를 살려주기 위해 우리엔터프라이즈를 1999년 코스닥에 상장했습니다. 이를 이어 우리바이오(구 우리 ETI)도 2005년 코스닥에 상장했는데, 그전에 직원들에게 성과급으로 준 주식이 꽤 있었습니다. 상장 후에 주가가 많이 올라서 직원들이 경제적인 혜택을 많이 받을 수 있었죠. 이런 부분들이 고마웠던지 어느 날 직원 들이 반지를 선물로 가지고 왔어요. 뭐 이런 걸 샀느냐고 나무랐지만 속으로는 정말 기뻤습니다. 그 뒤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나 용기가 필요할 때는 이 반지를 낍니다. 지금도 회사 현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수익이 나면 나누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직원들도 노사 상생의 문화를 만드는 데 힘을 모으고 있고요. 급변하는 국내외 상황에서 제조업을 운영해 나가는 게 쉽지 않습니다만, 직원들과 함께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게 사회적 책무란 생각으로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AMP동창회장을 맡게 되셨는데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능력보다 중책을 맡게 됐어요. AMP가 우리나라 최초의 최고경영자과정이다 보니 기수 높으신 분들의 자부심이 대단하셔요. 다만, 오래되다 보니 기수 간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기수단을 묶어서 네트워크를 잘 형성해 볼까 계획하고 있습니다. 서울대와 사회에 기여하는 동창회로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학부보다 입학이 더 어려운 과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과정인지 설명해주세요.
“말 그대로 최고 경영자 과정이라, CEO나 대기업 임원으로 입학을 제한하고 있어요. 초창기에는 나이 제한도 있었고, 경쟁률이 6 대 1을 넘긴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AMP에서 좋은 네트워크를 갖게 되는 것도 장점이지만, 뛰어난 교수님들로부터 최신 경영 이론을 배우는 등 경영에 큰 도움을 받습니다.”
-인생 스토리가 많으신 것 같습니다. 고려대에 입학하셨다가 단국대 행정학과로 졸업을 하셨던데, 사연을 들려주십시오.
“1972년 고려대 재학시절 상과대학 총무를 맡고 있었어요. 3선 개헌 이후 학생 운동이 한창일 때입니다. 학교에 군인들이 파견돼 있었어요. 데모는 몇 번 안 했는데, 임원이라는 이유로 제적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군대에 가게 됐고, 제대 후 대학 졸업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제적생을 받아준 단국대로 졸업을 하게 됐죠.”
-우리엔터프라이즈의 전신인 풍우실업에 다닐 때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을 하셨던데 따로 공부하신 건가요.
“처음 일한 회사는 썬파워 배터리로 유명한 서통그룹 계열사인 동해생명보험사입니다. 입사시험으로 영문 적성검사를 치렀습니다. 제적을 당한 뒤에도 영어 공부는 열심히 한 덕분에 1등을 했고, 회사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 교육을 해주겠다고 하더라고요. 1976년도인데, 보험회사들이 한창 컴퓨터를 도입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컴퓨터 학과가 없다 보니 신입사원 중 세 명을 뽑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가르쳤습니다.”
-이후 풍우실업에 와서 8년 만에 기획부장이 되셨습니다. 능력을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35세에 나가셨는데, 다른 계획이 있으셨나요?
“당시 풍우실업에서도 컴퓨터를 도입해 프로그래머를 모집했습니다. 스카우트돼서 모든 업무를 전산화하는 일을 했죠. 재무, 회계, 영업, 생산, 인사 등 모든 분야를 공부하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만,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목표는 아니었어요. 30대가 되면 개인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창업주이신 장세원 회장님의 신임을 받아 미국에서 교육도 받을 수 있었고, 기대하는 게 있어 나오기 쉽지는 않았습니다. 제 결심이 확고하다 보니 보내주셨는데, 나중에 회사에서 부르면 다시 와 달라고 하시더군요. 퇴사 후 무역업에 도전했는데 그게 잘 안 됐어요. 그러다 워너브라더스의 만화를 제작하는 에이콤 콘트롤러로 입사하게 됐고, 2년간 아기공룡 둘리 등의 제작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했죠. 그렇지만 잠시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만두고 개인 사업을 했습니다.”
-그러다 전 직장에서 연락이 온 거죠? 혹시 창업주 회장님과 친족 관계가 있으셨나요?
“전혀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를 인정해 주셔서, GE, 필립스, 오스람 관계자들과 미팅할 때도 제가 가곤 했죠. 회사를 나갈 때, ‘어려운 일이 생겨 연락주시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당시 GE와 합작회사 ‘한국GE조명’을 운영하던 때인데, 1995년 GE에서 합작회사를 인수하려고 했어요. 인수하려면 우리조명까지 함께 해주기를 원했는데 GE가 거부했지요. 2년여 협상 끝에 우리조명이 ‘한국GE조명’을 흡수 통합했습니다. GE와 결별 후 자체 브랜드에 대한 필요성을 느껴 장수램프를 만들었고요. 장수램프에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회의를 하고 있는데 전구가 몇 개 나갔어요. 바로 교체를 했는데 교체하자마자 또 나간 겁니다. 박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전구 하나 제대로 만드는 회사가 없느냐? 제대로 만드는 회사를 찾아내라’ 대노하신 거지요. 당시 해외 수출이 제일 많았던 회사가 풍우실업이었습니다. 우리한테 요청이 들어온 거죠. 그렇게 만들어진 전구에 박 대통령이 오래오래 가라는 의미에서 장수라는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당시 이 제품을 만들고 2000시간 또는 6개월 내에 고장이 나면 환불해 준다는 마케팅을 해서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이후 국내 업체들 수준도 올라오고 하면서 저희는 다시 전량 수출로 돌아섰다가, 1995년 GE와 결별하면서 다시 장수 램프 브랜드를 되살렸습니다.”
-우리엔터프라이즈가 조명 기구만 만드는 회사인 줄 알았더니 계열사 포함 전체 매출액이 조단위가 넘어 놀랐습니다.
“GE와 결별 후 장식용 전구, 형광등만 하는 전통 조명 회사로는 경쟁력이 떨어지겠다는 위기감이 왔습니다. 베트남으로 일부 공장을 이전하고 한국에서는 대체해야 할 분야를 찾아야 했습니다. 때마침 운 좋게 환율 덕을 봐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고, 150억원을 투자해 일본 NEC와 함께 ‘우리 ETI’(우리바이오 전신)를 설립했습니다. NEC와 기술제휴를 통해 TV, 모니터 등 디스플레이의 핵심 광원인 CCFL(냉음극형 광램프)를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2008년부터 CCFL부문 세계 1위 기업으로 기존 일본 기업들의 세계시장 점유율을 뛰어넘는 최초의 한국회사가 됐지요. 그 뒤 LED(발광 다이오드) 패키지 제품화에도 성공해 세계적인 규모의 LED 패키지 기업으로 성장했고요. 한편, 2005년 설립한 뉴옵틱스는 모니터, TV 등의 백라이트 모듈과 TV 세트까지 만들고 있으니 그룹 전체적으로 부품(광원)부터 최종 완제품(세트)까지 아우르는 제품 구색을 갖추고 있는 셈입니다.”
-사명을 우리조명에서 우리엔터프라이즈로 변경하셨는데, 배경은 어떻게 됩니까?
“급변하는 시장에 대처하기 위해 제조업체를 넘어 소프트웨어 등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바꿨습니다. 소프트웨어 분야는 팀을 꾸리고 태동하는 시기입니다.”
-식물공장, 건강기능식품 분야 쪽으로도 사업을 확장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화장품, 제약 원료 시장에 관심이 있어서 이경수 AMP동창회 전임 회장께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부탁드렸더니, ‘시마회장’이라는 일본 만화책을 한 권 주시 더군요. 반도체 회사인 마츠시타가 철수한 공장에 식물공장을 지은 내용이었습니다. 클린룸이 갖춰진 공장이니까 식물공장으로 제격이었죠. 일본은 80년대 중반부터 그런 아이디어를 갖고 했더라고요. 그런데 실패를 합니다. 식물은 잘 자라지만 원가가 너무 들어요. 특수 램프를 써야 하니까 전기료가 너무 많이 드는 겁니다. 저는 조명 전문가고, 우리 회사도 해외 진출로 인해 국내에 빈 공장들이 몇 개 있었어요. 식물공장을 만들면 괜찮겠다 싶더군요. 다만 의약품이나 화장품의 원료로 쓸 수 있는 부가가치 높은 천연물 작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원료 사업에 진출한 이유는, 우리만의 핵심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TV 광원 제조는 중간 부품을 제공하는 수준이라 언제든 다른 업체에 밀릴 수 있거든요. 또 기존의 화학물질을 통해 의약품을 만들 때 탄소 배출이 어마어마합니다. 천연물에서 의약품을 추출하면 이런 문제도 해결이 가능하죠. 즉 ESG경영에도 부합하는 사업입니다. 식약처에서 나와 무슨 제약회사 연구소 같다고 할 정도로 완벽하게 설비 등을 갖췄습니다. 중금속 검사를 할 수 있는 장비까지 마련했고요. 현재 이 식물공장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로 넘어가보죠. 평소 자녀나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창업주이신 장세원 회장님께서 신성품지실(信誠品知實)을 강조하셨어요. 저도 이어받아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신뢰, 성실, 품위, 지식(노하우), 실천이 중요하다는 의미죠. 또 무슨 일을 하든, 자기 자신을 믿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못 해낼 일이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할 수 있다, 내가 해야 한다,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라고 가르쳤습니다. 지금도 매년 미국에 있는 아이들에게 다이어리를 보낼 때 꼭 이 세 가지를 영어로 써서 보냅니다.”
-자녀분들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취미는 어떻게 되시나요. 건강관리법도 궁금 합니다.
“낚시를 좋아하는데 시간이 없어 못 갑니다. 골프는 시간이 많이 걸려 취미라고 하기엔 그렇고. 시간이 나면 좋은 음악을 들으려고 합니다. 팝, 클래식, 트로트 가리지 않고요. 바쁘게 살다 보니 아플 시간도 없었던 것 같아요. 한때는 품질 임원하고 전세계 바이어 업체를 찾아다닐 때 유서를 들고 다녔습니다. 혹시 불량이 나서 항의가 들어오면 어떡하나, 늘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바쁘게 사는 게 건강법이라면 건강법이겠죠.”
-서울대의 위상이 점점 추락하고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서울대가 어떤 학교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글쎄요. 제가 조언할 입장은 아닌 것 같고, 서울대뿐 아니라 국내 많은 대학들이 산학협력이 잘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한 것 같아요. 지금은 제도의 문제인지, 산학협력을 한다고 해도 따로따로 노는 것 같습니다. 제가 식물공장을 하면서 몇몇 대학들과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좀 동떨어진 느낌을 받았어요. 학문적인 방향으로 너무 치우치는 경 향도 있는 것 같고요. 서울대가 앞장서서 산학관계의 틀을 잘 정립해 주면 좋겠습니다.”
-인간 윤철주의 계획을 들려주시죠.
“젊은 시절에는 성취욕이 강했던 것 같아요. 그걸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 같은데 요즘은 베풀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베푼다고 해서 어느 기관에 기부하는 것 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회사를 잘 유지 발전시키는 것도 넓은 의미의 베풂이지요. 그리고 안산에서 30년째 불우이웃 돕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을 주로 도웁니다. 굉장히 힘든데 법적으로 도움을 못 받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이젠 뭔가를 성취하기보다 저로 인해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더불어 사는 삶에 가치를 두고 싶습니다.” 정리=김남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