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론(運命論) 그리고 인과(因果)
1975년 내가 태백산 도솔암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어떤 집에서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생김이 아주 흉한 째보였습니다.
볼 두 쪽이 쌍으로 째어진 째보여서 아이가 울 때마다 째어진 뺨이 팔딱거렸으며
뾰족한 턱의 모양이 무슨 짐승처럼 보이는 데다가 우는 소리는 꼭 염소울음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어찌나 불량스러웠던지
돌이 막 지나 두 살 된 아이인데도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수하기 위해 잠깐 벗어놓은 시계를 구정물에 집어 던지는가 하면
화장대의 화장품은 잡히는 대로 집어 던졌으며 병이고 항아리고 모두 다 깨뜨렸습니다.
몇 해 전 식구들이 모두 영양실조에 걸려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그때 이웃 사람들이 염소 고기를 먹으면 좋다고 하기에 염소 한 마리를 구해서 잡아먹었습니다.
그런데 염소를 그냥 잡아먹으면 노린내가 나서 먹을 수가 없으므로 죽이기 직전에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염소 목에다 줄을 걸고 무거운 짐을 끌게 하여 모진 고통을 주면 노린내가 없어진다는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집안 식구들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 염소를 논밭으로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끌고 다녔습니다.
탈진한 염소는 마침내 지쳐 쓰러져 죽었고 가족들은 그 염소를 삶아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 직후 곧 태기가 있어 이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그 집안사람이나 마을 사람들은 그 아이의 생김새와 울음소리 나쁜 짓만 골라 하는 아이의 짓거리를 보고
“저것이 집안을 망치고 원수를 갚으러 태어난 것이 틀림없다”라며 하나같이 걱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일은 인과의 법칙을 벗어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어떤 원인에 의해 결과가 생겨나는 것이며 원인 없이 결과란 있을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우주와 인생의 모든 일을 인과와 연기의 전개로 보며,
인과의 도리를 벗어난 우연론이나 창조론은 전부 이단으로 봅니다.
어떻게 하다 우연히 생겨난 세계라거나 전지전능한 신이 이 우주의 생명체를 창조했다면
설사 잠깐의 실수로 잘못 창조하고 잘못 관리했다면
즉시 다시 개조하고 재창조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역사의 현실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우주와 인생의 신비는 오직 불교의 육도윤회를 통한
무시 겁으로부터 인과법으로 풀지 않고서는 해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불교의 인과론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운명론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운명론은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의 사주팔자와 함께 모든 일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자율적인 의지와 창조적인 노력이 아무리 강해도
삶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불교의 인과론은 모든 일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있습니다.
나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서 현재와 같은 삶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결과가 어제의 행위가 원인이 된 것이고,
오늘 내가 짓는 행위는 내일의 결과를 낳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인과론은
내일을 창조하고 오늘의 고뇌를 근원적으로 개조하기 위한 인과론입니다.
숙명적인 운명론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절대로 가벼이 흘려서는 안 됩니다.
인과의 법칙이 확연하고 과보(果報)의 응징이 엄격한 것은
마치 그림자가 물체를 따르는 것과 같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 일타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