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gc[2].jpg ugc[2].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chosun.com%2Fweb_file%2Fblog%2F405%2F78405%2F8%2F20150107_065721_08b6aef06d8214107c34a0e1ffcb6266.jpg)
광화문 앞 해태상의 아픈 역사.
경복궁에 있는 광화문 앞 해태상이
관악산을 향해 고개를 돌려 보고 있다.
흔히들 그것은
관악산이 화기 넘치는 화산인 까닭으로
경복궁이 화제가 자주 일어나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원래 해태상은 광화문 앞
4-50m쯤 앞에 육조 거리의 사헌부 앞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육조 거리에는 이조 호조 예조 병조 등
정부 육개 주요관청이 있고 한성부 사헌부도 있었다.
임금이 경복궁 근정전에 앉아서
남쪽으로 보면 동편에는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 기로소가 있었고
서쪽에는 예조 중추부 사헌부 병조 공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중의 사헌부가 지금의
정부 종합 청사 부근에 있었는데 사헌부 앞에 해태가 앉아 있었다.

해태는 예전 전해 오는 상상속의 동물로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는 영물이라고 해치라고도 한다
중국의 <이물지(異物誌)>에 보면
해태는 동북쪽 깊은 산속에 사는 짐승인데 뿔이 하나 있고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들이 싸우면 뿔로 바르지 못한 사람을
드리받고 옳지 못 한자를 문다고 하였다.
중국 순 임금 때 법을 담당했던 신하가 옥사를 다스릴 때
해태로 하여금 죄 있는 사람은 드리 받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법과 정의를 지키는 동물로 여긴다.
법이라는 법(法)자는 원래 삼수 옆에 해치라는
‘치’자 밑에 ‘거’ 자가 있었는데 즉 물처럼 잔잔한 마음으로
사람을 가려내 죄인을 뿔로 받아 버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 후 세월이 지나면서 삼수 옆에 거(去)자 만 쓰인다고 한다
물 흐르듯 간다는 뜻이다.
* 해치라는 한자는 컴에 찾으니 없어서 쓰지 못 합니다.
그래서 관리의 비리를
감찰 탄핵 하는 부서인 사헌부의 상징으로 여겼다.
조선시대 사헌부 수장 지금의 검찰 총장격인
종이품 대사헌의 관복의 흉배에는 해태가 새겨져 있다
다른 문반관리는 공작, 기러기, 학, 같은 부드러운 이미지의 동물이다
또 사헌부 관리 들은 해태 문양이 든 모자를 썼다.
이 모자는 해치의 치자를 따서 치관 이라고 했다
<인조실록>에 그 이유는 ‘부정한 기운을 물리치는
동물 이기 때문’이라고 밝혀져 있다.
그러나 실은 해태는 용처럼 상상적인 동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광화문 일대가 모두 소실되어
그후 그 지역이 300여년 동안 폐허가 된 채 방치되었는데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육조 거리도
복원이 되고 그때 해태를 사헌부앞에 세웠다
조각한 사람은 당대 이름난 석공 이세욱이라는 분이다.
고종 7년 (1870) 2월 10일자 승정원 일기에 보면
‘해태 이내에서는 백관이 말을 타지 못하도록 엄히 신칙 하다’ 는
고종의 하교가 있다.
그후 1900년대 초까지 위엄스럽게 있었는데 일제 때 조선 총독부를
건축하면서 그 일대를 모두 철거하고 해태는담 밑에 거적대기로
덮여 방치 되었다가 건물이 완성되고 총독부 앞에 세워져서
식민지 지배본부 총독부를 지키는 신세가 되었다.
(참고,총독부건물은 1916,6,25일 지진제를 지내고 시작해서
1926년 10년 만에 완공)
그 후 한국 전쟁시에 또 불타 버린 광화문이
1968년 현제 자리에 복원 되고 지금의 자리에 앉혀졌다.
그 해태는 우리 국운과 같이 우여 곡절이 많은 해태다.
그 후 해태에 대한 인식도 원래의 정의로운 상징이라고 한 임무는
사라지고 불 못나게 하는 해태가 되었다.

참고로 국회 의사당 앞에도 해태가 있는데
그것은 국회 사무총장이던 선우종원씨의 회고에 의하면
자문 위원이었던 소설가 박종화씨가 화제를 예방 하려면
조선시대처럼 해태를 세워 화기를 눌러야 한다고 하며
1975년 의사당 완공과 함께 세웠다고 하고
그 해태상의 제작경비는 해태 제과가 부담 하였다 고 하였다.
‘해태제과공업주식회사
대표이사 박병규 기증’ 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또 해태 밑에는 당시 해태 주조에서 생산된
노불와인을 가져와서 기념으로 많이 묻었다고 한다.
그런 뜻으로 여겼던 해태가 요즈음
검찰청 앞에도 있고 시도 경계에서도 볼수있다.
그러나 그런 해태와 같은 해태지만 광화문 앞 해태는
많이 다른 우리국가의 운명을 같이한 역사적인 해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