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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춘문예공모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시가좋아
신인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하반기 신인문학상 당선작(1)
물의 전집全集 외 4편
김이솝
소금쟁이들이 수면 위 점자를 읽는다
좌에서 우로 상류에서 중류로 읽어가는 동안
수초 끝에 둥근 활자들이 모인다
바람이 넘기는 이랑의 페이지, 송사리 떼가
속독으로 읽고 가는 목차 안에 본문이 있다
묵화로 찍히는 달빛의 낙인烙印이 하류로 떠오를 즈음
활자 사이를 건너온 개구리들이
시구詩句를 낭송한다, 독경 소리 밤새 요란하다
활자들의 비린내를 찾아든 찌불 하나
월척을 감지한 듯 물의 표지에 파문이 인다
문맥에 혈판을 흡착시킨 거머리들이 행간을 파고든다
책의 부피가 늘어날 듯 수초를 감고 있는 물뱀
문맥의 중심에 다리 하나를 박고 서있는 왜가리도
고개를 숙이고 숙독하느라 여념이 없다
연꽃 넓은 귀 안으로 여명이 오고
생각을 탕진한 물자라가 문장 밖으로 떠오른다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들
서쪽 별들이 충혈된 눈을 들고 산을 넘어간다
어린 햇귀들이 필사하고 있는 물의 마지막 페이지 안,
쿵!
전집이 닫히고 물 밖으로 치솟는 새떼들
흩날리는 세계
구름의 상점 문을 열고 바게트를 굽는 아침
꽃은 이쪽으로 건너오기 위하여
신발에 묻은 향기를 허공 속으로 툭툭 털어내고 있습니다
왕벚나무 밑동에 코를 처박고 킁킁대다가
오줌을 지리고 가는 개, 견공에 끌려가는
아이의 영역 안으로 꽃잎의 그늘이 지나갑니다
우리는 빵을 나눠 먹으며 전속력으로 늙어가죠
하루치의 구름과 지고 있는 꽃잎들에게
견인증명서를 떼어주는 것은 이 나라의 악법이지만
당신이나 나나 꽃잎의 범죄자
우리의 영역 안에 숨거나 숨겨주거나 방치하면 할수록
꽃의 가속도는 지구보다 빠르고
저녁, 아침, 오후, 새벽이란 관념에 익숙해지는
당신이 괜찮다면 상점 문을 열고
구름 바게트를 한입 베어 물 수 있는 내일을 허락합니다
왕 벚꽃들이 머리 위로 낭창대고 어깨 위에 난분분 떨어져
더러는 짓밟혀도
우리의 한나절이 어지럽게 흩날리는
전속력의 정사情事라면
봄비를 듣다
1.
휘어지는 갈대밭, 타닥타닥 어둠이 튀는 소리
2.
비의 냄새엔 무기가 없고 허공의 흰 뼈가 흘러내리는 흙담 위
툭, 마당에 떨어져 뒹구는 빗소리
빗소리를 밀고 가는 지렁이
3.
읍내 술집을 찾아가는 바짓가랑이 사이 랜턴 빛에 모여드는 빗방울
빗방울이 툭툭 끊기는 석쇠 위, 지글지글 타고 있는 빗소리
4.
잠의 바깥쪽 알전구를 갈아 끼운 새싹들이
왼쪽으로 내리는 빗소리를 오른쪽으로 쏟아 붓고
세모로 듣는 빗소리를 네모로 눕혀 듣는 일직선 안
비의 건축은 진흙으로 흘러내린다
진흙의 몸 안 무수히 켜지는 필라멘트들
죽은 신경이 꺼내 든 풍경의 척추들
오른쪽으로 흘러내리는 빗소리를 왼쪽으로 받아 마시며
직립으로 완성되고 있는
먼
자작나무 숲
입체적인 책
아파트를 눕혀 놓은 사람이 있다
가구의 오른쪽을 왼쪽으로 눕혀 놓고 멀리 있다
멀리 있기 때문에 불행해진다
바위를 변방으로 옮겨 놓고 허공을 일으켜 벽을 읽는 여자
책을 들고 지하철을 타거나 풍경 안으로 침대 하나를 오랫동안 버려둔 여자
죽은 문장들이 빼곡히 들어찬 서재에서
씻지 않은 얼룩으로 누워있는 시간의 병자들이, 시인이었다 해도
남루한 바지를 걸려고 눕혀 있는 못 위에 별을 통째로 쏟아 부은, 시인이었다 해도
웜홀 안으로 사라진 비비 인형을 주차선 밖으로 꺼내는 일
주차선을 공중에 긋고 난 뒤
공중에 새로 생겨나는 것들을 입체적이라고 말하는,
영화배우 같은 일
더스트 볼을 친 공중볼이 실은 공중으로 날아가지 않았다는 거
대문을 지나 현관문을 지나 변방의 서랍 안으로 굴러갔다는 것
달팽이 관 안쪽 깊숙이 가라앉는, 가라앉는 먼
딱, 하는 소리 뒤
트램펄린을 타는 아이처럼 일어서는 벽,
허공 너머 힐끗 보이는
놀이터 빈 나무의자에 앉아 잠시 행복해진다는 것
전망 좋은 방
한쪽 눈을 잃어버린 은빛 고양이
안개는 슬레이트 지붕을 스스스 타고 간다
난독증에 걸린 간판들이 흰 수갑을 차고 수요일에 걸쳐있다
수요일까지 살아남은 19세기의 여자들 중에
이곳을 지날 때면 몽롱해지는 늙은 여자
파지를 담아 오르는 언덕을 내려다보는 것
어제의 꽃들은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해
멍- 창밖을 내려다보는 일
나무의자를 창가에 붙이고 창문을 열고 창밖을 내려다보는 일
19세기의 쾌청한 하늘은 중세의 어딘가에 버려져 있고
안개와 지붕의 구간마다 반복되는 휘어진 아침,
늙은 여자의 위태로운 전진을 바라본다
비닐봉지를 든 채 나무 아래에 서 있는 아이들의 미래는
조금씩 커질 것이다, 수요일까지 살아남는다면
생生은 자신의 유일한 사건임을 목격할 것이다
생각의 뿌리에 귀를 대고
사라진 새들의 목소리를 흉내 낼 것이다
흐려진 머리칼을 부스스 할퀴고 흩어지는
‘은정이네 슈퍼’의 ‘네’ 자만 언뜻 보이는
지워진 간판 앞, 종이 상자를 펴고 있는 중세의 여자
검은 봉지 속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썩거리는 수요일
젖은 빨래들을 북- 찢어 놓고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넘어가는 은빛 고양이
열 번의 괘종소리가 들려오는 골목길에서
‘은정이네 슈퍼’와 ‘럭키 약국’과 아이들의 목소리와
수레바퀴를 뱉어내고 있다
수요일까지 살아남은 꽃들이
스쿠터를 타고 마을 밖으로 사라지고 있는
우리들의 전망 좋은 방
▪ 당선소감
숨어있는 것들, 찾아낼 터
김 이 솝
꿈속의 사물들은 시적인 것들로 가득하다. 그것들은 현실에서 다시 생생하게 재현된다.
현실의 경험이 꿈속에서 재생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안과 밖을 가리고 있는 구조는 꽃과 그 꽃을 가리고 있는 담장의 차이다.
시를 쓰면서부터 그 담장 너머의 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일과 휴식과의 관계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려고 한다.
숨어 있는 것들을 보는 것이 시다.
시인은 이러한 시적인 것들을 찾아내어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언어의 장인이 아닐까?
당선 소식을 접하고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산중 통화이탈 지역의 소류지를 찾아 거기서 보이지 않는 물속과 어둠 속 털 달린 착한 짐승들과
물고기들과 하룻밤을 서로 견디고 오는 일. 세파에 물들지 않은 것들, 풍경, 소리, 하늘과 느림과
고요 속에 나를 던져두고 나를 깊숙이 바라보는 일.
거기서, 사람과 사물과 어떻게 다시 소통해야 할지 생각하고 와야겠다.
미천한 작품을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사랑하는 가족, 인사동의 시의 도반들, 직장 동료들, 친구들 모두에게
고마움의 손을 내밀고 싶다.
▪김이솝_본명 김대성.1962년 대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현재 서울 거주.
2014년 천강문학상 우수상 수상.
전자주소 : ds328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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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반기 신인문학상 당선작(2)
슈나우저*를 읽다 외 4편
김은호
텃밭 가장자리를 곡괭이로 파서 열고 흰 무명천에 책을 싸서 묻는다
삽으로 흙을 뿌려 덮으며 흰머리멧새 울음소리도 몇 송이 얹혀준다
오랫동안 읽었던 부드럽고 따듯한 이야기들이 땅속으로 스며든다
사방팔방 무너져 내려 집에 쌀 팔 돈조차 없던 때
길에서 주워온 슈나우저 한 권
검고 부드러운 털로 덮인 표지에 반짝반짝 두 개의 별이 박힌 책
첫 장부터 끝까지 팔짝팔짝 뛰어다니며 풍성한 수염 출렁거리던
가끔 붉은 혀로 세상을 핥아주거나 컹컹 꾸짖을 줄도 아는
슈나우저는 따뜻한 난로가 부록으로 묶인 책이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유쾌한 문장들 쏟아지고
우리 집 웃음소리 굴뚝처럼 높아갔다
책과 독자 사이를 오가던 수많은 사연 잿빛으로 물든 날
‘우리 함께 고통을 이겨냈어요’ 이별의 장을 앞발로 버티며
너덜너덜 노래하던 책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지셨다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로부터 온 통증이 죽음까지 내달았다
열심히 나를 뒤적거렸지만 슈나우저 한 권 찾아내지 못했다
일상의 책장에 꽂혀 멀뚱멀뚱, 어머니를 바라보기만 하던
나는 슈나우저만도 못한 파본破本이었다
*슈나우저(schnauzer) : 독일 원산 반려견의 한 품종
투명인간
지퍼를 세게 올린다. 비뚤어진 감정이 목젖을 물어뜯는다.
점퍼 속에 오리 울음이 가득하다.
점퍼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싸구려 방식을 향해 삼거리 편의점 불빛이 컹컹 짖는다. 찌그러진 냄비 속에서 오리의 꿈이 식어간다.
내가 기르던 오리들이 모두 객사했다. 비가 오면 공룡은 우산을 삼켜 버린다.
툭 하면 뒤통수치는 세상, 뛰어봐야 한통속 애인이 먹여주는 밥에서 공룡의 똥냄새가 난다.
세수할 때 콧구멍을 찌르는 새끼손가락, 약속 같은 것은 하지 마! 허기로 쌓아올린 벽이 쩍, 입 벌리면 죽은 시계나 던져줘라.
아스팔트 위에 오리들이 쏟아진다. 물음표에 부딪혀 죽은 어머니를 업고 빙빙 돈다.
넘어간 트럭 짐칸에서 붉은 달이 떠오른다.
눈물은 어디서부터 단단한 뼈가 되는지 내 중심은 왜 이렇게 물컹물컹한지 평생 뒤뚱거렸으나 어제가 떨어지지 않는다.
빌딩 높이로 쌓이는 어둠의 네모난 입들이 꽥꽥거린다.
구름공동묘지
새가 사라졌다
유리창 속으로 끝없이 사라지는 새
나는 그것을 새가 깨졌다고 읽는다
오그라든 발이 제 마지막 울음을 움켜쥐고 있다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리며
허공에서 보낸 한철을 뱉어내는
죽은 새를 손에 들고 구름을 바라본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 파닥거린다
물음표를 물고 사라지는
모든 눈 깜짝할 새를 위하여
구름에 새를 묻어 준다
노을의 피가 소복에 배어 나온다
구름 공동묘지에는
날개 없이 날아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하얗게 덮여있다
이별을 오래 만지작거리면 구름이 된다
구름이 되지 않고는 건너갈 수 없는 슬픔이 있다
깨어지지 않으려고 부르는 노래,
직박구리 같은 새의 울음에서는
못으로 유리 긁는 소리가 난다
산짐승 우는소리를 듣는 저녁
산길을 내려오다
산짐승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떤 짐승의 울음소리인지 몰랐지만
그것은 노을에 가장 어울리는 음악
또 어쩌면, 말 못할 서러움을
오래 삭힌 노래일 것도 같았습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샘솟듯
허공을 토해내는 소리에
저물던 산이 휘청거리고
구름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나는 눈물 애호가는 아니지만
그 어떤 울음도 꺾지 않으렵니다
출렁이는 어깨 위에 조각배 같은
손 하나 얹혀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울음소리 난 곳 돌아다보는 나를
숨어 바라볼지도 모르는 눈
그 샘물에 나를 씻고 싶었습니다
며칠 후,
숲에서 다시 그 소리 들렸습니다
내게 하소연하는 것 같기도
우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산짐승 울음소리 뒤 저 바깥세상에는
누구의 손도 잡지 못하고 홀로
눈물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산 그림자 밟으며 봄날은 멀어져가고
울음을 잘 배우고 싶은 저녁입니다
낙타, 산으로 가다
명지산* 기슭에 낙타 떼가 나타났습니다
산 전체가 한 마리 커다란 낙타로 옷 갈아입었습니다
낙타 빛깔로 물든 낙엽송들, 그 빛깔과 냄새, 부드러움이
촘촘히 잘 짜인 한 필의 카멜텍스입니다
낙엽송 고목을 쓸어안고 울던 가수 배호,
스물아홉에 죽음의 사막으로 간 그의
낙타 울음 같은 노래가 요즘 들어 자주 들려옵니다
아직도 그는 모래알을 씹으며
바위 같은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겠지요
바스러진 내 나이를 바라보면
터벅터벅 모래 언덕을 오르고 있는 그가 보입니다
오래전 신기루에 부딪혀 죽은 내 뼈들이
가끔 발에 채이기도 합니다
낙타 눈처럼 슬픔에도 높은 연비가 있다면
나는 시간을 등짐 지고 어느 별까지 갈 수 있을까요?
별빛 내린 사막 어느 오아시스에서 잠들 수 있을까요?
낙타 등에 실린 노래들이 바람에 흔들립니다
오늘은 나도 쌍봉낙타 타고 가는 가수입니다
*명지산 : 경기도 가평군 북면에 있는 해발 1,267M의 산
▪ 당선소감
소금 같은 시를 위하여
김 은 호
‘난 이래서 시가 좋아 지극히 따분한 일상의 순간까지도 의미가 있게 되잖아 이런 평범함도 어느 순간 갑자기 진주처럼 아름답게 빛나거든, 그게 시야'
―영화 ‘비긴 어게인’의 대사 중, ‘음악’을 ‘시’로 바꾸어 쓴 글
오랫동안 시와 거리가 먼 곳에서 지냈다. 몸에 맞지 않는 작고 요란한 옷을 입은 내가 많이 낯설었다.
내가 겪은 모든 고통과 음악을 가방에 담고 이 세상에 없는 시간을 여행하는 꿈을 꾼다.
내 안에 시 흐르는 소리 듣는다. 가평 명지산 계곡 옆에 나를 심은 후였다.
언어에 맛을 내는 소금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소금 자루를 메고 삶의 식탁을 찾아가는 이제 나는 소금장수다.
시간의 강물을 건너다보면 소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맛인 소금의 맛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내 시에 좋은 울림통을 달아주신 《시와소금》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삶을 시처럼 시를 삶처럼 살아가는 이 땅에 훌륭한 시인들, 문우들께 감사드린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으로 가득한 가평성당 교우들께도 인사드린다. ‘샬롬!’
내 시의 비평가인 아내에게 스코틀랜드 시인 로버트 번즈의 시에 곡을 붙인
‘My Love Is Like a Red Red Rose’를 들려주면 내 시에도 좀 좋은 점수를 줄 것 같다.
▪김은호_경남 진해(창원시)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졸업. 종합상사 파나마 주재원.
홍콩에서 무역업.
현재, 경기도 가평군 명지산 거주
전자주소 : guapo10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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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심사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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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와 진술 사이에서
매월 몇 십 권의 시집이 사무실로 들어온다. 그만큼 시인이 많다는 뜻이어서 일견 뿌듯하다. 그런데도 시가 푸대접을 받는 시대다. 시가 독자로부터 외면을 받고 시인의 전유물로 전락한 요즘 사태가 심각하다. 시를 쓰는 시인은 많은데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망연자실해진다. 이를 어떻게 하면 바로 잡을 수 있을까 생각하는 요즘이다.
결국 독자들로부터 관심을 끌지 못하는 요인은 분명 시인 자신에게 있다고 하겠다. 분별없는 언어의 나열, 과대한 망상과 신변잡기식의 관념, 하나 새로울 것 없는 상상과 익히 보아온 흔한 소재의 차용 등―도무지 시에 대한 깊은 맛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 삶과는 동떨어진 언어의 유희, 현란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향기 없는 무슨 암호와 같은 기호의 범람을 새로운 시라고 치부한다. 또 하나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보고 느끼는 대로 쓰는 안일한 표현과 서정으로 전혀 새로움을 찾아보지 못하는 것이 독자와의 간극을 더욱 벌여놓고 결국은 시를 외면하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이제부터라도 시의 감동성을 회복하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새로운 상상력과 참신한 언어의 미학을 보여준다면 분명 시를 외면한 독자도 다시 시를 읽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이런 믿음에 기대를 거는 것이 신인상이다. 국내는 물론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처음으로 독일에서도 본지 신인상에 응모한 시인이 있었다. 이 작품들을 대상으로 심사자들이 세심하게 작품들을 며칠을 두고 독해하였다. 그 결과는 여전히 실망스러웠다. 많은 응모작들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선명하지 않았고 시적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거나 장악하지 못하여 겉치레를 한 작품들도 많았다. 또한 의도적으로 언어를 비트는 등 기교에만 치우친, 이른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시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자연풍광이나 일상의 사소한 일들을 일기처럼 쉽게 쓴 단순한 시들도 많았다.
시조와 동시 부분에서는 최종심에서 거론될 만한 수준작들이 없어서 이번 신인상에서는 뽑지 않기로 하였다.
또한 평론부분에서는 창간 4년차에 접어든 시점이라 웬만하면 당선작을 내기로 마음먹었으나 응모한 평론들이 심사자들의 눈에 들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응모작 대부분의 문장력이 부족했으며, 또한 시를 바라보는 눈이 한쪽(의미)으로만 치우쳐 있어서 아쉬웠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글의 체계성 확립에도 많은 수련이 요구되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시 부문에서는 그나마 괜찮은 작품들이 있어서 행복한 시 읽기를 할 수 있었다.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돌려라 돌려라」 외 9편, 「팽나무 아래의 밤」 외 9편, 「편지」 외 9편, 「바느질의 달인」 외 9편, 「비 온 뒤 우울」 외 9편, 「물의 전집」 외 14편, 「도마, 도맛밥」 외 9편, 「여인이 만들어낸 하루」 외 9편, 「슈나우저를 읽다」 외 9편, 「마령」 외 9편, 「화장」 외 9편, 「햇살」 외 9편이 최종심 대상 작품들이었다.
위에 거론된 작품들은 삶과 밀접한 언어구사로 나름대로의 시적 성취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관념적인 언어의 유 희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었으며 시를 시답게 만드는 기폭장치를 시의 행간에 녹여내고 있었다. 또 새로운 시 창작방법의 시도와 풍성한 언어의 미적 감각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서 어렵게 당선자를 내기로 하였다.
「물의 전집」 외 14편을 응모한 김이솝은 풍성한 언어구사를 통해 시가 묘사로 시작해 진술로 끝난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다. 시적 전개가 거침없이 활달하여 막힘이 없었고 전체적인 전개구조도 흠잡을 데 없었다. 이 작품 외에 「입체적인 책」「흩날리는 세계」「봄비를 듣다」 등의 좋은 작품이 당선작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어서 앞날에 대한 믿음이 컸다.
「슈나우저를 읽다」 외 9편을 응모한 김은호는 삶에 깊이 뿌린 시적 재능과 어느 대상이든 시로 형상화하는 기법에 확신이 갔다. 자연과 문명이 만나는 중간에서 자신만의 개성적인 시적 리듬을 갖고 있었다. 다만 늦깎이의 등단으로 앞으로 각고의 정진이 없다면 시적 성취를 이루는데 한계가 있다는 우려를 안고 있었다.
시는 인간의 가치와 삶의 질을 고양하는데 그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들 당선자들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다. 이제 시단에 이름을 내민다. 이에 안주하지 말고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시를 시답게 만드는 감동성 회복으로, 아무도 밟지 않은 첫 눈길을 걷는 것과도 같은 참신한 언어의 구사, 그리고 함부로 흉내 내지 못할 새로운 상상력으로 시단의 큰 기쁨이 되어야할 것이다.
두 당선자에게는 박수를, 아깝게 선에 들지 못한 모든 분들에게는 가까운 시일 내에 시단에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를 함께 보낸다.
―심사위원 : 공광규, 박해림, 서범석, 이영춘, 이화주, 임동윤(글)